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대 자산운용사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최근 34년여 만에 역대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는일본 증시에 대해 ‘추가 상승 여력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지난 22일, 일본 증시가 장중 사상 최초로 4만1000을 뛰어넘었습니다. 닛케이 증시가 잇따라 최고치를 경신하는 가운데 미국 증시 훈풍이 일본 증시 그래프의 상승 곡선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죠. 핑크 회장은 일본 증시가 다른 국가 대비 대체로 비싸지 않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일부 일본 기업들 실적을 보면 주가가 추가로 오를 것으로 보인다고 낙관했습니다.

<래리 핑크 블랙록 CEO>

일본 증시 훈풍 소식과 함께 또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들렸으니 바로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뉴스입니다. 으잉? 마이너스 금리?? 네 그동안 일본은 저축을 해도 이자를 붙여주지 않았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영국 영란은행(BOE)과 함께 ‘글로벌 3대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일본은행(BOJ)은 지난 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통해 단기 기준금리를 연 -0.1%에서 연 0.0~0.1%로 올렸습니다. 드디어 ‘이자율 있는 세상’에 합류한거죠. 국채 무제한 매입을 통해 장기 금리(10년 만기 국채 금리)를 인위적으로 끌어 내리는 수익률곡선통제(YCC)도 전격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상장지수펀드(ETF)와 부동산투자신탁(리츠)을 매입해 금융당국이 주식시장에 직접 개입해 부양에 나서는 질적 금융완화 정책도 중단하기로 했구요. 한마디로 2013년 이후 지속해 온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모두 올스탑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YCC와 ‘마이너스 금리’ 정책과 같은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은 그 역할을 다했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봐야죠.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딱 한가지입니다. 물가 하락이 멈췄기 때문이죠. 물가 상승도 아니고 물가 하락이라니. 일본만 다른 세상에서 살았나. 그동안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고수한 것은 시중은행들이 가계나 기업에 저렴한 금리로 돈을 빌려 주도록 하는 유도하기 위한 것 입니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 오히려 비용을 내야했으니까요. 이제 조금 이해가 되시나요? 마이너스 금리 대상은 시중은행이었습니다. 내가 국민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비용을 내는건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정말 도 안되는 논리잖아요. 어쨌든 기업과 가계가 돈을 더 쓰도록 부추겼다는 것은 경기가 많이 침체되었기 때문이었죠. 일본은 경기침체와 물가하락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아직 디플레이션 탈피에 이르지 못했다는 입장이 지배적이지만 일본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단 ‘디플레이션은 끝났다’ 입니다.

일본은행 측은 이번 금리 인상의 배경에 대해 “물가 상승과 임금 상승의 선순환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코로나19 부양책으로 돈이 풀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일본 물가는 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해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전년 대비 3.1% 올라 1982년 이후 41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올 1월에도 2.0% 상승했습니다. 일본 최대 노동조합 조직인 렌고는 올해 첫 임금협상 결과로 33년만에 최고치인 5.28%의 임금 인상을 발표했습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일본의 대표 주가 지수인 닛케이225가 올초부터 상승세를 보이더니, 3월 4일에는 4만 선을 돌파했죠. 모든것이 딱딱 맞아 떨어진겁니다.


26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투자자의 일본 주식 매수 금액은 4억3900만달러로 전년 동기(6400만달러) 대비 7배가량 치솟았습니다. 일본 주식 보관금액 규모도 사상 처음으로 40억달러(4일 기준)를 돌파해 집계가 시작된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죠. '일학개미' 들이 들썩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종목별로는 반도체 업종에 일학개미들의 집중 투자가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탁원에 따르면 국내 주식 투자자가 올해 들어 가장 많이 매수한 닛케이 종목은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으로, 총 124억원어치를 사들였거든요.

