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드와 커티스는 '언어를 담당하는 좌반구 제거수술을 받암음에도 현저하게 훌륭한 언어능력을 계발한' 아이들에 대해 보고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신피질의 가소성을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한쪽 뇌만 가지고도 별다른 문제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뇌 두 개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한쪽 뇌가 사라지는 것은, 그곳에 저장되어 있는 고유한 패턴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쪽 뇌를 제거해도 꽤 온전하게 작용한다면, 반구는 제각각 작동하며 별개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두 반구를 모두 지니고 있지만 반구를 연결하는 뇌들보가 끊어진 분할뇌 환자는 어떨까? 두 반구가 직접 커뮤니케이션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분할뇌환자의 오른쪽 눈 시야에 닭발 그림을 보여주고(좌반구사용), 왼쪽 눈 시야에 눈이 내리는 그림을 보여주었다(우반구사용) 그런 다음 환자에게 두눈을 모두 사용하여 첫번째 그림과 잘 어울리는 그림 한장을 여러 사진중 고르도록 했다. 왼손은 삽 그림을, 오른손은 닭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까진 전혀 문제가 없다. 두 반구가 독립적으로 분별력있게 작동하고 있다.
왜 그걸 선택했냐고 묻자 그는 닭발과 닭이 잘어울린다고 대답했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더니 삽을 가리키는 것을 주목하고는 즉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해요"
이것은 작화증, 즉 이야기를 꾸며내는 증세다. 좌반구는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도 지시하지도 않았음에도 자신이 했다고 여기는 행동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것은 양반구가 제각각 별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 이유를 설명하거나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그 행동을 하도록 직접 결정하지 않았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책임이 있는 것인가?
UC데이비스의 생리학 교수 벤자민 리벳의 실험을 생각해보자 리벳은 타이머 앞에 실험참가자들을 앉힌 후 두피에 EEG(뇌전도) 전극을 붙였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버튼을 누르거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등 간단한 행동을 통해 '움직이고 싶은 욕구나 충동을 처음인지하는 순간'을 표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오차범위 50밀리세컨드 정도까지 측정하는 기계로 기록했다.
참가자들이 움직이고 싶은 욕구를 보고한 시간은 실제 행동을 취한 시간보다 평균 200밀리세컨드 정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EEG신호를 살핀 결과, 운동피질이 행동을 촉발하는 시간은 실제 행동을 취한 시간보다 평균 500밀리세컨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말은 결국, 행동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보다 3분의 1초 정도 먼저 운동피질이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했다는 것이다.
리벳 실험의 의미에 대해선 그동안 열띤 논쟁이 있었다. 리벳은 우리가 스스로 의사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생각은 망상일지도 모른다면서 '의식은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대니얼 데닛은, 미래는 현재상태로부터 미리 결정될 수 있지만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기대'라고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기대와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우리가 사실상 알 수 없는 이론상 결정된 미래가 아닌, 기대와 비교하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 데닛은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몇몇 사상가들은 자유의지란 개념 자체가 망상이라고 폄하한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은 자유의지를 '잘못된 인식이나 그럴듯해 보이는 경험'이라고 특정지을 수 있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 행동에서조차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믿으며, 매 순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천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으며,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으며, 어떠한 결심과 성찰에도 행동이 바뀌지 않으며,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저주하는 바로 그 인성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괴로워 한다."
나는 여기서 몇 가지 핵심적인 주장을 추가하고 싶다. 자유의지라는 개념과, 이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는 '책임감'이라는 개념은 자유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용하며 매우 중요하다. 의식이 '밈' 으로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노력이나 자유의지를 정의하려는 노력은 순환논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에도,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믿음에 동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신피질의 상위레벨 중 상당한 비율은 자유롭게 선택을 하고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개념에 기여한다. 엄밀한 철학적 측면에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이 가능하든 아니든, 그런 믿음을 포기한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불행해질 것이다.
