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의 <일반이론>으로 자본주의는 수정되고 다시 큰 도약을 하게 된다. 수정자본주의

일반이론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을 때의 해법을 제시함으로써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을 일축했다. 자본주의가 고장 나면 잘 고쳐 쓰면 되지,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해법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유효수요(소비로 연결되는 돈)'이다.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하지 않을 때 정부가 소비자(노동자)들에게 소비할 수 있는 돈을 만들어주라는 것이다.

즉 경제가 침체되어 있을 때에는 정부가 빚을 얻어서라도 정부지출을 늘려 소비자들이 직접 소비할 수 있는 돈을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것.

케인스주의를 대표하는 정책은

1.불황이 닥쳤을 때 대규모 공공사업 등을 통해 부족한 유효수요를 단기적으로 크게 공급하는 공공지출 정책들과

2.평소 서민들의 부족한 소득을 보완해 꾸준히 유효수요를 창출시키는 다양한 근로 및 복지정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듯 대규모 재정 투입의 단기적인 처방을 비난하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불황은 결국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에게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며 단기 처방의 불가피함을 피력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 분배와 복지는 연민보다 유효수요 때문

국부의 입장에서는 소득이 고르게 분포될수록 유리해진다.

유효수요는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소비할 여력이 있을 때 크게 높아진다.

예컨대 빵이 50개 생산되는 어느 나라에서 10명의 소비자가 있고 1명이 최대 빵 5개를 먹을 수 있으며 이 나라 총소득이 방 50개 정도라고 가정하자. 만약 이곳의 총소득 50개가 고르게 10명에게 분배된다면 10명 모두 빵을 5개씩 소비할 수 있어 유효수요는 빵 50개가 된다. 하지만 이 곳의 소득이 불평등하여 총소득 50 중 8명이 3의 소득을 가져가고 나머지 2명이 13의 소득을 얻게 된다면 이 빵에 대한 유효수요는 (8명X3개)+(2명X5개)=34개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소득의 균형과 분배가 케인스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는 이유이다. 특기할 것은 케인스주의자들의 입장은 빵집 주인, 즉 생산자 또는 기업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유효수요를 높여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소비할 여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는게 케인스주의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반기업적 이론이 아님을 확인하자

승수효과가 높을수록 국가의 총 유효수요는 높아진다. 승수효과는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강하게 주장하였는데 재정정책을 통한 정부지출이 10이라면, 이 돈이 돌고 돌아 총 유효수요는 그 몇 배나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10의 소득을 받으면 그 중 5를 소비하는 계층보다 8을 소비하는 계층으로 정부지출이 행해지는 것이 승수효과가 높아 경기 부양에 유리하다. 이러한 연유로 소득의 상당 부분을 소비로 지출하는 서민에게 혜택을 많이 주는 복지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일반이론, 즉 케인스주의를 많이 적용하는 정부일수록 정책 실행을 위해 세금을 많이 걷기도 하고 세금지출도 많이 하는, 이른바 큰 정부가 되어야 한다.

이 때 필요한 세금은 주로 고소득층과 부유층으로부터 걷고 세금 지출은 주로 중산층과 서민들을 위해야 하는 것이 케인스주의의 원칙이다.

때문에 복지정책은 주요한 케인스주의의 정책이 되었다. 하지만 힘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은 오히려 국부론 에서는 일부 보이지만 건조한 일반이론 책 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케인스주의자들은 불평등이나 위화감 차원의 사회적,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보다 많은 유효수요 창출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복지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중고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중고 오디오 세트 값으로 지불한 돈은 임대료나 다른 자본 비용으로 세지 않고 100% 판매자의 소득이 되어 또 다른 소비를 부르며 승수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다.

한편 케인스는 '이자 소득자는 안락사시켜야 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어조로 안전자산 투자자들을 경멸하였다.

반면 주식 투자에 대한 사랑은 지대했다.

부동산에 대해서는 큰 언급이 없었는데 이는 이미 아담 스미스 또는 리카도와 같이 고전주의 경제학에서도 부동산으로 수입을 얻는 지주들을 '기생충'이라는 다소 과한 표현을 쓰는 등 부동산 임대 소득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다루었기에 그 궤를 같이한 것으로 인식된다.

재정을 투입하여 유효수요를 확대시켜도 이로 인해 물가가 많이 오르면 효과가 없을 뿐더러 나중을 위해 써야할 소중한 재정 자원을 낭비하는 모양이 된다.

