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콩국수를 예로 들면, 콩국수의 실제 가격은 교환가치, 소비를 통해 얻는 효용은 사용가치,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생산요소가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때 가격이 비용과 효용 사이에 위치하고, 충분한 갭이 존재하여 공급자나 소비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어야, 경제가 활성화 된다고 설명한다.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가치'라는 단어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앞의 내용을 주식 투자로 바꾸어 보면, 주주의 입장에서 주주의 돈인 자기자본(BPS)은 비용이 되고, 주주가 지불하는 매수가격은 가격이 되며, 주주가 얻는 내재가치는 효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재가치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매수할수록, 안전마진이 확보되면서 투자에 성공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채권의 가격은 채권수익률이다. 마찬가지로 주식의 가격은 주식수익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식은 만기가 길고 이자가불확실한 채권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식투자를 이렇게 이해할 때 성공 투자의 길이 보인다.

채권 투자를 하듯이 주식에 투자하는 방법이 바로 가치투자다.

투자의 세계는 자연과학 분야처럼 원인과 결과가 일정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같은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정반대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결과가 그 원인의 또다른 원인이 되는 등 인과관계가 복잡한 분야이다. 제대로 된 투자를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는 현상 속에 숨겨져 있는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투자는 워런 버핏의 "정확히 틀리는 것보다 대충 맞는 것이 훨씬 낫다" 는 명제가 통하고, 어떨 때는 최고가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는 범주에 속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주위를 살펴보면 수학이나 통계 프로그램에 달통한 이들보다도 경제 전반에 대한 인문학적인 소양이 높은 투자 전문가들의 투자수익률이 유독 좋은 경우를 많이 목격할 수 있다.

필자는 인문학적 소양이 높을수록 투자에 대한 혜안을 가지게 되어 보다 성공적인 투자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새로운 투자 기법이나 첨예한 뉴스 또는 정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평소에 보다 넓은 인문학적 분야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경제사의 시작점, 철기 문명

철기를 생산하면서부터 식량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대량생산으로 생겨난 잉여생산물은 유통시장을 탄생시키며 자급자족 시대를 끝나게 만들었다. 유통시장의 발현은 곧 제대로 된 화폐의 탄생을 의미한다. 철기는 상품의 생산 비용을 효용 대비 어마하게 낮추어주는 역할을 하였고, 교환가치 즉, '가격'의 개념도 만들었다. 사실상 최초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사회를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관중은 중국 제나라에서 재상을 지내며 근대 경제학자 못지 않은 경제론들을 주장하였다. 그는 '소비가 적절히 있어야 경제가 돌아간다','잘 먹고 잘 입어야 사람들이 체면과 예절을 알게 된다','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부유하고 강해진다' 며 서민들의 경제에 관심을 가졌고 소극적인 세금정책을 옹호했다.

관중은 지속적으로 육성해야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세금을 덜 물려야 한다고 했다.

세수가 줄어들어 어려워지는 재정은 소금을 독점 판매해 메우라는 대안도 내놓았다. 풍년이 들어 곡물 가격이 하락할 때 나라에서 곡물을 사들여 비축해놓았다가 흉년일 때 곡물을 방출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도 주장하였다.

한편 <도덕경>의 노자도 세금을 최소하하고 전쟁을 하지 않는 등 자유방임적 경제정책을 펼치는 소극적 정부만이 백성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 주장과도 일치한다.

플라톤은 국가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치가가 부정부패를 일삼게 된다면 국가는 붕괴할 수 밖에 없다며, 정치 계급인 철인들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노인이 될 때까지 엄청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정치가 계급은 사유재산 축적이 금지되었다. 심지어 정치가들은 가족을 만들 수 없으며, 자신의 자식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들이 사리사욕을 취하면 그 국가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주장한 그의 높은 식견에 감탄한다.