더욱이 세상이 꼭 결정되어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 양자역학의 두 가지 관점에 대해 설명했다. 앞에서 양자역학의 두 가지 관점에 대해 설명했다. 이 두 관점은 관찰자와 양자장의 관계를 해석하는 견해가 다르다. 관찰자에 기반을 두 대중적 해석은 의식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제공한다. 입자들은 의식이 있는 관찰자가 관찰하지 않는 이상, 양자의 모호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양자사건에 대한 철학적 견해는 또다시 두 가지로 갈리는 데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와 관련이 있다. 바로 "양자사건은 결정된 것인가 아니면 임의적인 것인가?"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전혀 결정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의 확률파동 해석에 따르면, 현실의 가장 기본적 차원에서부터 지속적인 불확실성의 원천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자유의지는 근본적으로 우연에 의핸 결정이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자유의지는 목적의식이 있는 의사결정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울프람박사는 이러한 딜레마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포자동자'라는 개념과 함께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종합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세포자동자는 정보세포의 값이 가까이 있는 세포들의 함수로 계속해서 재연산되는 메커니즘이다.
울프람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가장 단순한 세포자동자인 1차원 선 안에 있는 세포집단을 묘사한다.
울프람 박사가 '규칙 222'라고 이름붙인 예를 보자.
이러한 간단한 세포자동자의 변환은 세포의 한열에 불과하다. 중간에 검은색 세포 하나로 시작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세포의 진화를 보여준다면 규직222의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측하기가 매우 쉽다. 1조 X 1조 번을 반복했을 때 가운데 세포값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검은색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은 규칙 110이 보여주는 클레스4 자동자다.
이 자동자가 여러 세대 반복되면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난수성에 대한 가장 엄격한 수학적 테스트를 통과했음에도 노이즈를 유발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패턴은 존재하지만 임의적이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반복될 뿐이다. 1조X1조 번을 반복했을 때 특정 세포의 값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세대 만큼 기계를 돌리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다. 이 것은 결정되어 있지만 실제로 기계를 돌려보지 않으면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울프람 박사의 핵심주장은 '세상은 거대한 클래스4 세포자동자'라는 것이다.
울프람이 보기에 자유의지는 이러한 한계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왓슨을 개발하는 작업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역시 왓슨이 어떤 모습이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프로그램이 너무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마스터할 수 없는 광범위한 지식에 기반하여 성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당연히 왓슨의 미래버전, 또는 왓슨과 비슷한 기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예컨대 이 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절대 나의 결정이 아니다. 그보다 이 책에 담긴 아이디어들이 나에게 책을 쓰도록 결정했다. 그 아이디어들이 나의 신피질에 침투하여 나를 통째로 접수해버린 것이다.
36년 전 결혼을 하기로 한 결정은 어떨까? 그 당시 나는 예쁜 여자에게 끌리도록 설정되어 있는 일반적인 프로그램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거기에 자유의지는 전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정체성
나는, 내 의식이 이 특별한 살마과 연관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살마이 나 자신이게끔 내가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먹는 것이다"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훨씬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나의 성격,능력,지식을 규정하는 신피질의 모든 계층적 구조는 나 자신의 생각과 경험의 결과다. 내가 상호작용하기로 선택한 사람들, 내가 수용하기로 선택한 생각과 프로젝트는 모두 나라는 사람이 되기 위한 1차적인 결정요인들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먹는 것도 신피질이 결정한 선택을 반영한다. 잠시 자유의지 이원론의 긍정적인 측면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나라는 사람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나 자신의 결정이다.
내가 어떻게 나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하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 실험을 해보자.
아침에 일어나니 당신과 똑같이 생긴 복제물이 눈앞에 앉아있다.
당신의 복제물을 당신2라고 부르자. 당신2는 마치 당신인 양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고 일어나니 훨씬 튼튼하고 새로운 2.0버전의 몸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외친다. "어, 새로운 몸이 참 마음에 드는군!"
여기서 먼저 생각해볼 문제는 이것이다. "당신2는 의식이 있는가?" 분명히 그래보인다, 감각이 있고 의식이 있는 사람이 보이는 미묘한 표현을 가지고 있다느 점에서 이야기한 테스트를 통과했다. 당신이 의식이 있다면 당신2도 마찬가지다.
이제 당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당신2가 당신이라고 주장하며 돌아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오래된 몸과 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낡은 몸과 마음은 필요없다.
