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의 원흉으로 대기업그룹의 과잉,중복투자 논란이 도마에 올랐다.

청와대의 과업으로 떠오른 빅딜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백미는 현대전자(반도체부문)와 LG반도체의 통합 추진이었다.

5대 그룹은 99년말까지 계열사를 절반으로 줄이고, 부채 비율을 200% 이내로 맞추겠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대우의 빅딜 기본합의 사실도 이날 공표했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미래에 가져올 진통을 알지 못한 금융시장은 환호했다. 코스피지수는 4.85% 급등해 8개월 여만에 500선을 회복했다.

강제로 밀어붙인 빅딜은 시간이 지나면서 '승자의 저주'로 변모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 기아차, LG반도체, 한화에너지 등을 싹쓸이하며 '최대수혜자'로 시샘을 샀던 현대그룹은 2000년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왕자의 난이 벌어진데 이어 현대건설에서 출발한 유동성 위기가 그룹 전체를 뒤흔들었다.

현대전자도 99년 10월 LG반도체와 합병한 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인수비용 부담과 D램 가격 부진을 버티지 못했다. 현대정유가 인수한 한화에너지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두 회사는 나중에 모두 빅딜을 피해갔던 SK그룹에 넘어갔다.

LG는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99년 데이콤 경영권을 확보했지만 속 빈 강정이었다. '천리안'의 사업자 였던 데이콤은 99년 말 한때 시가총액 14조 원을 웃돌았으나 이후 빠르게 추락했다. 2010년 LG파워콤,LG텔레콤과의 3자 합병으로 소멸하기 직전 데이콤의 시가총액은 1조 5000억원 수준이었다.

대우그룹은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고 1개월 뒤, 총부채 90조원에 육박하는 '인류 역사상 최대 파산' 기록을 남기고 공중분해 절차를 밟았다.

대우는 93년 부터 '세계 경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세를 거침없이 확장했다. 국가 원수와 담판해 한 나라에 경제 부흥 계획을 통째로 들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업계는 물론 경영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문제는 막대한 투자비용이었다. 세계 경영은 대규모 외화 차입을 필요로 했다. 현지 사업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긴 시간을 버텨야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입금 만기 때마다 새로운 빚으로 기존 빚과 이자를 갚는 패달을 쉼없이 밟아야만 했다.

김우중 회장은 부채비율 200% 관리 목표를 맹비난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금리를 낮추고 정책적으로 수출을 뒷받침 해줘야 합니다."

대우채 처리와 포퓰리즘

"시장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투자자도 책임져야지, 왜 투신사가 다 떠안습니까?

정부가 대우그룹 관련 채권에 투자한 개인들에게 원금보장을 약속한 데 대한 항의였다.

과감한 판단으로 시장은 89조 원어치 채권의 부실화 충격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했다. 동시에 수많은 가계가 파탄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었다.

저위험 고수익 상품의 등장

영민한 투자자들은 정무적 판단에 쉽게 휘둘리는 워크아웃 시스템의 허점을 간파했다. 부실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원리금을 정상적으로 상환받을 수 있는 둘도 없는 '저위험 고수익'의 기회라고 느꼈다.

채권단에서 고통분담을 요구하면 소송을 동원하여 촌각을 다투는 워크아웃에 제동을 걸었다.

그 결과 개인투자자들은 03년 SK글로벌, 2009년 풍림산업 및 우림건설 등 실패한 투자에서조차 원금을 안전하게 회수했다.11년 저축은행 사태와 13년 동양 사태에서 피해자 보상 특별법 요구가 등장했지만 공감을 얻지 못했다. 투자자 절반이 이전에도 고수익을 챙겨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에 머물던 73세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사업 진출 계획을 알렸다.

주위의 만류에도 이 회장은 일본 샤프, 미국 마이크론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으며 사업 강행 의지를 불태웠다. 일본에선 반도체업계가 훗날 한국과 경쟁하는 '부메랑'효과를 염려하며 샤프를 비난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속내와는 다른 글을 현지 신문에 기고해 여론을 안심시킨다.

한국이 배우려는 기술은 일본이 총력을 기울이는 첨단 분야가 아니다

혁신을 거듭하던 삼성은 93년 마침내 세계 메모리반도체 분야 점유율 1위라는 왕좌에 오른다. 04년 일본 10대 전자업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순이익을 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글로벌 선두 업체로 성장한다.

코스닥시장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폰지 형태로 불어들였고 투기장으로 변해갔다.

다수의 벤처기업은 높은 주가를 이용해 주식을 마구잡이로 찍어낸 뒤 투자자의 돈으로 새로운 회사를 인수했다. 주가가 너무 비싸지면 주식을 쪼개거나, 더 많이 찍어 공짜로 나눠주는 방식으로 다시 싸보이게 만들었다.

코스닥 기업이 99년 한 해 신규 상장과 유상증자로 흡수한 돈은 모두 5조 7000억원에 달했다.

