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책이지만 지금 현대에도 관통하는 통찰을 전해준다.

군중이란 한 공간에 많은 인원이 모여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뚜렷한 자극이 발생하는 순간 그들은 군중으로 돌변하고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다.

지적이고 교양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중도 그러지 못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중과 다를 바 없다. 지식인으로 배심원을 꾸려도 그들의 선택과 집단지성은 차이가 없다.

독립된 개인으로 있을 때 우리는 극단적인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 것이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불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중이 되는 순간 군중은 '수'가 부여하는 힘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극단적인 행동과 심지어 범죄까지도 저지를 수 있게 된다. 귀스타브 르 봉은 여기서 이것이 군중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한다.

수 많은 독재자들이 이런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프로파간다를 설파하고 완성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들은 군중 속에 섞여 군중들에게 퍼진 그들만의 진실과 규범을 절대적으로 믿게 된다. 아우슈비츠로 떠나는 기차에 의자들을 없애고 유태인들을 꽉꽉 실어 보내는 그들에게 그건 정의고 선이며 효율이었다.

그들은 평범했고 가정에서는 따뜻했으며 군중이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 말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군중에 섞이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본능적이 되고 더 저열해지고 더 멍청해진다. 즉 책에서 얘기하는 대로 '원시인'에 가까워진다.

군중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글이나 데이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교통사고 데이터 보다, 한 건의 교통사고 장면 혹은 배나 비행기의 사고장면이 더 강렬하게 군중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제 10주기가 된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지 않은가? 그 밖에도 천안함 사태나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분노하게 만들었던 이미지들이 기억나지 않은가? 이 글에는 어떠한 정치적 견해나 사건의 경중에 대한 판단은 없다. 분노한 분들에 대한 비하하려는 의도도 없다. 광우병 사태에서 분노한 군중들을 광장으로 나오게 한 것은 광우병에 대한 어떠한 데이터나 자료보다 비틀거리며 죽어가는 소의 이미지 아니었나?

책의 내용대로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할수록 군중심리가 강해진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보다도 군중심리가 강할 것이다.

결국 독립적 사고다. 나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투자한 회사가 주가가 폭락한다면 남의 블로그글을 보고 텔레그렘을 찾아보고 리포트를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료를 찾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남들의 결정을 어깨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틀리더라도 연습되어야 한다. 또 틀리지 않도록 더 강박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귀스타브 르 봉이 말한대로 주입식 교육이 군중을 만들어 낸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올해가 가기 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