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 뇌의 '문제-해결능력'을 기계적 알고리즘으로 구현해낸 기술 덕분이다. 그렇다면 기술이 계속 발전한다면, 기계는 인간의 '마음'도 구현해낼 수 있다는 뜻일까? 어쨌든 문제-해결 능력과 마음은 모두 우리 뇌의 소행이기 때문이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역공학)
예컨대 선진국의 무기를 가지고 와서 분해하여 구조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흉내 내 비슷한 무기를 개발하는 것, 경쟁기업의 혁신적인 제품을 분해하여 거기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것, 비디오게임이나 웹사이트의 소스코드를 추출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비슷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모두 리버스엔지니어링이다.
진화는 기본적으로 추상성의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펼쳐진다. 원자는 점점 복잡한 분자를 형성해냈다.
그 결과 물리학은 화학을 낳았다.
10억 년이 지난 뒤 DNA라고 하는 복잡한 분자가 진화했다.
그 결과 화학은 생물학을 낳았다.
유기체는 점점 빠른 속도로, 커뮤니케이션과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신경계라고 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신경계를 구성하는 뉴런들이 한 곳에 집적되면서 뇌를 형성했고, 이로써 매우 지능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물학은 신경학을 낳았다. 이렇게 우리는 원자에서 분자로, DNA로, 뇌로 진화해 온 것이다.
포유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집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계층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다양한 요소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만들어내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배열을 기호로 재현할 수 있고, 그렇게 만든 기호를 훨씬 복잡한 배열 속에 하나의 요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신피질'이라고 하는 뇌구조가 수행한다.
인간의 신피질은 발전을 거듭한 결과, '생각' -다시 말해,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을 할 수 있는 '진화의 문턱'을 넘어섰다.
순환적으로 연결된 생각이 집적된 거대한 배열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쌓아온 지식 기반은 다시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지식은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뇌는 추상성의 또 다른 수준을 넘어섰다. 뇌의 지능은 우리 눈앞에서 조작할 수 있는 부속물 - 엄지손가락- 을 사용하여 환경을 조작함으로써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경학은 '기술'을 낳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도구는 진화가 새로운 방식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인간의 지식기반이 지금까지 무한하게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구(기술) 때문이다.
인간이 처음 발명해낸 도구는 '말'이다. 말이란 '구별되는 발화'로서 생각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뒤 이어 발명해낸 '글'은 '구별되는 기호'로 생각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글을 모아놓은 도서관은, 순환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생각의 지식기반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도서관은 우리 뇌의 능력을 크게 확장시켜준다.
나는 지금까지 기술에 관한 책을 세 권 썼다.
이 책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장은, 진화과정은 추상성의 수준이 더 높아지는 과정이며, 그 결과 진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진화의 산물이 지닌 복잡성과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수확가속법칙이라고 이름 붙였고, 이는 생물학적 진화는 물론 기술적 진화에도 모두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수확가속법칙은 가장 극적인 사례는 정보기술 제품의 가격대비 성능의 급속한 발전이다.
우리는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활용해 이미 인간 게놈의 형태로 생명의 객체코드를 밝혀냈다. 지난 20년 동안, 축적된 유전제데이터는 매년 거의 두 배씩 늘어났다. 이 역시 그 자체로서 수확가속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예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인지, 기억, 비판적 사고를 담당하는 뇌 영역인 신피질의 기본적인 알고리즘을 설명하는 패턴인식 마음이론(PRTM)을 제시할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반박하고자 하는 핵심은, 왓슨이나 시리와 같은 제품에 적용된 AI의 기술이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인 신피질이 작동하는 방식과 수학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통계적 분석과정을 거쳐 언어를 비롯한 여러 현상을 이해하는 것을 '진정한 이해'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 역시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뇌를 이해하고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하는 프로젝트의 최고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순환하는 계측적 생각이 발생하는 대뇌의 신피질을 리버스엔지니어링하는 것이다.
신피질의 작동원리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신피질은 모든 지식과 기술을 재현해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어쩄든 인간이 그 많은 소설, 노래, 그림, 과학적 발견을 비롯하여 온갖 생산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신피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모토는 아인수타인의 명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지적인 바보는 어떤 것이든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작고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1.생각의 역사
생각실험 또는 사고실험
한 꼬마는 빛이 파동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영국의 수학자 토머스 영의 실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실험의 결론은 빛의 파동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파동이 타고 나갈 수 있는 매질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바다의 파동(파도)은 물을 통해 전달되고, 소리의 파동(음파)은 공기나 다른 물질을 통해 이동한다. 그렇다면 빛의 파동(광파)은 무엇을 통해 이동할까? 그 미지의 매개체를 과학자들은 '에테르'라고 이름 붙였다.