당신은 아마도 이러한 해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2가 당신의 연속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이 '당신2'가 아닌 '당신'에게 있다고 느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2가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는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당신도 당신2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럴 경우 당신과 당신2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의 결론은? 당신2는 의식이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다. 당신의 정체성과 당신2의 정체성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 당신과 당신2는 거의 똑같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2가 만들어지는 순간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패턴과 당신2가 가지고 있는 패턴이 똑같을 뿐이다. 이 순간 이후, 당신과 당신2는 여전히 활동하고, 각자 다른 경험을 한다. 그래서 결론은 당신2는 당신이 아니다.
좋다 이제 다른 생각실험을 해보자.
당신의 뇌의 특정한 부위를 비생물학적 장치로 교체하는 술을 받는다고 해보자. 컴퓨터가 물리적으로 뇌 안에 자리하느냐 뇌 바깥에 자리하느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뇌 바깥에 컴퓨터를 심는다고 해도 효과적으로 뇌를 증각할 수 있으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2030년대가 되면 컴퓨터가 장착된 지능형 기기가 혈액 세포 크기로 작아질 것이다. 수술을 하지 않고도, 비침투 방식으로 몸속에 심을 수 있다.
다시 미래의 시나리오로 돌아가 보자. 수술을 마치고나서, 당신의 뇌는 제대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능력이 개선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인가? 친구들은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좋다. 이러한 결과에 힘입어 당신은 수술을 또 받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뇌의 다른 영역을 교체한다. 이 결과도 맟나가지로 좋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테세우스의 배
결론은 당신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딜레마도 없다. 모든 것이 평온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사실을 깨닫는다. 조금씩 뇌를 교체하는 작업을 모두 거친 후, 당신은 앞에서 본 당신2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뇌교체수술을 모두 거친 당신이 스캔-복제로 만들어낸 당신2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교체 수술 이후 당신은 원래 당신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하지만 이런 결론으 뇌교체 시나리오의 결론과 모순된다.
또 이런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살아가는동안 가만히 있어도 점진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우리몸의 거의 모든 세포는 끊임없이 교체된다.
뉴런은 평생 보존된다. 하지만 뉴런을 구성하는 세포기관과 구성분자는 한 달이 되기 전에 완전히 교체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강을 인식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사람들은 강을 바라보며 지속성과 안정성을 떠올린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어제 본 강과 오늘 본 강은 똑같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내 몸과 뇌를 구성하는 물질은 내가 아니다. 물의 입자들이 강을 통해 흘러가는 것처럼 이러한 입자들도 내 몸을 통해 흘러갈 뿐이다. 나는 천천히 변하지만 안정성과 지속성을 가진 하나의 패턴에 불과하다. 물론 이 패턴을 구성하는 물질들은 빠르게 변한다.
비생물학적 시스템으로 내 몸과 뇌를 하나씩 바꾸는 것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바뀌는 현상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 지적,사회적,개인적,기억을 다양한 기계와 클라우드에 아웃소싱하고 있다. 그 기기들은 계속 작아지고 있으며 작아질수록 몸속으로 들어갈 확률은 높아진다.
정체성은 '비생물학적 시스템만이 갖고 있는 능력'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를 떠날 것이다. 그 능력이란 바로 복사하고 백업하고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기기를 이용해 복사,백업,복구를 일상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비생물학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장점이지 한계가 아니다. 비생물학적 시스템이 생물학적 뇌의 능력을 확보할수록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
이 딜레마에 대한 나의 해법은 당신2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된 결론이라는 것이다. 당신2는 당신이다. 당신이 두개 생긴 것이다. 이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점진적인 교체와 증강 시나리오의 길을 갈 것이며 마침내 생각을 대부분 클라우드에 아웃소싱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정체성에 관한 믿음의 도약은, 정체성은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정보의 패턴의 지속성을 통해 보존된다는 것이다. 지속성은 지속적 변화를 허용할 것이고, 그래서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소 달리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문제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보패턴의 지속성은 생물학적 기질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기질은 우리를 지금 이곳까지 먼 길을 끌고 오는 놀라운 일을 했지만, 우리는 이제 매우 타당한 이유로 더 뛰어나고 튼튼한 기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