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선물시장 '투기의 신' 반복창을 아십니까?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 인천미두취인소

투기 열풍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더욱 뜨거워졌다. 쌀값이 요동치면서 투기 심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1910년 2000만 석대였던 쌀 거래량은 1918년에 3000만석을 넘고 1919년 6000만석을 돌파했다. 반복창이 한해 30만원(2019년 기준으로 약 15억원)을 벌었다고 알려진 1920년에는 9000만 석을 웃돌았다.

1916년까지 15원 안팎이던 석당 가격은 1919년 월평균 35원~48원으로 폭등했다.

​쌀값이 하루에도 몇 원씩 오르내리자 인천항 일대는 논밭을 판 돈을 당나귀에 싣고 온 투기꾼으로 넘쳐났다. 마바라(소액투자자)를 유혹하는 '일확천금 비법서'가 불티나게 팔렸고 중매점들은 현대 '찌라시'의 원조격인 정보지를 만들어 하루에도 수차례 천국과 지옥을 오간 취인소 투사의 무용담을 전했다.

​1921년 결혼식 당시 하루에도 3만 원(2019년 기준 가치로 약 2억원)을 쓴 반복창.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신랑이었던 이 사내의 영화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일본인 미두 중매점에서 일하며 모은 400원을 밑천으로 1920년 한때 재산을 40만원까지 불렸지만, 그 후 손실로 전재산을 날렸다. 아내 김후동마저 세 아이를 남기고 떠나버린 뒤, '투기의 신' 반복창은 합백에서 한판에 몇 전을 거는 '절치기꾼'으로 전락해버렸다. 서른이 되어서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고,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이후 20년 가까이 미두거래소를 떠돌던 미두신은 1939년 불혹의 나이에 송림리 곁방에서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