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장미의 이름>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 작품에는 12세기 르네상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개혁적인 프란체스코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던 보수적인 베네딕트파 간 교회 내 갈등이 잘 그려져 있다.

이탈리아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심은 자본주의의 씨앗은 중세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생산과 상업, 무역이 활발해졌고 엄격한 기독교 교리에서 다소 자유로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손실보상금, 경비, 선물 등의 명목으로 사실상 이자를 취하는 방식의 금융업도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신용이 좋은 무역상들의 약속어음은 일정 이자율로 할인되어 거래되거나 화폐처럼 유통되었다.



하지만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백년전쟁을 위해 빌렸던 거금의 대출을 갚지 않자 페루치와 바루디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이후 메디치 가문이 최대 은행으로서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피렌체에서 득세한다.

무역이 활발해지자 무역 중심지인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들에서 환전상 같은 금융업자들이 양산되었다. 베네치아나 제노바에서는 '샤일록'으로 묘사되는 유대인들이 금융업을 장악했고 피렌체에서는 페루치와 바루디같이 대형 은행으로 변신한 무역상 가문들도 생겨났다.

가문의 수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 에 의해 1397년 설립된 메디치은행은 이후 로마, 베니스, 나폴리, 바르셀로나, 런던, 리용, 아비뇽 등 유럽에 16개 지점을 개설하는 등 사실상 최초의 근대식 은행이었다.

메디치 은행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이들 지점들을 이용한 편리하고 안전한 은행 시스템이다.

교황청의 금전 출납 담당이 된 메디치은행은 각 지역의 헌금들을 모아 교황청에 보내고 이 돈들을 다시 각 지역 교회들에게 나누어주는, 즉 현금이 왔다갔다 해야 하는 거래들을 대신하여 각 지점의 장부에 기재하며 장부상에서 주고 받는 계좌 이체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이탈리아어 사전에서 한글로 '벤치'라고 입력하면 이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로 'banco'가 뜬다.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나무판을 가져다 놓았는데 그 나무판은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벤치 역할과 물건을 두고 거래하는 매대 역할, 돈을 두고 교환하는 환전판 역할도 하였다. bank의 기원이 된 것이다.

중국어인 은행의 유래는 과거 중국의 화폐, 조세제도 등의 중심이 '은'이었다는 사실과 '행'자가 사거리 모양을 본 땄다는 사실을 조합하여 '은이 다니는 사거리'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명 유대인들의 성경이나 율법에도 이자의 수취를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유대인을 제외한 타민족들에게는 이자를 수취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있었다는 데 있다.

편법을 이용한 이자 수취는 훨씬 오래전부터 공공연하게 성행했지만 이자 수취가 사실상 합법화된 것은 150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구교에서는 교황 레오 10세가 1515년 최초로 공식적으로 이자 부과를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한다. 신교에서는 종교 개혁자이자 장로교회의 창시자인 장 칼뱅이 철저한 성경의 해석 끝에 이자 수취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냈고, 칼뱅의 활동 무대 였던 제네바 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제네바가 현재 전 세계와 스위스의 금융 중심지가 된 연유를 이러한 오랜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장 칼뱅의 해석은 수많은 부유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이 신교로 개종하도록 이끈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 유명한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이 이 가문에 헌정할 목적으로 쓰여졌다든지, 최초의 오페라와 발레가 이 가문의 연회를 위해 탄생했다는 등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 메디치 가문의 대규모 금융자본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라는 역사의 페이지가 아예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메디치 가문이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그들이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느 정도 여지를 주었다 해도 아직 당시에는 돈으로 돈을 버는 행위가 죄악시 되던 때였기 때문에 예술과 피렌체에 대한 후원 등으로 죄를 씻으려는 심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거대 금융업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홍보를 하고 고가의 건물을 보유하여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이는 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피렌체의 대저택에 머물렀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유럽 곳곳의 상류층과 교류하며 메디치은행의 방송 광고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정계에도 진출하여 엄청난 권력을 과시하기도 한 메디치 가문은 총 세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며 유럽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문에서 배출된 교황 레오 10세는 성장 과정에서 몸에 밴 화려한 성품 때문에 결국 두 가지 방면에서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사치스러운 생활로 교회 재정이 파탄나자 그 유명한 '면죄부'를 무분별하게 팔아대었고 면죄부 판매에 저항하는 마르틴 루터를 파면하여 종교 개혁을 유발했다. 종국에는 중세 시대를 끝내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한편 그는 당대 최고의 거부 야코프 푸거에게도 큰 빚을 지는데, 야코프 푸거의 강한 요구로 1515년에는 이자 부과를 인정하고 고리대금업 금지를 해제하는 칙령에 서명하게 된다. 결국 그의 이자 수취 합법화는 근대 자본주의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요리 문화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1만 장이 넘는다는 수많은 요리와 관련되 기록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젊었을 대 같은 공방 동기인 보타첼리와 함께 '세 마리 개구리 깃발' 이라는 주점을 경영하였는데, 거기서 요리사 역할을 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와인 오프너, 코르크 마개, 마늘 짜게, 후추통 등 각종 요리기구 또한 그에 의해 고안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요리에 대한 다빈치의 열정은 그가 남긴 명작 <최후의 만찬>을 통해 알 수 있다. 게으르고 지구력이 약한 그의 성품 때문인지 그가 끝까지 완성한 그림은 약 20개에 불과한데 인물화 작품이 많고 규모가 큰 그림이 거의 없어 <최후의 만찬>이 거의 유일한 대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그림 그리기를 꺼려했던 그였지만 그림의 주제가 요리였기에 제작 요청을 승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년 9개월의 제작기간 중 2년 이상을 그림어 어떤 요리를 넣을까 고민하며 허송세월했다던 이야기도 모두 그의 요리에 대한 열정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수많은 종류의 파스타 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스파게티'를 발명한 자가 바로 다빈치였다는 사실도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또한 이를 먹기 위한 삼지창 모양의 포크와 소스가 옷에 튀는 것을 막아주는 냅킨을 최초로 고안했다고 한다.

