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는 선진국에서도 자본 통제가 일반적이었다. 그 후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고 신흥국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자본 통제가 완화된 데는 국제통화기금의 촉구뿐 아니라 변동환율제의 시행이 작용했다. 변동환율제가 시행되면 은행에서 자금이 이탈하더라도 현지 경제가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대개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시장 폐쇄, 은행 폐쇄, 사유재산 몰수는 지극히 미국적인 관행이다.

1914년 세계 각국의 자본시장은 현재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개전과 더불어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의 투자자들은 모두 런던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그리고 매각대금을 금으로 바꿔 가능한 신속하게 자국으로 운송해달라고 요구했다.

세계적인 유동성위기는 정치적 위기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다.

런던의 금융가 '시티'는 당시 견줄 만한 곳이 없는 세계 금융 중심지였다. 유럽대륙에서 매도 주문이 쇄도하자 런던의 은행들은 매각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산을 매각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예금 인출 사태보다 훨씬 복잡한 유동성위기가 발생했다. 파운드화로 표시되고 런던의 은행이 지급을 보증한 상업어음이 롤오버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기존 어음의 만기 후에 새로운 어음이 발행되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동성이 풍부하던 자금시장의 유동성이 말라붙은 것이다.

유동성위기는 뉴욕으로 번졌다. 프랑스의 은행들이 금 확보를 위해 런던의 주식을 매각했듯, 런던의 투자자들도 똑같은 이유로 뉴욕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세계적으로 정금(금본위제에서 화폐로 통용되는 금화) 확보 경쟁이 일어났다.

영국을 제외한 주요 참전국은 통화와 금의 태환을 공식적으로 정지했다.

실버는 증권거래소가 문 닫고 미 재무부가 관여한 진짜 이유가 주가가 아닌 금에 있다고 보았다. 유럽의 주식 매도인들은 증권거래소 건너편인 월가의 미 재무부 분국 건물에서 매각대금을 금으로 바꿀 권한이 있었다. 미국 은행들이 비축해둔 금이 순식간에 고갈될 수 있었고, 이를 우려한 재무부가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해 주식 거래를 중지했다는 해석이다. 아이스나인 대책의 시초였던 셈이다.

대공황 기간과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년 동안 20세기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동결정책이 시행됐다. 미국의 대공황은 1929년 10월 주식시장 폭락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전 세계적 공황은 이미 그전에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은 1920년대 후반 내내 경기침체에 시달렸다. 독일은 1927년 경기침체에 돌입했다. 미국에서는 1929년을 기점으로 주가와 산업생산량이 급감했을 뿐 아니라 실업률도 치솟았다. 전 세계 은행위기가 일어나는 등 대공황이 가장 맹위를 떨쳤던 기간은 1931년에서 1933년이다.

유럽의 은행위기는 1931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인 로스차일드의 크레디트쉬탈트 파산에서 시작됐다.

1914년에는 금의 태환이 명목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반면에 1931년에는 영국 재무성이 금본위재를 중단하고 파운드를 평가절하했다. 그 덕에 영국의 재정 상황은 나아졌지만, 그 때문에 미국 달러가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통화가 되면서 미국이 압박을 받게 됐다. 미국은 전 세계적 디플레이션의 중심에 놓였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말 그대로 돈이 동났다. 지역사회는 물물교환에 의존하거나 '나무로 만든 5센트'로 식료품을 샀다. 대공황 동안 미국에서 9000개가 넘는 은행이 파산했다. 은행 청산이 마무리되자 수많은 예금주가 저축을 잃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루스벨트는 후버의 요청을 거절했고 취임일인 1933년 3월 4일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공황이 극에 달했다. 미국 전역의 예금주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 앞에 진을 쳤다. 이들은 커피통이나 침대 메트리스 밑에 현금을 보관했다.

루스벨트는 단호히 행동했다. 취임한 지 채 36시간도 지나지 않은 1933년 3월 6일 월요일 오전 1시에 모든 은행의 영업 중단을 지시하는 '포고령 2039호'를 발표했다. 그는 은행 영업이 언제부터 재개될 것이라는 기약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는 은행 규제기관이 폐쇄된 은행의 재무제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지급 능력이 있는 은행에 영업 재개를 허용했다.

이 절차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티머시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이 시행한 '스트레스테스트' 와 비슷했다. 스트레스 테스트의 목적은 은행의 실제 건전성을 진단하기보다 정부의 '승인 인장'을 찍어줌으로써 저축 예금주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데 있었다.