경기가 나쁘지 않을 때 정부지출을 크게 하는 것은 케인스주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때문에 확대재정정책을 실행할 대 사이클의 정확한 진단과 실행 시 물가로의 전이 여부의 올바른 판단이 필요하다.

정부지출은 최대한 유효수요를 많이 유발하는 곳에 실행되어야 한다.

유효수요를 최대한 많이 창출하기 위해서는 정책을 실행하는 상황에서 고용효과가 높아 노동비로 지출이 많이 되고 이를 통해 승수효과가 높은 곳으로 지출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현대 선진국에서의 대규모 SOC 사업은 기계와 기술이 차지하는 자본비용 비중이 높아 고용유발계수와 승수효과도 상당히 낮아 주의가 필요하다.

서민들에게 혜택이 가면서 이들을 통해 소비를 많이 하도록 하는 정책들이 승수효과가 높다. 월급쟁이들에게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나 현금영수증을 통해서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은 매우 좋은 승수효과를 냈다.

자본가나 지주들이 소득에서 소비하는 비중보다는 월급쟁이들의 소득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일반 노동자들에게 되돌려주는 세금은 다시 소비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기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비를 싼 가격에 서민들에게 제공한다든지, 고령자들에게 무료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승수효과 차원에서 매우 좋은 정책이라고 본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비를 1만원 싸게 책정하는 것은 서민의 소득이 1만원 올라가는 것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통해 보다 많은 이동을 한다는 것은 보다 많은 소비를 하며 승수효과를 높인다는 말과 같다.

하얀 코끼리 정책을 경계하라. 정부 정책은 경제적으로도 효율성이 있는 곳에 실행되어야 한다.

지속적으로 재정에 부담만 되고 있어 전형적인 실패한 '하얀 코끼리 정책'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즉 경제적 부가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공공사업은 그만큼의 돈을 태워 없애는 것과 같다.

일본 사례와 같은 쓸데없는 공공사업처럼, 만약 1조원을 투입했다면 그중의 1000억원은 노동비로 지급되어 승수효과가 일부 발생됐겠지만 나머지 9000억원의 세금은 그냥 날려 먹은 꼴이다.

그럴 바에는 케인스의 말처럼, 땅 속 깊이 현금을 묻어 놓고 서민들에게 땅을 파서 돈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경제학파는 경제주체를 개인으로 보는지 계급으로 보는지, 정부의 시장 개입을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시장은 효율적인지 비효율적인지, 인간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지 아닌지 등의 관점 차이로 분류해볼 수 있다.

고전주의학파는 경제활동에서 소비보다는 생산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당시에는 아직 산업화 초기 단계에 있었기에 현대와 같은 대량생산의 상황을 목격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론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신고전주의 경제학바

고전주의의 이론들을 계승,발전,보완하여 미시경제학으로 구체화시킨 경제학파다.

인간은 합리적인 주체라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개념과 모든 정보는 합리적인 시장에 즉시 전달되어 가격에 반영된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을 더욱 공고히 하여 신고전학파의 근본 가정이 되었다.

대공황 발생 전까지 주류경제학의 위치를 차지했던 신고전학파는 대공황 이후 케인스학파에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다 오일 쇼크 이후 같은 핏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파와 함께 다시 주류경제학의 위치를 되찾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 위상을 많이 상실하였다.

초 강성 자유시장주의, 오스트리아학파

오스트리아학파는 정부의 경제정책 개입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

자유시장주의 신봉자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그 중심에 있다.

고전주의학파나 신고전주의학파는 인간과 시장이 합리적이기에 정부가 시정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오스트리아학파는 개인도 합리적이지 않고 시장 또한 뇌세포처럼 너무 복잡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괜히 인위적인 변수를 주어 재앙을 만들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논리를 세운다. 활동 기간 중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부터 주류경제학이 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모태가 된다.

국부론에서 거시경제학을 계승,수정한 케인스학파

고전주의 학파의 가치 이론들이 신고전주의학파들의 미시경제 분야로 계승,발전되었다면, 고전주의 학파의 국부를 위한 고찰, 즉 거시경제 분야는 마르크스를 거쳐 케인스학파로 계승,발전되었다.

