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은 로봇 기계이다. 이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이 것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 뿐만 아니라 세대 간 그리고 암수 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물의 이기적 행동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만은 다르지 않을까? 도킨스는 인간의 특유한 문화 속에 모방의 단위가 될 수 있는 문화적 전달자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 단위 개념을 밈meme이라고 정의하였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라는 의미로서의 단위이고, 개체는 '운반자'라는 의미로서의 단위다.

이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들 사이의 협동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한다.

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배경' 유전자들은 자신이 수많은 세대를 거쳐 이어 온 시간 여행에서 몸체를 공유하는 길동무다. 그러므로 자연 선택은 서로 같이 존재할 때 상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협력하는 유전자의 무리들을 반드시 선호한다.

침팬지와 인간, 도마뱀과 곰팡이, 우리 모두는 대략 30억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자연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진화해 왔다. 각각의 종안에서도 어떤 개체들은 다른 개체보다 생존하는 자손을 더 많이 남겨 그들이 갖고 있는 번식에 성공적인 유전 형질(유전자)들이 다음 세대에 더욱 많아지게 된다. 이것이 자연 선택이다.

자연 선택은 무작위적이 아닌 차등적인 유전자의 번식을 말한다. 자연 선택의 결과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되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도 자연 선택이다.

이 책들의 문제점은 그 저자들이 전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는 데 있다. 이들이 틀린 이유는 진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개체(또는 유전자)의 이익이 아닌 종(또는 집단)의 이익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것이다. 성공한 시카고의 갱단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전자는 치열한 세상에서 때로는 수백만 년 동안이나 생존해 왔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에 어떤 성질이 있을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부터 논의 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는 보통 개체 행동에서도 이기성이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개체 수준에 한정된 이타주의를 보임으로서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하는 특별한 유전자들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그 반대라고 믿고 싶어도, 보편적 사랑이나 종 전체의 번영과 같은 것은 진화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 행동을 하도록 지시할지 모르나, 우리가 전 생애 동안 반드시 그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전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 이타주의를 학습하는 것이 더 어려울 뿐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학습되고 전승되어 온 문화에 지배된다.

자연 선택의 과정을 보면 자연 선택을 거쳐 진화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겉보기에 이타적 행위는, 표면적으로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조금이나마) 높이고, 동시에 수혜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보기에 이타적인 행위는 실제로는 이기주의가 둔갑한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기저에 깔린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에 미치는 실제 영향이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라는 뜻이다.

더 일반적인 경우에 이기적인 행동이란 단순한 먹이나 영역, 또는 교미 상대와 같은 가치 있는 자원을 공유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동물이 일반적으로 종의 영속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동료에 대한 이타주의는 그 결과로 얻어지는 듯하다. 진화는 자연 선택을 거쳐 진행되고 자연 선택은 '최적자'의 차등적 생존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최적자'란 최적인 개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종족을 의미하는 것일까,

집단선택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개체들로부터 구성된 종 내지는 종내 개체군과 같은 집단은, 각 개체가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다른 경쟁자 집단보다 절멸의 위험이 적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집단선택설이다.

이와 반대가 개체 선택설 혹은 유전자 선택설

DNA분자도 때로는 오류를 일으킨다. 그리고 결국 진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오류다.

원시 수프는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고 그것이 확대되면서 몇가지 변종 복제자의 개체군들로 채워졌다. 어떤 변종은 다른 변종보다 그 수가 많았을까? 수명이 긴 자기 복제자는 점점 더 그 수가 많아졌을 것이고, 다른 조건이 같다고 했을 때 분자의 개체군에는 수명이 길어지는 '진화적 경향'이 나타낫을 것이다.

그리고 A형 분자가 장수한다고 할지라도 B형 분자가 더 많은 사본을 만든다면 수적으로 많이 뒤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수프 속의 분자들이 더 높은 '다산성'을 갖는 '진화적인 경향'이 존재했을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복사의 정확성이다.

우리 자신이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화를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진화를 '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 질 문에 대한 답이다. 진화란 자기 복제자(그리고 오늘날의 유전자)가 아무리 막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생존 기계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마늘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식물,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를 포함한다.

현대의 자기 복제자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대단히 강하다. 하나의 생존 기계는 하나가 아닌 수십만이나 되는 유전자를 가진 운반자다. 몸을 제조한다는 것은 유전자 각각의 기여도를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협력 사업이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세포의 46개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23개(1a,2a,3a....)와 어머니에게서 유래한 23개(1b,2b,3b...)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개체는 안정적이지 않다.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다. 염색체 또한 트럼프의 패처럼 섞이고 사라진다. 그러나 섞인 카드 자체는 살아남는다. 바로 이 카드가 유전자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고 단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을 계속할 따름이다. 물론 유전자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 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어떤 유전자는 1백만 년을 '살 수 있'지만 많은 새로운 유전자는 최초의 한 세대조차 넘기지 못한다. 소수의 유전자가 그 고비를 넘기는 것은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 유전자가 중요한 무언가, 즉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과 특히 관련된 특성은 바로 유전자 수준에서 이타주의는 나쁘고 이기주의는 좋다는 것이다.