빛의 이동속도(광속) 역시 언제나 일정하다면, 지구가 공전궤도 위에서 태양에 다가갈 때와 태양에서 멀어질 때 햇빛의 속도는 (지구가 공전하는 속도의 두 배까지) 차이가 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것을 입증하면 에테르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다.(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따라가는 것의 차이)
하지만 그들이 밝혀낸 사실은, 지구가 공전궤도에서 어느 지점에 있든 지구에 도달하는 햇빛의 속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에테르라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발견해낸 셈이었다. 그렇다면 빛은 도대체 어떻게 이동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20년 가까이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은 내가 아무리 빠르게 이동하더라도 빛은 언제나 똑같은 속도를 유지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빛은 내가 어떤 속도로 이동하든 언제나 100퍼센트의 속도로 나를 앞질러 나간다. 이것은 완벽한 모순처럼 보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꼬마는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젊은 아인슈타인이 찾아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속도=거리/시간'라는 누구나 아는 공식에서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느려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광속의 90퍼센트 속도로 이동하는 젊은이의 시계를 지구의 관찰자가 본다면, 그의 시계는 지구의 시간보다 10배 느리게 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지구의 시간에 비해 10분의 1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는 설명은, 어떤 위치에서 빛을 바라보든 빛이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현상을 모순되지 않게 설명한다.
더 나아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 이론적으로,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고 해도, 빛은 늘 '빛의 속도'로 앞서나가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상상했던 '광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 었다.
실제로 (마이컬슨 - 몰리 실험이 발표된 시점부터) 18년 동안, 젊은 아인슈타인의 눈에는 그토록 뚜렷하게 보이던 결론을 그 어떤 사상가도 상상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내내 이 문제를 고민했던 무수한 사람들이 이러한 원리와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기 보다는, 실재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하는 기존의 관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또 다른 생각실험은 자신과 동생이 우주공간을 함께 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30만 킬로미터 떨어져있다. 아인슈타인은 동생과 거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가속을 하고 싶을 때마다 매번 플래시로 동생에게 신호를 보낸다. 이 신호가 동생에게 도달하는 데 1초가 걸린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신호를 보내고 1초 후 가속한다. 동생은 신호를 받으면 즉각 가속한다.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확하게 동시에 이동한다.
자, 이제 이들이 지구의 관찰자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지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면, 알베르트가 동생에게 보내는 빛이 1초가 되기 전에 도착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멀어질수록 알베르트와 동생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알베르트의 동생의 시계가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그만큼 그녀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는 두 형제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한 점으로 충돌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30만 킬로미터를 유지하며 이동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해답은 이동하는 만큼 거리가 일정하게 수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머리부터 날아간다고 가정할 때) 더 빨라질수록 키는 계속 줄어든다. 이러한 결론은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보다 훨씬 기괴하고 당혹스러운 것이었고, 아마도 그나마 있던 초기 팬들마저 외면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아인슈타인은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고민했다.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1850년대 '광자'라고 하는 빛의 입자가 질량이 없음에도 운동량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맥스웰의 발견이 아인슈타인을 고민에 빠뜨린 것은, 운동량이 질량의 특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운동량은 질량에 속도를 곱한 것이다. 그렇다면 질량이 0인 입자는 어떻게 운동량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의 생각실험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우선 그는 우주에 떠다니는 상자 하나를 떠올렸다. 광자 하나가 상자의 내부 왼쪽 벽에서 방출되어 오른쪽 벽으로 이동한다. 이 상자 내부의 전체 운동량은 그대로 보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광자가 방출되었을 때 상자는 왼쪽으로 움찔 튀어 나와야 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광자가 상자의 오른쪽 벽과 충돌하는 순간 그 운동량은 상자에게 그대로 이전된다. 상자 내부의 운동량은 다시 그대로 보존되고 상자는 이제 움직임을 멈춘다.
하지만 상자 바깥에서 상자를 바라보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상자 바깥에서는 그 무엇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어떤 입자도 - 질량이 있든 없든 - 상자와 충돌하지 않았으며, 어떤 입자도 상자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위의 시나리오에 따라 상자가 일시적으로 왼쪽으로 움직였다가 멈추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눈에 보인다. 우리 분석에 따르면, 각각의 광자가 이동하는 동안 상자는 왼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외부에서 상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고 상자에서 어떤 것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질량중심은 같은 곳에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상자 내부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 광자는 질량중심을 바꾸지 못한다. 질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수학작업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를 같게 만들려면, 상수 하나만 개입시키면 된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하지만 한 가지 함정이 있었다. 이 상수 하나가 엄청나게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상수는 빛의 속도를 제곱한 수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E = mc^2이라는 공식이다.
이 공식에 따르면 질량 1온스(28그램)는 TNT 60만 톤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공식에 기초하여 원자폭탄의 잠재성을 알려주었고 이후 원자력의 시대를 예고했다.