일본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은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3200억엔(2.8조원)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걸꺼예요. 일본의 반도체 재건 프로젝트로 반도체 공장 건설이 활기를 띠면서 관련 장비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과 더불어 주가가 오르고 있으니 투자 적기이죠. 지금 일본 증시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게 반도체 업계인 것은 사실입니다. 스크린홀딩스와 어드반테스트, 도쿄일렉트론, 디스코 등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 주가가 지난해 말부터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닛케이지수 상승을 견인했거든요. 스크린 홀딩스는 지난 1월5일 이후 이달 5일까지 두 달 사이 주가 상승률이 68.95%에 달했고 같은 기간 도쿄일렉트론(63.56%)과 디스코(62.36%), 어드반테스트(54.09%)도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도쿄일렉트론은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회로를 그려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전공정 분야에서 세계 4대 반도체 장비 업체로서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점유율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코터·디벨로퍼(도포·현상) 장비와 식각 장비 분야 등에서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내년 일본 이와테현과 미야기현에 생산 및 개발 시설 등을 선보일 계획으로 알려져 있죠.

일본반도체장비협회(SEAJ)는 회계연도 2024년(2024년 4월~2025년 3월) 일본산 반도체 장비 매출액이 전년보다 27% 늘어난 4조348억엔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대만 TSMC와 미국 마이크론 등 해외 기업이 일본에 생산시설을 세우며 늘어날 장비 수요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구요. TSMC는 현재 일본과 미국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데 둘의 진행 상황이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TSMC의 일본 공장 건설은 현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지지부진한 실정이거든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의 양배추밭 한가운데 축구장 40개 크기의 부지에 86억달러(11조3천억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이 들어섰는데요. 반도체 공장 설립 당시, 일본 정부는 반도체 제조 허브의 부활을 꿈꾸며 TSMC에 30억달러(약 4조원) 이상의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공장 건설을 위해 수천 명의 노동자를 구하는 데도 도움을 줬습니다. 지난달 준공식이 열린 이 공장은 TSMC의 자회사 JASM이 운영을 맡으며, 예정대로 올해 양산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100년에 한 번 올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이다

TSMC 구마모토 제1공장을 바라보는 일본의 관점

TSMC는 올해 말 구마모토 공장 인근에 2공장을 착공해 2027년부터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며 3공장 건설도 검토 중입니다. 한 시장조사기관에서 TSMC가 1공장을 개소하면서 지난해 59%였던 매출 점유율이 올해 62%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죠. 반면 한국 삼성전자는 11%에서 10%로 줄어들 것으로 관측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일본 경제의 역사를 짧게 언급하고 싶은데요. 일본은 1960년대 후반부터 서독을 누르고 세계 2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했고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은 든든한 보증수표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70년대 미국이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겪으며 반도체 기업들이 움츠러들었을 때, 일본은 이를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반도체 업체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칩을 만들 때 수율을 올리고 가격을 낮추면서 순식간에 D램 시장을 장악했습니다.1980년만 해도 미국 기업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60%가 넘고 일본은 30%였지만, 87년 일본이 80%를 돌파했고 미국은 10%까지 추락했습니다. NEC·도시바·히타치·후지쓰·미쓰비시·마쓰시타 등 6인방이 1988년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을 휩쓸었구요.


하지만 일본이 잘 되는 꼴을 보고만 있을 미국이 아니죠. 당시 미 행정부는 일본 반도체 제품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일본에 불리한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더불어 달러 강세를 멈추기 위해 일본 엔화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 핵심인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는 약세로 돌아섰습니다. 이후 엔화 강세로 일본산 반도체의 수출경쟁력은 크게 하락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제품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왕(日王)의 연호를 기준으로 1989년부터 2019년까지를 ‘헤이세이(平成) 30년’ 또는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잃어버린 30년 이후, 2024년 일본은 다시 한번 세계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라서기 위한 큰 흐름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패권경쟁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한중일 가운데 '내가 제일 잘 나가'라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죠.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은 중국경제에 타격을 입히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중국경제와 동조화 현상이 상대적으로 약한 일본경제는 타격을 덜 받고 있죠. 미중 갈등이 본격 시작된 2018년을 기준으로 한중일 증시 상승/하락 차이를 보면 이는 명확히 알 수 있는데요. 2018년 1월 대비 닛케이는 49% 상승했으나 코스피와 상해지수는 각각 1%, 17.3% 하락했습니다.

