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경. 여성의 이 '갑작스러운 변화'와 남성의 생식 능력의 '점차적인 감퇴'의 차이점을 고려하면 폐경에 유전적으로 어떤 '의도된 것'이 있지 않을까, 즉 폐경이 '적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손자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널리 퍼지게 된다. 자기 아이를 계속 낳는 여성은 손자에게 충분한 투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년기에 이른 여성이 번식 능력을 상실하도록 작용하는 유전자가 점점 증가했을 것이다.

"자식은 속이는 행위를 할 것이다."라는 표현의 진의는 자식에게 사기 행위를 하게 하는 경향을 가진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논의에서 인간의 윤리에 대한 교훈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생물학적 본성에 이타주의가 심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개체가 '바라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이성과 교미하고 자식 양육은 상대에게 전적으로 떠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수컷은 쓸데없는 작자들 같다. 또 단순히 '종의 이익'만 따지면 수컷은 암컷보다 수가 적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수컷 하나는 암컷 1백 마리 정도의 하렘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정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동물 집단에서 암컷 수는 수컷의 1백 배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종에서 수컷은 암컷보다 '사라져도 상관없는 존재'이고 암컷은 수컷보다 '소중한'존재다. 종 전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위의 견해는 조금도 틀림없는 타당한 것이다.

여기서 더 극단적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바다코끼리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관찰된 모든 교미 가운데 88퍼센트가 겨우 4퍼센트의 수컷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많은 경우에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아마 평생 교미 한 번 해보지 못할 독신 수컷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들 독신 수컷도 다른 점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먹이 자원을 먹어 치울 때의 왕성함은 다른 놈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종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끔찍한 낭비가 아닐 수 없으므로, 독신 수컷들은 사회의 기생자와 같이 취급될 것이다. 이것은 집단 선택론을 궁지에 몰아넣는 예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론에 따르면, 비록 수컷 중에서 실제로 번식에 참여하는 수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더라도 암수의 수가 같은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무난히 설명할 수 있다.

암수를 각각 얼마나 많이 낳느냐 하는 것은 부모의 전략에서 중요한 문제다

피셔에 의하면 정상 조건에서의 최적 성비는 50대 50이 된다고 한다.

포유류의 경우 성은 유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정된다. 모든 난자는 암수 어느 쪽으로도 발달할 수 있다. 성 결정 염색체는 정자에 있다. 수컷이 만드는 정자의 반은 딸을 만드는 X정자이고 나머지 반은 아들을 만드는 Y정자다.

앞에서 언급한 바다코끼리에서 거의 딸만을 낳도록 하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개체군 내에 수컷이 모자라지 않으므로 암컷들은 무난히 짝을 지을 수 있을 것이며 딸을 만드는 유전자가 증가할 것이다. 이에 따라 개체군의 성비는 암컷이 많아지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종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별문제 없다. 그러므로 단순히 생각해 보면, 딸을 만드는 유전자는 계속 증가해 결국 성비가 매우 치우쳐 몇 안 남은 수컷이 녹초가 되면서 겨우 버틸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할 법도 하다.

그러나 아들을 가진 소수의 부모가 얼마나 엄청난 유전적 이익을 누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아들에게 투자하는 개체는 수백 마리에 달하는 바다코끼리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짝이 암컷을 착취하는 정도를 줄이기 위해 암컷이 선수 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암컷에게는 강력한 수단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교미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교미가 끝나면 흥정은 끝난다.

암컷이 교미를 허락하기 전에 수컷에게 자신에 많은 투자를 하도록 하여 교미 후에 수컷이 처자를 버린다 해도 결국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다른 논문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트리버스의 추론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다. 그는 과거의 투자 그 자체가 장래의 투자를 약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경제학적 논의는 틀렸다.

수컷에게 많은 투자를 강요하는 암컷이 만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로 수컷이 자기를 버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위의 전략이 가정의 행복을 우서능로 하는 수컷을 고르는 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제가 필요하다. 즉, 암컷 대부분이 같은 전략을 구사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메이너드 스미스의 연구에서처럼 여기서도 '전략'이란 말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여기서 암컷의 두 전략은 조신형과 경솔형으로, 수컷의 두 전략은 성실형과 바람둥이형이라 부르기로 하자.