한편 화려한 프랑스 요리나 고급 레스토랑의 기원이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에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메디치 가문의 딸 카트린이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에게 시집오면서 데려운 수백 명의 요리사들과 수행원들은 프랑스 상류 계층의 요리 문화에 에티켓을 바꾸기 시작했다.

손으로 음식을 먹던 프랑스인들은 그제서야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들기 시작했고 디저트라는 음식도 먹게 되었다 한다. 이때부터 대규모의 요리사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사치스러운 요리를 만들어내다 왕실과 귀족이 몰락하여 일자리를 잃게 되자 거리로 나와 곳곳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로써 전 세계에 가정식이 아닌 정찬 요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생산된 후추 등의 향신료들이 아랍권을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수입되어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워낙 가격이 높았다. 오스만 제국이 터키 지역을 점령하고 교역료를 통제하게 된 1453년 이후에는 안그래도 비쌌던 향신료들이 더 귀해져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은 해로를 통해 인도나 동남아시아로 가서 직접 향신료를 직거래하여 큰 이윤을 남기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향신료를 독점하던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국가들보다는 향신룔르 훨씬 더 비싼 가격에 사야 했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인들의 욕망이 더 컸다.

대항해 시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이유는 지리적 입지 조건 외에도 이런 경제적인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콜롬버스가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맸던 곳도,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가고자 했던 곳도, 마젤란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항로를 개척하며 가고자 한 곳도 인도, 동남아시아와 같은 향신료 산지였다.

영원할 줄 알았던 스페인의 빠른 몰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교역을 통해 아무리 많은 금과 은이 나라에 들어와도 그것들이 서민들의 경제활동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 나라의 부는 절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온 막대한 양의 은들은 국내 다른 산업을 위해 투자되지 못했고, 스페인 기득권과 금융업자들의 손을 거쳐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것들이 많았다. 스페인 경제는 온통 식민지의 상품들을 약탈하는 것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네덜란드나 영국같은 신흥 세력에 밀리자 국가가 한순간에 쇠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한편 스페인이 통일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1492년, 스페인에서 있었던 또 한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알함브라 칙령'이라는 유대인 추방령이 그것이다. 결국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에서 떠나게 되었다. 금융과 무역을 융성시키던 이들이 떠나게 된 것이 스페인의 민간경제를 황폐화시킨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많은 경제사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찰흙으로 빚은 그릇을 간단히 구우면 '토기'가 된다. 이 토기에 유약을 바른 후 좀 더 높은 온도로 구운 것을 '도기'라 한다. 도기와 자기를 총칭하여 '도자기'라 하는데 자기가 도기와 다른 점은 고령토 흙(사실은 암석을 분쇄한 것이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1,300도 이상의 고열로 구워야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청화백자를 자신들의 기술로 생산해보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고령토의 존재를 몰랐고 도자기 가마의 온도를 1300도 이상 올릴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최대의 거부 베디치 가문도 1575년에 가마를 만들고 많은 과학자들의 과학 지식을 총동원하였지만 청화백자 제작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때 유리를 섞어 만든 아류작, '메디치 포슬린'이 현재 수십 개가 남아 있어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오랜 시간 경과 후, 1710년이 되어서야 독일의 마이센 지역에서 유럽 최초로 제대로 된 청화백자를 생산해낸다.

청화백자의 비밀이 밝혀진 이후부터 중국의 과학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며 중국의 힘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러한 경향이 커지며 결국 아편전쟁,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령 등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대항해 시대의 선박단들을 꾸리기 위해서는 대규모 자금의 투자가 필요했다. 선박단은 식민지와의 무력 충돌과 곳곳에 포진한 해적들과의 교전을 위해 상당한 군사력도 함께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에 그런 대규모의 자금을 단독으로 댈 수 있는 투자가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높은 국력을 가진 나라의 왕 정도였고 이들 또한 모든 선박단의 자금을 항상 충분히 충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규모 자금을 다수의 투자가로부터 모집하기 위해 최초로 채권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유가증권인 채권이 약속어음이나 차용증사와 구분이 되는 점은 한꺼번에 다수의 대여자에게 대규모 자금을 빌린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투자자금을 돌려줘야 하는 채권이나 어음은 엄청난 위험성을 지닌 선단의 사업과는 성격이 잘 맞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탄생한 '주식회사 제도'는 전 세계 패권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동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교역과 상업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오랜 독립전쟁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마침 당시 성행하던 인클로저 현상(지주가 경제성 높은 양털을 생산하기 위해 소작농을 쫓아내고 토지에서 양을 사육하는 현상) 역시 모직 관련 수공업을 하는 부르주아에게 필요한 풍부한 노동력과 재료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이로써 구교회로부터 몰수한 수많은 토지를 왕이 매각할 당시 많은 부르주아들이 싼 값에 매입하여 자신들의 생산 기반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논밭이 목장으로 바뀌는 인클로저 현상이 가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