소설을 잘 읽지않는 저에게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독서토론 스페이스 덕분에 급하게 읽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아마도 <연금술사>의 감동이 아니었다면 아마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주식쟁이인만큼 많은 텍스트나 컨텐츠를 접하더라도 결국 투자와 연결하곤 합니다.
이 책도 그렇게 읽혔는데요 여러분도 한 번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보시길 권합니다.
베로니카는 24살의 슬로베니아 출신의 여성으로 완벽해보이는 조건들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서도 권태로움과 부족함을 느끼며 결국 자살시도를 하게되고, 정신병원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일주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되죠.
그녀는 정신병원 안을 탐험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의 의지를 다시 불태우게 되고, 결국 그 병원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녀가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로 했던 '권태' 와 '뻔함' 은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느껴본 혹은 느끼고 있는 감정이죠.
삶에 진정으로 부딫히지 않는 자에게는 권태라는 감정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안락한 집 안 거실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폭풍우를 보며 "난 폭풍우를 경험했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밖에 나가서 폭풍우를 맞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폭풍우를 이겨낼 힘도, 폭풍우 이후의 따뜻한 햇살을 느낄 기회도 빼앗아갑니다.
강압적인 부모, 획일화된 사회 등 여러가지 걸림돌과 벽으로 변명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본질은 나가지 못하고 결국 머물렀다는 것이죠.
책에서 비트리올, 아메르튐으로 표현되는 이 병은 바로 '안주'라는 것일 겁니다. 자신을 둘러싼 보호망 안에 안주하는 것. 주변 모두가 이야기하는 삶에서 정답을 찾는 것. 그것에 만족하는 것. 자기 성찰과 나아감을 멈추는 것.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말에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깨닫지만 다시 월요일이 되며 잊어버린다는 것은 이 비트리올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은 기투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 스스로 자신의 본질로 나아가는 존재 라는 것이죠.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베로니카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 이미 죽어있기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스스로 기투하지 않고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라는 사르트르의 다른 말을 빌리면 실존을 탐구하지 않고 남들과 사회가 만들어놓은 본질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자의 본질은 '앉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 '실존'하여도 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이 없습니다. '어떠해야만 인간'이라는 것은 없죠. 스스로 '실존'할 뿐입니다.
의자는 다리가 부러져 앉을 수 없게되면 쓸모가 없습니다. 본질이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어떤 방식으로 있어도 그는 인간이고 그는 자신의 의미를 가지고 스스로 의미를 찾아갈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약자이니까요. "사회규범이건 특정 대상이건 권위에의 복종", "지적이건 물질적이건 허영에 대한 가면" 입니다.
그 가면 안에서 우리는 안락함을 느끼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의 맨얼굴은 없습니다. 가면은 가면일 뿐이니까요.
아주 가끔 우리는 그 가면을 벗어던진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미쳤다' 고 혹은 '어리석다' 고 이야기 합니다.
무수히 많은 역사 속의 거인들은 그 시대의 '광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강하기 때문에 가면을 벗은 것이 아닙니다. 가면을 벗었기에 강한 것이죠.
스스로 그 어떤 규칙에 얽메이지 않고 그 규범의 본질을 봅니다. 그 어떤 허영에도 안주하지 않고 처음부터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딫혀갑니다. 그게 그 거인들의 삶이고 <연금술사>에서 코엘료가 이야기한 '자아의 신화를 찾는 여정' 일 것입니다.
코엘료의 소설은 연금술사도 이 책 베로니카도 조지프 캠밸이 이야기한 '영웅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현실에 안주한 주인공은 어떤 계시를 받거나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모험을 떠납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련을 겪고 강해지고 동료를 만난 후에
마지막 시련을 만나며 죽고 부활하며 새롭게 변모합니다.
이후 다시 귀환하고 여신의 선물을 받죠.
이 이야기 플롯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는 것.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역시 우리의 인생이 이것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저 집안에 머물러있기 좋은 세상입니다. 모든 정보와 이야기가 내 손안에 머물러 있고 '손에 잡히는 곳'에 두기 좋은 세상. 진정으로 상대와 부딫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내가 직접 겪지 않아도 부딫히지 않아도 그랬다고 착각하기 쉬운 세상이죠.
우리는 무언가를 탐구할 때도 요약을 찾고, 탐구할 대상을 찾을 때도 남들의 추천을 찾는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편안한 삶에 안주하는 거죠. 모른다는 것을 진정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저 역시 이 글 안에 무수히 많은 '남의 말'이 들어있습니다.
고레벨의 플레이어를 보며 그가 가진 아이템을 부러워하지만 그가 탐험해온 플레이는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김연아를 보며 부러워하지만 그녀의 훈련은 할 생각이 없죠.
일론 머스크를 부러워하지만 그의 삶은 따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아이템과 인기와 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겪어온 시련과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이런 삶의 권태를 날려버리고 강제적으로 실존에 부딫히게 만드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죽음>과 <사랑>이죠.
죽음의 위협은 매우 본질적인 두려움이기에 안락하게 집안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곧바로 뛰쳐나가 부딫혀야 하죠.
사랑은 자신의 맨얼굴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가면을 사랑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맨얼굴을 보고싶어하고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로니카를 왜 슬로베니아인으로 설정했을까? 는 재미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슬로베니아는 세계의 화약고 였던 발칸반도의 소국입니다. 세계사의 수많은 사건의 중심지 혹은 시발지였고
이 책이 쓰여진 1998년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후 유럽연합에 가입되기 전의 혼란스러운 과도기였습니다.
베로니카가 죽음으로 강제로 기투되었고, 사랑으로 다시 스스로를 기투한 것과 슬로베니아의 혼란은 재미있는 연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정신병원을 뛰쳐나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녀는 아마 훨씬 더 많은 실패를 하고, 상처를 받고, 후회를 하고 살 겁니다.
스피노자는 후회라는 감정을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마 수많은 상처를 받고 후회를 하겠지만, 그래서 다시 집안에 틀어박히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이제 진정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연금술사를 최근에 다시 읽고 서평을 써보려하는데 여기에서 거기서 할 이야기까지 다해버린 것 같아 걱정이 되네요 ㅎ
하지만 연금술사의 마법은 그렇게 하라고 또다시 다음 탐구를 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