뒤이어 그해 4월 5일 '행정명령 6102호'가 발동됐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미국인은 재무부에 금을 헌납해야 하며 이를 어긴 사람을 투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루스벨트는 금 수출도 금지했다. 이런 금 보유 제한 조치는 1974년 12월 31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행정명령 11825호'를 내려 금 보유를 허용할 때까지 계속됐다.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은 1933년이 지나면서 안정을 되찾는가 싶더니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더불어 다시 한 번 붕괴했다. 영국을 비롯한 참전국은 그때도 통화의 금 태환을 중지했고 금 수출을 금지했다. 당시에는 금이 화폐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런 조치는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의 동결로 이어졌다.

그러다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조성되면서 금융 시스템이 해빙되기 시작했다. 1944년 7월 브레턴우즈회의가 분수령이 됐다.

주기적인 공황과 동결에 대한 대안으로서 일관되고 세심하게 통제되며 철저하게 법규를 기반으로 한 체제가 제시됐다. 이것이 바로 1944년부터 1971년까지 시행된 브레턴우즈체제다. 27년간 이어진 황금기 동안 브레턴우즈협정에 서명한 나라들은 자국 통화를 특정 환율로 미국 달러에 고정하는 페그제를 시행했다. 미국 달러의 환율은 금 1온스에 35달러로 고정됐다. 이처럼 달러 환율이 금에 고정됨에 따라 영국의 파운드, 프랑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일본의 엔 등의 환율도 달러를 통해 금의 가치와 타국의 통화에 고정됐다.

세계 각국의 자국 통제와 고정환율제는 국제 통화기금과 미국의 관리를 받았을 뿐 아니라 금융 억압제도로 뒷받침됐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GDP 대 채무 비율은 120퍼센트였다. 향후 20년 동안 연준과 미 재무부는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고 적당한 인플레이션을 유도할 목적으로 통화체제를 설계했다. 그 결과 금리도, 인플레이션도 도를 넘는 수준으로 치솟지 않았다. 금융 억업을 통해 인플레이션율이 금리보다 약간 높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일반인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 미국인은 전후의 번영,주가상승,새로운 편의 시설, 사교문화를 한껏 누렸다.

금융 억압은 이 기법을 적용하면 기존 채무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감소하는 반면에 신규 채무는 저금리 때문에 억제된다. 인플레이션율과 금리의 차이가 1퍼센트에 불과해도 20년 동안 채무의 실질가치는 30퍼센트나 줄어든다. 미국의 GDP 대 채무 비율은 1965년에 이르기까지 40퍼센트로 하락했다. 1945년의 120퍼센트와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는 금융위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평탄한 시기로 간주된다.

미국은 전 세계 금과 달러 보유고의 절반이 넘는 양을 손에 넣었다. 주지했다시피 금과 달러만이 진정한 통화로 인정받던 시대였다.

브레턴우즈체제는 1965년 들어 심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영국의 파운드 평가절하, 미국의 금 유출로 타격을 받은 것이다. 다른 나라에 구조조정을 요구했던 미국은 정작 자국의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

닉슨 대통령이 1971년 8월 15일 선언한 금 태환 정지 조치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이스나인 사례로 꼽힌다.

닉슨이 전 세계를 향해 '장 폐쇄' 팻말을 내건 셈이다.

1971년에서 1980년 사이는 일반적인 의미뿐 아니라 과학적인 의미로도 국제 금융에 혼란이 일어난 시기였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통화주의자들은 금본위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전 세계에 촉구했고, 변동환율이 새로운 표준이 됐다. 변동환율제를 채택하면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생산성을 개선할 필요 없이 통화만 평가절하해도 좀 더 낮은 가격에 제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인스주의자도 변동환율제를 지지했다. 평가절하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실질적인 노동비용이 낮아져 근로자의 임금이 더 이상 깎이지 않으리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때문에 근로자의 실질임금도 줄어들었다. 다만 근로자들은 정부의 의도대로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통화주의자와 케인스주의자가 하나로 뭉친 것이다.

더 이상 아이스나인 해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저축 예금주가 예금을 인출하려 한다면 은행을 폐쇄할 필요 없이 돈을 찍어내 지급하면 그만이었다. 아이스나인 상황이 뒤집혔다. 변동환율제의 도입으로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범람했다.

그러나 통화 완화로도 금융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1982년 중남미 채무위기, 1994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8년 아시아-러시아 금융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 위기가 잇따랐다. 그뿐 아니라 1987년 10월 19일 다우지수가 하루만에 22퍼센트나 폭락하고, 2000년 닷커 거품이 꺼졌으며, 2001년 9.11 테러 직후 금융시장이 붕괴되는 등 시장의 공황도 잇따랐다.