19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J.R.힉스는 케인스의 생각과 주장을 'IS-LM 곡선'이라는 그래프로 표현하였다.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새뮤얼슨은 케인스와 힉스의 거시경제 이론과 신고전주의학파들의 미시경제 이론을 종합하여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교재를 발간한다.

케인스주의를 누르고 주류경제학으로 올라선, 신자유주의 경제학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신고전학파와 오스트리아학파 그리고 통화론자들인 시카고학파 등 이전의 주류경제학이었던 케인스주의식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많은 학파나 경제학자들이 포함된 포괄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세입과 세출을 줄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 주장은 근본적으로 부유층의 감세와 복지제도의 축소를 뜻한다.

통화론자의 아버지이자 시카고학파의 수장격인 밀턴 프리드먼을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표적인 주자로 본다.

그는 대공황 등 경제위기도 유효수요의 부족이라기 보다는 정부의 억제로 인한 통화량의 부족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는 경제주체들이 통화량의 증가 속도를 예측할 수 있도록 일정한 속도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심리학자였던 대니얼 카니먼이 그의 심리학 논문을 의도적으로 경제학술지에 게재한 사건이 행동경제학의 모태가 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가정을 대전제로 하는 자유시장주의 경제학 입장과 대립되는 학문이기도 하다.

행동경제학에 대한 지지는 학계보다는 실전 투자를 하는 금융업계에서 많이 나왔다.

차가운 머리, 따뜻한 가슴 케인스의 프로파일 "너는 결국 경제학자가 될거야"

케인스, 당신에게 글 쓰는 재주가 있음을 인정하기 싫었어요. 신은 나에게 수학에 대한 어떤 재능도 주지 않았거든요." - 케인스의 기고문을 본 버지니아 울프

그는 '한사람의 지출은 다른 사람의 소득이 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하지 않고 보유하는 돈을 죄악시했고 단순 이자 소득자들을 경멸했다. 때문에 계속 소비하여 자신이 죽는 순간 소유하는 돈이 제로가 된다면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잘 쓰는 것이라 주장하며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평소 상당한 규모의 기부와 소비를 했음에도 그의 가치투자가 성공하여 어쩔 수 없이 많은 유산을 남겼다.

경제지표를 바라보는 눈, 달라야 앞선다.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최종 생산물이 시장에서 거래된 가치를 GDP라고 한다.

GDP = 소비+투자+정부지출+해외 순수출 =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최종 생산물들의 교환가치의 합

GDP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보다 많은 상품이 생산되어 소비되는 것이 보다 많은 국부를 창출하는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GDP는 상품의 교환가치만을 측정한다는 이유로 꽤 많은 사각지대가 있다는 맹점이 있다.

1.자급자족 상품처럼 생산되기는 하지만, 거래되지 않는 것의 가치는 GDP에 산입되지 않는다.

2.홍수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 국민의 재산이 크게 파손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국가의 GDP는 증가한다는 사실도 아이러니 하다.

3.실업급여,기초연금,무상 급식,무료 교통비, 사회봉사활동 등 사회복지 지출의 경우, 효용은 매우 높지만 가격으로 지불되지 않는 활동이나 거래의 상당 부분은 GDP에 산입되지 않는다.

4.GDP 산정에도 '평균치의 함정'이 존재한다. 대다수 구성원의 부가가치 창출 양은 적지만 소수 구성원의 부가가치 창출 양이 매우 클 경우, GDP는 대다수가 느끼는 정도에 비해 매우 크게 나타날 수 있다.

5.해외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큰 부를 얻고 그 부를 배당 등을 통해 해외로 유출시켜도 그 부는 국내 토종 기업이 번 돈과 똑같이 GDP에 산입된다.

6.게임,도박,매춘 등 불법적인 요소가 많은 지하경제도 GDP에 산입되지 않는다.

종합해보면 GDP는 국민이 얻는 효용보다는 거래되는 상품의 가격에 좌우되고 가계의 소득이나 소비보다는 기업의 생산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크다.

때문에 오로지 GDP를 높이는 데에만 정부의 목표가 주어진다면 사회복지 정책과 같이 다수의 국민이 얻는 효용을 높이는 정책보다도 대규모 토목공사 등 일시적으로 GDP를 증가시킬 수 있는 단기적인 정책을 실행하고픈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외국인 지분율이 50%가 넘는 수출 대기업의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들의 성과에 의한 GDP의 홰곡 현상이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이들 대기업들의 성과가 우리나라 국부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하지만 이들의 단기적인 성과 변동에 의한 착시로 우리나라 중산층, 서민들의 경제 상황과 현실이 잘못 읽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GDP는 중요한 지표이지만 결코 맹신해서는 안 될 지표이다.

