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아름답고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어머니에게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나는 현재의 나로서 사랑받는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사랑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주 다르다. 어머니는 우리를 탄생시킨 고향이고, 자연이고 대지이고, 대양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자연적 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생후 몇 년 동안은 어린아이와 거의 관련이 없고, 이 초기 단계에서 어린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중요성은 어머니의 중요성과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연적 세계를 나타내지 못하지만 인간 존재의 다른 극, 곧 사상, 인공적 사물, 법률과 질서, 훈련, 여행과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한다. 아버지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어린아이에게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주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하기 때문에,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아이에게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친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해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육친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다. 짐승도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한다. 무력한 자는, 그의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어떤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랑에 있어서만 사랑은 펼쳐지기 시작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이 사랑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 가난한자, 이방인, 과부, 고아, 끝으로 국가의 적, 곧 이집트인과 에돔인이라고 한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실제로 어린아이 - 그리고 어른 - 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낼 수 있다.
모성애는 연약한 갓난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성장하는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진정한 실현을 보는 것 같다. 사실상 대부분의 어머니는 갓난아이가 연약하고 아직도 완전히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에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린아이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자아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오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받기보다는 주는 데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여자 그녀 자신으 실존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여자만이 어린아이가 분리 과정을 밟고 있을 때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 있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장 칼뱅은 자기애를 '패스트'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은 덕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베타적이라고 하는 견해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미덕이어야 한다.
만일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예컨대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지만, 사실은 자신의 관심의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어 있는 적의를 갖고 있다.
이 어머니는 자식을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려고 지나친 관심을 갖느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한 데 대해 당황스러워한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결국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미치는 영향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비이기주의 때문에 어머니를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도니다는 압박을 받는다. 아이들은 덕이라는 가면 아래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신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 구조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류의 발달은 자연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와 땅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이 탈출한 데 특징이 있다.
인간의 역사 시초에 인간은 자연과의 본래의 합일로부터 내던져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 집착하고 있다. 여러 가지 원시 종교는 이러한 발달 단계를 증언하고 있다.
좀 더 발달한 단계에서 인간의 기술이 직공과 예술가의 기술로 발달되었을 때, 인간은 손수 만들어낸 것을 신으로 바꿔놓는다. 이것은 점토, 금,은 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단계이다.
더욱 발달된 단계에서는 인간은 신에게 인간의 형태를 부여한다.
여러문화에서 부계적 종교에 앞서 모계적 종교의 시기가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는 우리가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추리나 재구성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단계로, 부계적 단계이다.
부성애의 본질은 아버지가 명령하고 원칙과 법칙을 수립하는 것이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아들의 복종에 달려 있다. 아버지는 가장 자신을 닮고 가장 잘 복종하고 자신의 재산 상속자로서 후계자가 되는데 가장 적합한 아들을 가장 좋아한다(부계 사회는 사유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그 결과 부계 사회는 계급 조직적이다. 형제로서의 평등은 경재과 상호 투쟁에 굴복한다.
우리는 남성적 신들이 있고 그 중에서 으뜸가는 신이 지배하거나 모든 신이 일자, 곧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제거되어버린 부계 세계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소망을 지워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이 신전에서 전적으로 추방되지 않았던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신의 사랑은 '은총'이고, 종교적 태도는 이 은총을 믿고 자신을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이 도달한 성숙의 정도로서 그의 신 개념과 신에 대한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의 발달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중심의 사회 구조로부터 아버지 중심의 사회 구조로 변했으므로 우리는 사랑이 성숙해과는 과정을 주로 부계적 종교의 발달에서 더듬어볼 수 있다.
이러한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인간에게 자행하는 전제적이고 질투심 많은 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더욱 발달할수록 신은 전제적 부족장의 형태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 자신이 요구해온 원리에 의해 자기 자신도 속박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다.
헛되이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쓸데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궁극적으로 신의 이름을 전혀 말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도 동일한 목표, 곧 신은 아버지이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