계산을 해보면 암컷의 5/6가 조신형, 수컷의 5/8가 성실형으로 된 개체군이 진화적으로 안정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메이너드 스미스의 분석에서 살펴본 예와 같이 반드시 두 가지 형의 암컷과 두 가지 형의 수컷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개개의 수컷이 5/8시간을 성실형, 나머지 시간을 바람둥이형으로 지내고, 한편 개개의 암컷도 5/6시간을 조신형, 나머지 1/6시간을 경솔형으로 지낸다면 ESS는 똑같이 달성될 수 있다.

우리는 조신형 암컷과 성실형 수컷이 대부분인 개체군이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암컷이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구애 시 수컷으로부터 먹이를 받는 것이다. 새의 경우 이 행동은 암컷이 일종의 퇴보를 일으켜 새끼 때의 행동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암컷은 새끼와 비슷한 제스처를 취해 수컷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암컷이 사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요한 전략, 즉 남성다운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을 이야기 해보자. 이 방책을 이용하는 종에서는 암컷이 자기 자식의 아비에게 원조받는 것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고 그 대신에 좋은 유전자를 얻는 데에 전력을 쏟는다.

암컷이 찾는 목표 중 하나는 생존 능력의 증거다. 암컷이라면 나이가 많은 수컷을 상대로 택하는 것이 꽤 좋은 방책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령 자식들이 오래 살았다고 해도 손자를 많이 낳지 않는다면 어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수명 그 자체가 왕성한 생식력의 증명이 될 수는 없다.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는 개체는 특히 위험하다.

이제 현명한 개체라면 분명히 자기의 위험 지대를 최소한으로 좁히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리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만일 자기가 가장자리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는 즉시 중심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개개의 개체는 이기적 충동에 이끌려 다른 개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기의 위험 지대를 좁히려 할 것이다. 그 결과 무리가 형성되고 점점 밀집화 될 것이다.

인간의 특이성은 대개 '문화'라고 하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언어는 유전자가 아닌 수단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게다가 그 속도는 유전적 진화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당신이 내 뇌에 기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재한다.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다. 뇌에서는 아마도 저장 용량보다 시간이 중요한 제한 요인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를 받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어떤 사람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졍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에서도 경쟁하고 있다.

밈 복합체의 예 - 종교, 맹신, 독신주의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를 보강하지만 때로는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신주의 같은 것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유전자와 밈 두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이 것은 어떤 종류의 게임에서만 실수다. 게임 이론가는 게임을 '영합 게임(Zero sum game)'과 '비영합 게임(nonezero sum game)'으로 나눈다. 영합 게임에서는 한쪽 선수의 승리가 다른 쪽 선수의 패배가 된다.

'죄수의 딜레마'는 비영합 게임이다. 돈을 지불하는 물주가 있고, 따라서 두 선수는 어깨동무를 하고 끝까지 물주를 뜯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에서 비영합 게임을 영합 게임처럼 하고 있다. 비영합 게임과 영합 게임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많은 불안을 줄일 수 있다. - 메모

우리가 민사 '분쟁'이라고 하는 것에는 실제로 크나큰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영합 대립으로 보이는 것에 약간의 선의를 보태면 쌍방에 이익을 주는 비영합 게임으로 바꿀 수 있다.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좋은 결혼은 분명히 상호 협력이 가득한 비영합 게임이다. 그러나 그 결혼이 실패할 때라도 두 사람이 협력을 계속하여 이혼까지도 비영합 게임으로 만듦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마치 아이들의 행복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변호사에게 비용을 지불해 버리면 가족의 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양식과 교양이 있는 부부는 둘이 같이 한 사람의 변호사에게 상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축구처럼 관중을 동원하는 스포츠가 보통 영합 게임인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관중에게는 선수들이 화기애애하고 서로 짜고 경기하는 것보다는 서로가 힘껏 싸우는 것을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인간과 동식물의 생활은 관중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실생활의 많은 측면은 비영합 게임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종종 '물주'역할을 하고 개개인은 서로의 성공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경쟁자를 누를 필요는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우리는 서로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서조차 협력과 상호 부조가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액설로드의 말대로 어째서 '마음씩 좋은 놈이 일등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게임이 되풀이 되지 않는다면 여태껏 우리가 살펴봤던 어떤 것도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선수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이 최종회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엑설로드의 명언처럼 '미래의 그림자'는 길어야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 길어야만 하는가? 중요한 것은 어느 경기자도 게임이 언제 끝나는지 몰라야 된다는 것이다.

게임을 오래도록, 영속되다시피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투자에서 경쟁없이 비영합 게임을 지속할 수 있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지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즉 선재 조건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