한국 부자 상위 1%의 평균 재산은 30억원. 만약 이런 기사를 접했을 대 사람들은 어떻게 이 기사의 내용을 해석하고 사실을 인지할까? 먼저 30억원이 있어야 상위 1% 부자가 될 수 있다 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한국의 1%라면 약 50만명이며, 이 50만명의 평균 재산이 30억원이라는 이야기지 50만번 째의 부자가 30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경제성장률, 정체되거나 낮아지면 정말 큰일나는가?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면서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보며, 때문에 0.1%,0.2%의 GDP 성장률 변화에 경도되어 호들갑을 떠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번번이 강조한다.

한편 소득이 낮은 개인일수록 소득증가율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2000만원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빠듯하게 생활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연봉이 다음 해에 10% 상승한 2200만원 정도가 되지 못한다면 더욱 생활이 어려워지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일본이 해외 투자처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배당과 이자 등 투자소득수지가 한 해에 200조원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사람으로 따지면 젊을 때에는 열심히 일하며 월급으로 생활하다 노후에는 그동안 모은 자산에서 나오는 이자나 배당,연금으로 먹고사는 격이다. 인구 규모도 커서 내수 경제도 탄탄하다.

일본의 제로 성장률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으며 지금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오히려 문제는 GDP라는 수치에 너무 몰입되어 이를 되살리기 위해 펼친 과도한 정책들로 발생하고 있다. 유효수요확대라는 케인스 일반이론의 올바른 사용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GDP성장률이란 통계 수치를 진작시키기 위해 정부가 투입한 엄청난 재정정책이 막대한 국가 부채라는 부메랑이 되어 지금 일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섬과 섬 사이에 큰돈을 들여 다리를 놓는 식의 대규모 토목공사도, 인구가 줄어가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실행한 주택 가격 부양책도, 여전히 거품이 제거되지 않아 고평가된 주식시장에 투입한 인위적인 부양책도 경제성장률 상향에는 실패한 채 막대한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라는 멍에만 남겼다.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은 우리나라보다도 한두 단계 아래다.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너무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하여 마치 회춘이라도 하려는 듯 무리한 성형과 보약을 남용하다 부작용만 얻고 가산을 탕진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물가 상승 목푤르 위해 소비세 인상이 필요하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도 제기되고 있다 한다. 정부의 지속되는 실책을 국민들 특히 서민들의 고통으로 메워주고 있는 셈이다.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낮아진 경제성장률에 호들갑 떨지 말고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부동산과 주식의 거품을 적절히 제거하면서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고, 그 많던 재정을 유효수요를 극대화하는 곳에 사용했더라면 지금의 일본은 훨씬 부강한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재정을 결정하는 경제정책 수립자들이 경제성장률보다는 항상 국민들의 효용, 소득 하위계층의 소득이나 국가경쟁력 제고를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다.

비록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큰 불황은 없었지만 금융위기 이후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실질경제성장률은 이전에 비하여 큰 폭으로 하락한 2.8%대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이 10년 동안 적어도 한국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는 주식들의 ROE 평균은 약 10%였다. 매년 10%의 돈을 벌어 2% 내외는 배당으로 지급하고 남는 약 8%의 이익유보금만큼 기업들의 자산이 꾸준히 쌓여 기업이 보유하게 된 재산은 2배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2008년 말 6,800원 정도에 불과했던 삼성전자의 주당 순자산가치는 2018년 말 3만 5000원대가 되었고, 2008년 말 3만 6000원대였던 신한지주의 순자산가치는 2018년 말 7만 5000원 대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1.어느 나라의 경제성장률의 방향(변곡점)을 예측하기는 어렵다는 점과

2.경제성장률의 수치와 기업들의 이익 수치는 방향성은 같을 수 있으나 절대적인 수치로 상응하지는 않는 다는 점 등의 이유로 한 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을 통한 주식시장 전망은 적중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필자의 경우, 경제성장률 전망 수치를 믿고 순응하는 투자보다는 이를 역이용하는 투자 방식을 이용한다. 즉 시장에 경제성장률 지표가 너무 과도하게 반영되어 실제 기업들의 가치에 비해 너무 큰 폭으로 주가가 하락하거나 상승할 때, 이를 매수나 매도의 기회로 삼는 식의 투자가 더욱 성공률이 높다고 믿고 있다.