내가 이 책의 첫 머리를 다윈과 아인슈타인의 생각실험으로 시작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들은 인간의 뇌가 지닌 매우 특별한 힘을 보여준다. 이 실험을 하는 데에는 막대인간을 그리고, 거기서 얻은 단순한 방정식을 적기위한 펜과 종이말고는 어떤 장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단순한 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2세기에 걸쳐 내려온 물리학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뒤엎어버렸고, 역사의 물줄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핵발전시대를 열었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이론 아래 놓여있는 수학은 궁극적으로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생각실험이 그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아인슈타인을 특별히 영특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아인슈타인의 영특함이 솟아난 곳, 다시 말해 뇌를 가지고 그가 한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거꾸로 이러한 생각의 역사는 또한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빛에 올라타는 상상을 했지만 기가 찰 만큼 단순한 이 행동을 그토록 수많은 관찰자와 사상가들 중 그 누구 한 명도 상상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동료들의 생각과 관점을 넘어서거나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다. 이것 말고도 인간의 뇌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신피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본 다음에 좀더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2.어저다 마주친 그녀. 우리 뇌가 작동하는 방식
'생각'이라는 신피질의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복잡하고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뇌의 작동 메커니즘을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생각 실험을 통해 하나하나 추론해보자.
우리 뇌의 작동방식을 인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실험을 해보자.
"알파벳을 거꾸로 암송해보라"
주민등록번호, 떴다 떴다 비행기 등을 거꾸로 부를 수 있는가? 컴퓨터는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이것은 인간의 기억이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정보를 글로 써놓은 다음 그것을 거꾸로 읽는다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도구-문자-를 활용하여 생각의 한계를 보완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도구를 발명한 이유다. 도구는 우리 뇌의 단점을 보완해준다.
여기서 발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 기억은 순차적이며 그 순서는 정해져있다. 입력된 순서대로만 출력할 수 있다. 우리는 기억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지 못한다.
또한 중간부터 기억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꼭 어제가 아니래도 상관없다. 오늘 갔다 온 산책을 떠올려도 좋다. 또는 운전으로 바꿔도 좋다. 어쨌든 일정한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행위를 떠올려 보라.
대부분 그러한 경험에서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산책길에서 다섯 번째로 마주친 사람은(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였는가? 은행나무를 보았는가? 우편함을 보았는가?
산책을 규칙적으로 한다면 지난달 첫 산책을 떠올려보라(또는 지난달 첫 출근길을 떠올려보라). 아마도 구체적인 기억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의식은 기억과 다르지 않다. 마취하면 의식을 잃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산책하면서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산책하는 동안 의식이 없었다는 말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연하게 마주친 사람을 제대로 그리거나 묘사하지 못한다.
여기서 발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뇌에는 이미지,비디오,소리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장치가 없다. 우리 기억은 패턴의 나열로 저장된다. 자주 접근하지 않는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인지능력이 가장 두드러진 장점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뇌는 패턴을 인지한다. 정보의 일부분만 인지하더라도(보더라도, 듣더라도, 느끼더라도) 또는 정보가 일부분 변형되더라도, 우리 인지능력은 패턴의 변하지 않는 특징을 명확하게 감지해낸다.
우리의 의식적인 인지경험은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다.
"우리는 ___________ 싶은 것을 본다."
지금까지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문장을 쉽게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빈칸을 남겨두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마도 지나치듯 스쳐가며 자신이 기대했던 내용을 확인하고는 바로 넘어갔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고 앞으로 무엇을 경험할지 가정한다. 이러한 기대는 우리가 실제로 인지하는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기억과 관련하여 누구나 자주 경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1년 전에 경험한 일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다."
어쨌든, 잠재해있던 기억을 촉발한 자극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기억을 촉발한 자극은 대개 빠르게 잊혀지고, 따라서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보인다.
"셔츠를 입는 것처럼 틀에 박힌 반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동안, 우리 행동은 어느 정도까지 같은 단계를 반복하는가?"
이 셔츠를 입을 때에도 다른 셔츠를 입을 때와 똑같은 순서로 행동을 하고 마지막에 새로운 임무 하나만 덧붙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단계의 리스트는 우리 마음속에 계층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처럼 행동을 계속 세분화하는 작업은 사실, 매우 미세한 운동까지 계속해서 분할할 수 있다. 결국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는 행동은 문자 그대로, 수천 가지 작은 행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할 수 있다. 1시간 전에 했던 산책에서 본 사소한 것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거치는 이 무수한 단계의 행동리스트를 기억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게다가 이런 행동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뇌는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수천 단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긴 리스트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층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계층을 활용한 패턴인식은 행동뿐만이 아니라 인지에도 적용된다.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때도 계층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패턴을 무한하게 재활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눈,코,입 같은 개념을 다시 배울 필요가 없다.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할 때 우리는 길게 나열된 리스트가 아니라, 정교하게 포개어진 계층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