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로 더 유명한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는데 이번 기회에 읽음. 사랑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 어떤 자세로 사랑을 대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에리히 프롬의 인생을 보면 이 책이 더 와닿는다.

우리가 또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한편으로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일 수 있다.

<필사>

합리적 비전의 잉태로부터 이론의 형성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신앙'이 필요하다.

과학의 역사는 이성과 진리의 비전에 대한 신앙의 예로 가득 차 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은 모두 이성에 대한 부동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 때문에 브루노는 화형을 당했고, 스피노자는 파문당했다.

살마들이 단순히 환상을 쫓을 때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이 노력을 기울이는 어떠한 분야에서나 창조적 사고의 과정은 대체로 이른바 '합리적 비전' 에 의해 시작되고, '합리적 비전' 자체는 이전의 상당한 연구, 반성적 사고 및 관찰의 소산이다.

예컨대 과학자는 생산적 지성과 정서적 활동에 근원이 있다. 신앙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합리적 사고에서 합리적 신앙은 중요한 요소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나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전제는 단독으로 또는 결합되어서 이 태도를 뒷받침해준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대체로 사랑은 다음에는 결혼으로 이어지게 될, 자발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반대로 결혼은 관습에 의해 계약되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 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할부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또는 그녀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남자에게 매력 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는 매력 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내가 거래를 하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는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아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자도 나의 명백한 또는 숨겨진 재산과 능력을 고려한 다음 나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시장 지향적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권에서 인간의 애정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교환 형식과 동일하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편의상 기술 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습득 외에도 어떤 기술을 숙달하는데 필수인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제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인간의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 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 - 사물과 사람들- 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인류 역시 유아기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꼈다. 토양,동물,식물은 아직도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것은 동물 가면을 쓴다든가, 토템으로 삼은 동물 또는 동물신을 숭배한다든가 하는 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인류는 자연의 세계에서 더욱더 분리되고,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려는 욕구도 더욱더 강렬해진다.

온갖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러한 상태는 때로는 마약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자동적으로 유발된 황홀경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원시 민족의 여러 가지 의식은 이러한 유형의 해결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즘 추구는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 분리감을 더욱 증대한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취적 합일의 모든 형태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2.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3.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 - 그 관습,관례,신앙 - 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가난한 로마인조차도 '나는 로마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긍지를 느꼈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 군중과 약간 떨어져 있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예컨대 탈무드 [유대인의 율법과 그 해석] 에도 표현되어 있다. 곧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만인은 각기 목적이고, 목적인 한에서만 동등하며, 서로 수단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계몽주의 사상에 따라, 여러 학파의 사회주의적 사상가들은 평등을 착취의 폐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 - 이러한 이용이 잔인하든 '인간적이든' 관계없이 - 의 폐지로 정의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자동 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한다.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보통 진보의 조짐으로 찬양되고 있는 성과들 - 예컨대 남녀 동등권 - 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나는 남녀 동등권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등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해서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자는 이제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남자와 평등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현대 서양 사회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박적인 성애 중시, 자살 등의 사례는 군중과의 일치에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오락도 그리 격렬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역시 상투적인 것이 된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 슬로건도 그들에게 지불을 받는다. 휴식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전 연속물, 카드놀이, 사교 파티 등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겠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의 '사랑'을 먼저 검토하기로 한다.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볼 수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이다.

마조히즘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ㅇ리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종교적 맥락에서 예배의 대상은 우상으로 불린다. 피학대 음란증적 사랑의 관계라는 세속적 맥락에서도 본질적 매커니즘, 곧 우상 숭배의 매커니즘은 동일하다.

마조히즘적 복종에는 운명에 대한, 율동적 음악에 대한, 마약 또는 최면적 황홀경에 의해 발생한 도취적 상태에 대한 복종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또는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의 도구로 만든다. 그는 살아가는 문제를 생산적 활동으로 해결할 필요가 없다.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사디즘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일한다. 이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열정의 노예이고, 그들은 쫓기고 있으므로 사실 그들의 활동은 '수동적'이다. 곧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 이다.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동적'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정신을 집중하는 이러한 명상적 태도는 최고의 활동이며, 내면적 자유와 독립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영혼의 활동이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한느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보호,책임,존경,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책임,존경,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들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여성은 거세된 남성이 아니며, 여자의 성욕은 '남성적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