좋은 유전자 사본들은 때로는 나쁜 유전자와 한 몸에 들어 있기 때문에 나쁜 유전자의 영향에 휩슬려 사라지기도 하고, 또 머물고 있는 몸이 벼락을 맞는 등 불운한 일에 휩쓸려서 죽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상 행운이나 불운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사라지는 쪽에 있는 유전자는 불운한 것이 아니라 나쁜 유전자다.

'좋은 유전자'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성'이 그 특성 중 하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성공한 유전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일반적인 특성은, 자기 생존 기계의 죽음을 적어도 번식한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측 불허인 환경에서 예측을 하기 위해 유전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학습 능력을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프로그램은 생존 기계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 보상이라고 불리 만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가지 고통, 구역질, 공복, 울고 있는 아이 등 불쾌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한 뒤에 불쾌한 것 중의 하나가 발생하면 다시는 그것을 하지마라. 그러나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생기면 그 것은 반복하라."

현재 우리의 목적에서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뇌는 생존 기계의 일상생활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도 있다. 또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다. 가급적 많은 아이를 낳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인간은 이 점에서 대단히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진화는 실제로 유전자 풀 내 유전자들의 차등적 생존을 통해 단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행동 패턴 -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 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다른 행동을 '담당하는' 경쟁적 유전자, 즉 대립유전자보다 유전자 풀 속에서 더 잘 생존해야 한다.

동물들의 의사소통 신호는 본래 서로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진화되었고 그런 뒤 나쁜 동물들이 이 신호를 악용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믿음이다. 모든 동물의 의사소통에는 처음부터 사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실제로 로렌츠는 저서 <공격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싸움, 즉 '공격'은 억제된, 신사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동물의 싸움이 복싱이나 펜싱처럼 규칙에 따라 싸우는 형식을 갖춘 시합이라는 점이다. 동물들은 글러브 낀 주먹과 끝이 뭉뚝한 연습용 칼로 싸운다. 위협과 겁주기가 목숨을 건 결투를 대신한다. 승자는 패자의 항복의 몸짓을 인정하지만, 우리가 순진하게 예측하는 대로 때려죽이거나 물어 죽이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파가 비둘기파와 싸워 이기는 경향이 있다든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언제나 매파가 이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매파령 전략과 비둘기파형 전략 중 어느 것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SS)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한쪽이 ESS이고 다른 쪽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ESS인 쪽이 진화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ESS는 안정한 것이다. ESS 참여하는 개체에게 딱히 유리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대칭적 싸움

영역 방어 - 거주자면 공격하고, 침입자면 물러나라

체구의 차이 - 상대가 더 크면 도망가라, 상대가 작으면 공격하라.

순위제 - 최근에 많은 싸움에서 승리한 귀뚜라미는 매파처럼 행동하고 반면 계속 지기만 한 귀뚜라미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각각의 귀뚜라미는 자기의 개체군 내 개체들의 평균적 전투 능력과 비교해 자기의 전투 능력을 끊임없이 재평가하는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진화를 '종의 이익'관점에서 보는 견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사자는 왜 다른 사자를 사냥하지 않는가?"와 같은 아주 타당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누구도 던지지 않는 좋은 질문 중에는 "영양은 왜 반격하지 않고 사자로부터 도망치는가?"라는 것도 있다.

사자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겐 ESS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타적 자살 유전자가 성공하기 위해 최소의 조건은 그 유전자가 형제(또는 자식이나 부모)2명 이상, 배다른 형제(또는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조카, 조카딸,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4명 이상, 또는 사촌 8명 이상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동물들은 어떤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자연학자들은 그 지역을 가리켜 영역 또는 세력권이라고 한다.

윈-에드워즈는 영역을 놓고 다투는 동물들이 한 조각의 먹이와 같은 실질적인 목표물이 아니라 특권을 보증하는 표식, 즉 토큰을 놓고 싸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성실하게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종의 경우에도 암컷이 수컷 그 자체에 결합되기보다는 오히려 수컷이 소유하는 영역과 결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역 어미가 먹이나 양육 노력 등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너무 많은 수의 새끼들에게 분산시킨다면, 좀 더 작은 목표로 시작했을 때보다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는 적어질 것이다. 어미새는 아이 낳기와 아이 키우기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여야만 한다.

새끼를 과다출산 하는 개체가 불리한 이유는 개체군 전체가 그로 인해 절멸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새끼 중에 살아남는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 국가라는 것은 극히 부자연적인 실체다. 자연 상태에서는 키울 수 있는 수 이상의 아이를 가진 부모는 손자를 많이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유전자가 장래의 세대에게 이어지는 일은 없다.

피임은 부자연스럽다고 비판받지만 복지국가도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럽다.

개체군 과밀이 때로는 출생률의 감소를 초래한다는 것은 많은 자료에 의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