"통계가 상식적이 아닐 때는 통계보다 감각에 의존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 케인스

동의하는가? 최근 3년간 아파트 매매가 또는 전세값이 치솟았고 웬만한 식당의 밥 한끼 가격도 10~20% 이상으로 훌쩍 뛰어오르는 등 우리가 직접 체감하고 감당해야 할 물가는 꽤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 물가지수란 계기판은 오히려 정책 당국자들로 하여금 디플레이션을 우려하게 하는 수치를 가리키고 있다. 버스 승객들은 버스의 속도가 너무 빨라 불안에 떨고 있는데 버스 기사는 고장 난 계기판에 속도가 너무 낮다며 버스 속도를 더욱 올리는 형국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까?

국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비용의 측정이 필요하고 최대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의 변화가 반영된 물가의 측정이 필요하다. 만약에 대다수 국민들이 신형 LED TV를 구매하고 있는데 물가의 측정은 과거에 쓰던 브라운관 TV의 가격 등락을 측정하고 있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어느 갈비탕 집에서 갈비탕 가격을 2만원에서 1만 8000원으로 낮추는 대신 사용하는 식재료는 한우 갈비에서 수입산 갈비로 바꾸었다면 이 갈비탕 물가는 낮아진 것일까?

소비자 물가지수에서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9.4%에 불과한 것도 이해 못할 대목이다. 그것도 전세값과 월세값이 전부다.

수치로만 보면 우리나라 주거 비용이 너무 안 올라 부동산 불경기를 걱정해야 할 정도이다. 우리나라 가수 순자산 중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인데, 부동산의 매매가격 상승이 물가지수에 포함되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

2차 산업혁명이 이끈 '벨 에포크'와 '위대한 개츠비' 시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곧이어 유럽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나면서 이후 1차 세계대전 전까지 40년이 넘는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2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2차 산업혁명은 남북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자인 미국 북부와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증기기관,방직기,석탄,철도,소비재 산업 등이 1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용어라면 전기,석유,라디오,전화,영화,자동차,인쇄기,중화학공업,컨베이어 시스템 등이 2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 헨리 포드, 테슬러 등이 2차 산업혁명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한편 1차 산업혁명 때와는 달리 2차 산업혁명이 지속되는 시기에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경제 상황이 점차 개선되어 마침내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공장법 또는 노동 관련 법들이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제정되었고 노동조합의 개념도 생겨나고 있었다. 화학비료의 발명으로 식량 생산이 증가하고 소비재의 대량생산으로 노동자들이 과거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상품들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2차 산업혁명의 효과들이 크게 나타난 188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을 '벨 에포크'시대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이런 좋은 시절은 산업혁명을 이룬 세계 열강들만을 위한 축제였으며 산업화를 거치지 못한 많은 나라들은 산업화된 열강들의 먹잇감이 된 불행한 시기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을 통한 풍부한 상품의 대량생산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끌면서도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던 자본주의 모순과 갈등을 잉태하고 있었고, 향후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단초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대량생산으로 상품이 넘쳐났지만 이를 소비할 수요처를 생산과 비례하여 늘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로 보호무역, 식민지 쟁탈 등 자국에서 생산된 수요처를 확보하려는 노력과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토가 계속 확장되고 인구 유입이 지속되던 미국과 달리 독일의 경우 일찍이 식민지 확대에 소극적이었던 바람에 발달한 과학기술로 생산된 상품의 양에 비해 이를 소비할 수 있는 수요자의 수가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겼다.