<지난 4일 사상 처음으로 4만선을 돌파한 일본 닛케이지수, 출처: 연합뉴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작년부터 시장 개선의 일환으로 PBR이 1배를 밑도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PBR 수준을 높일 것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증시에서 PBR이 가장 낮은 5개 종목은 도쿄전력홀딩스(0.29배), 닛산자동차(0.41배), 일본테레비홀딩스(0.44배), 코니카미놀타(0.44배), 일본이타가라스(0.45배) 등이죠. 작년 3월, 도쿄증권거래소가 PBR 1배 미만 기업이 절반이 넘는 일본 상장기업의 주가 부양책을 마련하기 위해 3300여 상장기업에 기업가치 제고방안을 제출하게 했는데요. 이로부터1년후인 현재,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PBR 1배를 회복한 대표 종목은 시가총액 1위인 토요타인데요. 지난해 3월말 0.89배에 불과했던 PBR은 지난 27일 기준 1.59배로 상승했습니다. 견조한 실적과 엔저 호재로 토요타 자동차 시총은 일본 주식 최초로 60조엔(약 532조원)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증시만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게 아닙니다. 일본의 땅값이 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오른 것으로 알려졌거든요. 일본 국토교통성이 26일 발표한 1월 1일 시점 2024년 공시지가에 따르면 일본 땅값은 전년 대비 2.3% 상승했습니다. 3년 연속 상승한 데다 거품경제 막바지인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라서 이제 정말 일본 경제가 회복되는거 아니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죠. 특히 지방의 땅값 상승이 눈에 띄는데, 앞서 언급했던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이 지난 2월 말 문을 열면서 공장과 가까운 오쓰 마을 상업지 일부 공시지가는 33.2%까지 상승했습니다.

<국가별 가계 현금 비중, 출처: OECD>

이렇게 시장의 전반적인 무드가 긍정적으로 흘러가다보니 일본 국민들의 투자 심리도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버블 붕괴에 따른 트라우마와 오랫동안 이어진 경기 불황 속에 자산을 지키는 방법으로 투자 대신 안전한 저축을 택했던 것이 일본 국민이었죠. 일본 가계 저축액은 약 8800조원에 이른다죠. 통장에서 잠자던 이 돈이 활발하게 증시나 부동산 등 실물 자산으로 이동할지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잠자고 있는 이 돈을 달러로 환산하면 약 7조달러로 독일과 영국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수준입니다. 일본 주가 상승과 맞물려 지난해 일본 가계가 보유한 주식과 채권 가치는 27% 증가한 반면 현금 저축은 1% 증가에 그쳤습니다.

일본 정부도 시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개인 투자자들을 증시로 유인하는 데 적극적입니다. 올해 1월부터 '소액투자 비과세제도'(NISA)를 대폭 확대하면서 비과세 기간을 평생으로 연장했고, 연간 납입 한도액을 120만엔에서 360만엔으로, 누적 한도를 600만엔에서 1800만엔까지 각각 3배씩 늘렸거든요. NISA 확대가 시작되면서 주식 공부 열풍도 불고 있습니다. 일본 서점에는 금융 지식과 주식 투자 방법, 특히 NISA와 관련한 책들이 즐비하고 사설 교육기관에서 여는 주식 투자 세미나에 사람들이 몰려 만원을 이룬다고 하죠.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는게 하나 있으니, 바로 엔화의 약세입니다. 엔화값이 27일 달러당 152엔 가까이 떨어지며 거품경제 시절이던 1990년 7월 이래 약 34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일본은행(BOJ)이 지난 19일 17년만에 금리를 올리며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종료했지만, 이른 시일 내 추가 금리 인상은 없을 것 같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엔화값이 되려 약세를 보이고 있는거죠. 미국의 금리인하 예상도 다소 약화되면서 당분간 미국과 일본 간 금리격차가 크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도 엔 매도·달러 매수세를 부추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정부는 엔화가 이례적 약세를 보이자 외환시장서 달러 매도 개입에 나설 가능성을 시사하며 엔화 약세에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은 이날 엔화값이 34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자 “지나친 움직임에는 모든 선택지를 배제하지 않고 단호히 조치하겠다”고 말해 개입을 시사했죠. 일본 통화당국은 지난 2022년 10월 당시 환율이 151.95엔 수준을 넘어섰을 당시 세 차례에 걸쳐 9조2000억엔을 투입해 엔화 가치 방어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현재 일본 경제는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임금이 오르지 않고, 초고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해 여전히 잠재성장률에선 물음표인 것도 사실이죠. 지속되는 엔저 현상, 노동력 부족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