인간 중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학

경제 분야에 대하여 밝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도 놀랍다. 플라톤의 자급자족 경제론관느 달리 물물교환과 교역을 중요시한 그는 화폐의 적극적인 사용을 주장하였다. "모든 재화는 화폐로 연결될 수 있다."고 서술한 그는 제대로 된 연결을 위해 화폐에다 그 크기, 품질, 무게 등의 가치를 감안하여 표식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는 "재산은 개인이 소유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재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며 재산의 공동 소유를 주장한 플라톤과 달리 사유재산을 강하게 주장했다. 또 그는 "왜 철이 금보다 훨씬 유용한데 금의 가격이 높을까?" 라며 빵처럼 매우 필요한 물건이 장신구처럼 덜 필요한 물건보다 훨씬 싸게 거래되는 것에도 질문을 던졌다. '한계효용론'을 제시한 첫 번째 경제학자인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있는 "왜 소중한 물보다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높을까?"라는 '물과 다이아몬드의 패러독스' 서술은 한계효용을 설명하기 위해 마치 아리스토텔레스를 오마주한 것처럼 여겨진다. 시장에서 공급자가 한 명일 경우 발생하는 독점의 문제점이 <국부론>보다 수천 년 앞서 언급되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두 철학가는 사유재산에 대한 의견 등 경제에 대한 시각도 너무나 다르다. 한 번쯤 궁금한 적이 없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가장 아끼는 수제자였는데, 어떻게 둘의 철학은 그렇게 다른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시민권자가 아닌 마케도니아 출신의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플라톤이 사망한 후 '아카데미아'의 차기 원장이 되지 못하자, 아테네를 떠나 한군데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았으며 이때부터 플라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을 떠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 리케이온이라는 학당을 설립했다. 그의 대부분 저서는 이 시절 자신의 학당에서 강의하던 강의자료 또는 교과서로 보아도 될 것이다. 플라톤의 학당에서 물러나게 된 반감은 플라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이 비판은 오히려 인간 중심 철학을 더욱 공고히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월이 지난 후 자신이 설립한 학당에서 완성된 그의 철학이 스승인 플라톤의 것과 상반된다는 것은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스 시대 이후 로마 시대부터는 경제에 관한 논의가 거의 사라져버리다시피 했다. 전쟁이 경제논리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부가 필요하면 전쟁을 하여 약탈해오면 되었지만 전쟁을 통해 들어온 재물은 소수 상위 계층에만 집중되었다. 농사를 짓던 서민들이 전쟁을 치르느라 돌보지 못한 논밭을 이들은 집중적으로 매입했고 노예들을 이용하여 논밭을 경작하는 바람에 서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피폐해졌다.

로마의 멸망 원인을 도덕성의 타락, 게르만족은 침입, 또는 출산율 저하로 보는 견해까지 있지만 경제사관으로 본다면, 부동산을 통한 '부의 양극화'로 서민경제가 피폐해져 국력이 크게 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전쟁을 통하여 점령지에서 수많은 자금과 자원을 강탈해온 로마와 1500년대 대항해를 통하여 식민지에서 수많은 자금과 자원을 약탈해온 스페인 제국의 엇비슷한 몰락 원인은 시사점이 크다.

로마 시대 이후 중세 시대에 들어서는 종교의 윤리의식이 모든 경제 논리를 장악했다. 재물의 축정이나 이윤이 죄악시되었으니 경제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없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 척박한 토양에도 자본주의의 씨앗을 심은 이가 있었는데, 13세기의 유명한 철학가이자 수도승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장본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요하게 다뤄져오던 모든 서양 사상들을 집대성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신이 보다 완전한 믿음(자발적 믿음)을 위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다는 주장, 그리고 자유의지로 신을 믿기에 그 믿음은 더욱 가치가 높다는 주장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당시의 억압적인 교리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은 이후 아담 스미스와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근원적인 사상인 '이성적인 인간'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물건의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며 공정가격의 개념을 도입했다. 판매상이 폭리를 취하는 것은 죄악으로 여겼지만, 구매자가 지불에 동의할 정도의 적절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용인했다. 이전의 교리로는 용인되지 않았던 일이다.

이윤이 용인됨으로써 이후 수공업과 상업 활동이 번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표면적으로는 매우 강하게 이자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주장에는 사실상 어느 정도의 이자를 용인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돈을 빌려준 측이 다른 기회를 놓치거나 손해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에 합당한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예외를 둔 것이다.

종교가에 의한 이런 예외적인 이자 허용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이를 근거로 중세에서도 서서히 금융업이 태동할 수 있었다.

자금 대여자가 포기하거나 희생해야 하는 부분에 관하여 이자를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는 논리는, 자본이 미래의 부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투자 개념에 대한 이론적 바탕과 유사하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얘기하는 르네상스는 15세기 전후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 부흥을 뜻한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12~13세기, 과거 그리스에서 전파받아 발전시켜 나가던 아랍권의 과학이나 인문학들이 유럽으로 역수입되어 다시 흥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역사가들은 '12세기 르네상스' 또는 '작은 르네상스'라고 이름 붙였다.

12세기 르네상스의 시기는 십자군전쟁 시기와 맞물린다. 원정 전쟁을 통하여 아랍권의 빛난 문명을 접한 서유럽인들은 그들이 입수한 엄청난 양의 서적을 번역하여 그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 중 12세기 르네상스 번역 캠페인의 핵심 서적은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