1888년 약관의 나이로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과잉생산의 문제를 식민지 쟁취와 동구권 및 아랍권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해결하려는 욕구를 가졌다. 그는 즉위 때부터 비스마르크와 그의 평화유지를 위한 정책들을 마뜩찮게 여겨 그를 1890년에 해입하였는데 그 이후부터 유럽에 점점 긴장감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많은 열강들과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밸 에포크 시대의 평화를 깨뜨리고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전범이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지던 유럽경제와는 달리 군수물자 등으로 계속 호황을 누리던 미국은 1917년 마침내 연합군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다. 당시 윌슨 대통령이 밝힌 대로 '민주주의 국가로 뭉친 연합군 국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컸지만, 다시 경제사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연합군 국가들에게 막대한 군비를 빌려준 JP모건 등 금융계로부터의 압력이 컸기 때문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1차 세계대전의 후광 효과를 입어 번영의 시대를 더욱 오래 구가한 미국의 분위기는 1925년에 출간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명작 위대한 개츠비의 분위기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미국에서 나타난 뚜렷한 현상은 공룡 기업들의 등장이었다. 록펠러는 석유산업, 카네기는 철강산업, 밴더빌트는 철도산업을, J.P모건은 금융업을, 그리고 포드와 GM은 자동차산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개혁 성향을 가진 대통령들이 독과점 철폐를 위해 노력했지만 크게 실효성 있는 성과는 없었던 듯하다. 일찍부터 아담 스미스는 독과점이 '보이지 않는 손'의 암적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공황 발생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은 마르크스의 예측과 상당히 일치한다. 19세기 후반기부터 전기와 석유를 이용한 과학과 기술의 혁신으로 수많은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1903년부터는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대량생산 시스템)에 의해 일반 노동자들도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으로 자동차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메이택 사에서 전기 세탁기가, GE사에서는 가정용 냉장고가 최초로 출시된다. 1920년대 초반에는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선진국에서 최초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고 고가의 라디오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이 상품의 홍수임을 추리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은 할부 판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빚을 내어 구매한 것은 할부 판매 상품만이 아니었다. 당시 부동산 담보대출 등으로도 가계부채가 급증하였다.

대출한 돈으로 그들은 활황이었던 부동산과 주식을 구매하여 이들 시장에 거품 가격들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1920년 말경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화려한 날들이 지속될 것으로 여겼다. 주식시장은 연일 활황이었고 미국 가구의 절반이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주식 대폭락 불과 한 달 전인 1929년 9월 예일대 학교의 스타 교수이자 계량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어빙 피셔가 "주가는 고원에 올라와 있어 하락장이 없을 것이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연인 데이지를 믿으며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던 개츠비처럼 사람들은 모든 것이 순탄할 것이라 여기며 희망에 부풀었다.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을 소비자(노동자) 들이 충분히 소비할 여력이 없자, 자동차와 고가의 가전제품들을 중심으로 한 할부 판매가 저하된 구매력에 산소호흡기의 역할을 하였다.

미국발 전 세계적인 대공황은 마르크스가 일찍이 예견했던 자본주의 침몰 모습 그대로였다.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그의 저서에서 호황기에 대공황의 나락으로 떨어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캐딜락을 타고 월스트리트를 누비던 12만 3884명의 투자자들은 이제 걸어서 다녀야 했다. 더 이상 애인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17만 3397명의 유부남들은 조강지처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기에 1억 1183만 5248개의 5센트 동전을 새로 찍어야 했다."

'뉴딜 정책'으로 불리는 모든 정책들의 목표는 중산측, 즉 서민 살리기에 있었다. 공공사업 확대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구제하는 한편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와그너법과 각종 복지법을 제정하였다. 실업보험,노령연금,장애인보험, 하루 8시간 표준 노동 시간, 시간 외 근무 시간, 최저임금제 등의 노동 복지 개념들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뉴딜 정책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금융개혁들도 포함하고 있다. 예금보험공사를 세워 서민들의 예금을 보장해주어 은행들의 안정성을 높여주는 대시 일반 시중 은행과 투자 은행을 분리시키는 등 규제를 강화하여 금융 소비자들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였다. 덕분에 다시 은행을 통해 돈이 돌기 시작했다.

루스벨트의 정책들은 케인스가 주장해오던 경제이론들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모습이었다. 확장적인 재정정책으로 노동자들의 부족한 소득을 채워주는 데 집중했던 정책들은 유효수요를 높여 다시 보이지 않는 손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된 처방책인 뉴딜 정책으로 미국은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였다.

미국발 대공황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후 막대한 전쟁배상금의 부담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 등 최악의 상황을 겪은 후 미국의 도움으로 조금식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던 독일이 문제였다.