새로운 점이라면 위기가 일어나도 금융권 전반의 채무불이행이나 폐쇄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LTCM은 헤지펀드는 월가가 구제를 했지만 월가는 누가 구제할 것인가? 연준이 다시 개입했다. 그린스펀은 1998년 10월 15일 이례적으로 예고 없이 금리인하를 발표했다.. 연준이 지난 20년 동안 FOMC 정례회의를 거치지 않고 금리인하를 발표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장은 연준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다우지수는 4.2퍼센트 급등했다. 이는 역사상 세 번째로 큰 1일 오름폭이었다. 채권시장도 정상화됐다. 마침내 LTCM의 출혈이 멎었다. 연준의 돌발적 금리인하는 2012년 6월 유럽중앙은행의 드라기 총재가 "무슨 수단이든 취하겠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미봉책으로 위기 재발을 덮는 관행은 미국 규제기관이 모든 은행 예금과 MMF의 지급을 보증했던 2008년 가을에 극에 달했다.

2016년까지는 전 세계를 유동성으로 범람시킨 정책이 널리 극찬을 받았다.

슈퍼 파워엘리트의 목표는 무엇일까? 수세기 전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이, 20세기에 록펠러, 루스벨트,부시 같은 가문이 추구했던 목표 그대로다.

전 세계에 통용되는 화폐제도, 조세제도,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세계화폐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며 역사를 통틀어 사용되어왔다. 금이 바로 세계화폐다. 엘리트의 목표는 금을 끌어모아 특별인출권 대신에 세계 교역과 금융 통화로 사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은행을 뜻하는 'bank'는 벤치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banco'에서 유래했다. 14세기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은행가들이 광자으이 벤치에 앉아 영업을 했던 데서 비롯됐다. 당시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금을 예치하는 고객에게 요구하는 즉시 금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지폐를 내어주었다. 지폐는 실물 금보다 훨씬 편리한 교환수단이었다.

당시 은행의 지폐는 무담보부채보다 금을 맡기고 받는 보관증에 가까웠다.

르네상스시대 은행가들은 고객이 예치한 금을 다른 군주에게 대출해주는 등 다른 용도로 지폐를 활용했다. 그 결과 보관된 실물 금의 가치를 초과하는 지폐가 발행됐다.

이런 식으로 부분지급준비금제도가 자리 잡았다.

스페인달러는 세계 교역에 두루 통용됐다. 중국도 19세기까지 자국 상품에 대한 대금으로 은만 받아들였다. 중국인들은 대금으로 받은 스페인 은화에 자국의 관인을 찍어 국내에 유통시켰다. 금이 최초의 세계화폐였다면 은은 최초의 유통화폐였다.

카롤루스 대제가 9세기 프랑크 왕국의 화폐 공급을 늘리기 위해 금화를 폐지하고 은화를 주조하도록 한 것은 양적완화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1933년 금 소유를 범죄로 규정한 이후 은화가 자유로이 유통됐다. 미국은 1964년까지 순도 90퍼센트의 은화를 주조했다. 품질 저하가 시작된 때는 1965년이다. 10센트,25센트.50센트 등 어떤 종류이냐에 따라 은화의 비율이 90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떨어졌고,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은 함유량이 제로운 주화가 주조되기 시작했다. 그 후 미국에서 유통되는 주화는 구리와 니켈만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금이 화폐의 자격을 잃게 된 과정은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흥미롭다. 닉슨과 국제통화기금의 조치는 이미 다져진 금의 무덤에 삽을 얹은 것에 불과했다. 고전적인 금본위제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던지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7월 28일 이미 종말을 맞이했다.

교전국들은 금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즉시 지폐를 금으로 태환하는 것을 중단했다. 전쟁 기간 동안 교전국들은 태환이 불가능한 지폐를 찍어냈다. 이런 지폐는 국민에게서 강제로 차입한 돈에 가까웠다. 승리를 거둔 후 금 태환을 재개하겠다는 심산이었는데, 패배할 경우 문제의 소지가 컸다. 치열한 금 쟁탈전이 일어났다. 각국 정부는 국민에게 소유한 금을 내놓고 그 대가로 전쟁 채권을 받으라고 설득했다. 이런 정책은 별다른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고 널리 호응을 얻었다. 전쟁은 생존이 달린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1914년 7월 당시 런던은 이론의 여지없는 세계의 금융 수도였다. 런던 내국환어음은 영국 최대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는 파운드 표시 금융상품이었으며 자금시장의 중심축이었다. 파운드 환어음은 세계 교역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금융 공황이 닥쳤고 각국은 외채의 지급유예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