대공황 발발로 미국의 코가 석자가 되자 지원이 중단되었고, 독일은 실업률이 40%에 달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이쯤 되면 한 번쯤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패전 후 그렇게 어렵던 경제 속에서, 거기다 악독한 히틀러가 집권한 상황에서 어떻게 독일은 몇 년 만에 세계의 많은 강국들과 대적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집권 후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놀랍도록 루스벨트의 것과 닮았었다. 루스벨트의 정책이 '뉴딜'이라면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뉴플랜'이었는데 그 규모나 과감성 면에서는 뉴플랜이 뉴딜을 훨씬 앞질렀다. 먼저 대규모 공채를 발행하여 엄청난 규모의 아우토반을 건설하고 도시 재정비 사업 등의 공공사업을 진행하며 실업률을 낮추는 데 주력하였다. 아우토반 건설에 드는 비용의 거의 절반이 노동자 임금으로 지불되었으니 이 공사는 가히 유효수요 창출의 화수분이 되었다. 중소기업을 우대하였고 국민차를 보급하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세금을 감세하는 등 서민들의 복지에 힘쓴 것도 유효수요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독일이 망하면 전쟁배상금을 못 받는 영국과 프랑스도 망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망하면 이들의 국채를 잔뜩 가지고 있는 미국도 망한다는 논리로 열강들의 지원도 다시 끌어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1938년에는 이미 거의 완전고용에 이르는 등 세계 대공황에서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 사실상 케인스의 주장들이 옳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증명한 국가가 된다.

1차 세계대전의 수혜를 입어 강국으로 올라섰던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이 되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다. 전쟁 초기 군수산업으로 경제는 부흥했고 뒤늦게 뛰어든 전쟁에서는 큰 경제적 손실 없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승전국이 되었다. 풍부한 금을 소유한 미국의 달러는 금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고 자칫 망가질 수도 있었던 서구권 국가들의 통화가치는 미국 달러와 인위적으로 고정되어 미국으로부터 경제력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 결과 관련된 각국의 통화도 환율 변동 우려 없이 마음껏 무역이나 자금 결제 등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 달러는 고정환율 체제가 된 세계 통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당시 미국의 금 보유량이 전 세계의 70%에 달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이를 토대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어느 정도 미국의 희생을 전제로 설계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참고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준비 과정에서 '가상통화인 방코르를 세계 공통 기축통화로 사용하자'는 케인스의 안과 '달러를 기축통화로 통용하자'는 미국 재무부 관료 화이트의 안이 충돌하여 논쟁되다 결국 화이트의 안이 채택되었다.

경기가 활황일 때 세금으로 비축해둔 돈으로 경기가 불황의 기미를 보일 때 강력한 재정정책을 펼쳐 불황을 없애는 케인스식 처방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잘 운영되어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호황을 이끌고 서민들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다만 이런 정책들을 정부가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높은 세율의 세금으로 대주어야 하는 고소득층과 고액 자산가들의 불만은 꽤 높았을 것이다.

케인스주의의 영향력은 1971년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발언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이다."

케인스주의와 적자재정책에 반대가 높았던 공화당 대통령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이었고, 그 정도로 케인스주의는 정치 이념이나 경제 사상을 떠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오랜 무역수지 적자, 베트콩의 항전으로 미국에서 금이 빠져나가다

세계경제는 여전히 좋았지만 미국 달러가 중심이 되는 브레튼우즈 체제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금 보유량의 상황을 반영하여 달러에 대한 각국의 통화가치를 절상하자고 요구하였으나 유럽 국가들은 일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폐기 하였다.

금 본위제가 폐기된 후 오래지 않아 오일쇼크라는 강도가 침입하였다.

1973년 오일쇼크가 시작된다. 오일쇼크는 10월 6일에 발발한 제 4차 중동전쟁의 연장선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아랍국가들의 석유수출기구 OPEC은 이스라엘이 아랍 점력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원유 가격을 인상하고 원유 감산에 들어가며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석유가격은 1년 만에 4배 가량 폭등하였다. 석유 가격의 상승은 산업화가 진행된 나라들의 모든 상품들의 가격 상승을 의미하였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요인이 되었다.

경제학적으로 오일쇼크는 일종의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특수한 외부 요인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외부 요인으로 발생한 문제는 일반적인 경제해법으로 풀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케인스주의식 해법도 통하지 않았다. 물가가 계속 발목을 잡은 경기는 어떤 부양책을 써도 쉽게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쉬운 점은 당시 경제학자들이 일반이론의 본질을 좀 더 깊게 이해했다면 상황이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오일쇼크 시기 불황의 원인은 유효수요 부족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 대통령, 포드 대통령, 카터 대통령 등이 약 10년 간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정책을 확대해 유효수요를 높이려는 단순한 처방만을 반복했고, 재정 확대를 위해 중산층의 세금까지 높였다.

중산층들은 높아진 물가와 세금의 이중고에 처해져 소비력을 잃었고 그때 이후 지금까지 황금기의 영광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되었다.

자유시장주의경제는 곧 재정 지출의 축소와 작은 정부를 뜻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신자유주의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어마어마한 군사비 지출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비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부자 감세와 군사비 지출 확대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발생시켰고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당시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던 미국을 불과 4년이 지난 1985년에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바꾸는 기적 같은 일을 이루었다.

한편 1980년대 초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FRB에서는 20%까지 기준금리를 인상하였다. 이 금리는 달러의 강세를 의미했다. 상당한 달러의 강세를 결국 미국을 무역수지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바꾸어놓았다. 미국은 이 시기부터 시작된 재정 적자와 무역 수지 적자라는 쌍둥이 적자의 시대에서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재정 적자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레이건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대통령, 아들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이 집권할 때마다 크게 확대되었다. 때문에 큰 정부를 지향하는 클린턴 대통령이나 오바마 대통령의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재정정책을 제대로 펼치기보다 불안해진 재정을 추스르고 위기에 빠진 경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한편 케인스주의의 쇠퇴는 곧 복지정책의 후퇴와 부유층의 감세를 뜻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지니계수는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당시 시작된 전 세계적인 양극화 현상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심화되고 있다. 중산층이 갈수록 얕아지고 있는 것이다.

1929년 대공황과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는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공통점1 - 산업혁명의 성숙기(생산 호황기)에 발발

공통점2 - 빈익빈부익부 심화

공통점3 - 가계부채의 빠른 증가

두 위기는 모두 자유시장주의 경제정책이 시행되던 때에 발발했는데 자유시장주의는 곧 복지의 축소를 뜻하고 복지의 축소는 곧 서민들의 유효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 하반기 엔화 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일본에 많은 부작용을 주었다. 일본 제품의 가격이 2배로 올랐기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출 경쟁력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일본 기업들의 생산시설이 재빠르게 해외로 빠져나가며 국내 경기마저 위태로워졌다. 일본은 경기 침체를 우려하여 금리를 대폭 인하했다. 금리 인하로 경기 불황은 진정되었지만 이번엔 시중 유동성이 너무 풍부해졌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에서 투기 열풍이 불며 자산 가격에 버블이 발생하였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자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줄어들었지만 기업들이 보유한 부동산 가치를 따지면서 주식 시장도 덩달아 급등하였다.

결국 과거 많은 버블의 붕괴처럼 이때도 자산 가격이 자산의 효용을 초과하는 상황으로 시장 시스템을 붕괴시켜갔다.

일본의 자산버블 경제와 그 몰락은 앞에서 살펴본 1929년의 대공황과 2008년의 금융위기를 공통점과도 많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부동산과 주식 등 투자 자산 가격의 거품은 그 투자 자산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작동을 멈추게 하였다.

지난 30년의 불황 기간 동안 일반은 적극적인 공공사업과 0%까지의 기준금리 인하를 통한 통화량 확대 등 엄청난 경기 부양책을 실행하여왔다. 하지만 왜 경제는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며, 오랫동안 소위 '유동성 함정'에 빠져있는 걸까?

1.1990년대에 실시된 엄청난 물량의 공공사업들이 유효수요나 효율성의 문제를 간과한 채 하얀 코끼리를 양산하였다.

일본의 사례는, 정부 재정의 물길을 터주는 역할을 해야지, 스스로 그 물이 되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었다.

2.유효수요 창출을 위해서는 서민 또는 중산층의 소득이 매우 중요하나 이를 등한시하였다.

위기 이후 일본은 인건비 상승은 기업과 국가경쟁력의 약화라는 시각을 유지해왔고, 이 시각이 지속적으로 경제정책에 반영되었다.

아무리 기업들이 수출을 많이 하여 외화를 벌어와도 그 돈들이 노동자들이나 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국부가 증가하지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대항해 시대 스페인을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3.가치와 배치되는 인위적인 가격이나 수치 위주의 정책을 펼치며 재정을 낭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