비실비실하던 코스닥지수는 2000년 2월 7일 사상 최대폭 10% 급등하며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피운 뒤 다음 달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뒤늦게 각국 중앙은행까지 거품 터뜨리기에 나서면서 패닉 장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미국 중앙은행은 99년 6월 기준금리를 연 5%로 0.25%포인트 올린 것을 시작으로 1년에 걸쳐 6.5%까지 인상했다.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2000년 10월 연 5.25%까지 올렸다.

카드를 남용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대다수는 자영업자와 일용직 노동자였다. 관료들 주장처럼 정부는 과소비를 조장하지 않았고 조장했다 하더라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대체 왜 한국에서만 세계 금융사에 유래없는 '플라스틱 버블'이 발생한 걸까.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이후의 많은 연구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급증했던 저소득층 가구로 눈을 돌린다. 카드사들이 경쟁적으로 현금대출(카드론,현금서비스)창구를 열어젖힌 2000년부터 2002년 사이 대량으로 흘러들었던 한계가구. 그들의 생계비이자 사업 자금 조달에 따른 카드 빚 사용 증가에서 2003년 대란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시각이다.

99년 경제성장률은 11.5%에 달했고 2000년에는 9.1% 성장했다. 닷컴버블과 부동산시장의 활기로 어딜 가나 '재테크'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업 실패와 대량 실직으로 실의에 빠졌던 저소득층이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97년 25.4%에서 99년 36.0%로 급증한 저소득 가구는 작은 가게를 열거나 일용직에 종사하면서 '평범한 아빠'의 꿈을 키웠다.

통계청에 따르면 자영업자는 02년 6월 말 사상 최대인 630만명으로 99년 이후 60만 명 불어났다.

많은 한계가구가 여러 카드를 활용해 수천만원씩 대출을 받고 사업 자금으로 쓰거나 생활비를 댔다.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이용 촉진 정책은 철없는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자극했다. 하지만 절반 넘는 신용불량자는 40대 이상(52%) 가장이었다. '부자 되기 열풍'의 밑바닥에서 평범한 꿈을 키웠던 가난한 아바들의 비극적인 종착역이었던 셈이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트셀러 종합 3위에 올랐던 2000년. 종합 1위는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은 아버지의 숭고한 희생을 그린 소설 가시고기 였다.

대우 사태로 멈춰 섰던 펀드시장의 심장은 역설적으로 닷컴 버블 붕괴의 충격에서 허우적대던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당시 직장인들은 고용 불안과 예금 금리 하락으로 노후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많은 투자자가 절박한 심정으로 '불패 신화'가 건재한 부동산 시장에 달려갔고 집값은 무섭게 치솟았다.

가계 자산의 부동산 쏠림에 당황한 노무현 정부는 무너진 펀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려 애썼다. 03년 5월부터 주식형 펀드 장기보유시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을 시행해 금융회사의 책임과 공시를 대폭 강화했다.

미래에셋은 04년 3월 펀드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이끄는 상품을 내놓는다. 매달 100만원 씩 부으면 8년 뒤 3억 원을 모을 수 있다는 3억 만들기 적립식 펀드였다. 과거 3년간 자사 적립식 펀드가 이뤄낸 연평균 22%의 누적수익률을 근거로 제시했다.

전체 적립식 펀드 계좌수가 1484만개 까지 불어난 07년 자본시장은 주식형 펀드와 미래에셋의 천하였다.

적지 않은 증권사가 '매도'보고서를 쓰기에 앞서 최대 고객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보유 여부를 점검했다. 경쟁 운용사들은 미래에셋이 산 주식을 따라 사느라 풍문에 귀를 기울였다.

08년 가을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을 맞는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발한 때였다. 미래에셋도 시장을 이기지 못했다. 인사이트 펀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식형 펀드가 1년 만에 반 토막 났다. 애써 모은 자산의 절반을 잃은 충격은 개인투자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다. 07년 1500만개에 육박하던 적립식 펀드 계좌 수는 14년 621만개까지 내리막을 걸었다.

국민 80%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믿었던 96년. 가계의 주택 구입 부담이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미디어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청년과 신혼부부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변화는 2001년 느닷없이 찾아왔다. 수많은 가계가 마치 약속한 것처럼 부동산시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격이 치솟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빚을 내 따라붙었다. 서울 아파트 값은 2006년까지 6년에 걸쳐 130%나 급등했다.

외환위기의 고통이 새로운 천 년의 희망으로 옮겨가던 시기, 무엇이 가계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었던 걸까.

97년 외환위기 충격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서울 아파트 값이 15%나 미끄러지자 시장을 옭아맸던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세간의 관심이 90년대 말 수십 배씩 오른 인터넷 주식에 쏠려 있던 때, 극심한 공급 가뭄에 처한 부동산시장은 점차 화약고로 변해갔다. 그러다 2000년 아파트 매입을 향한 경주의 출발 신호였던 '닷컴 버블의 붕괴'방아쇠가 당겨졌다.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었다."

주식시장에서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 투자자들은 '부동산만한 자산이 없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서울의 아파트값은 01년 19.3%뛰면서 대세 상승의 시작을 알렸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강북 '뉴타운'사업을 구체화한 2002년에는 30.8%나 상승했다.

빈 땅에 울타리만 쳐도 청약 수요가 몰리자 건설업계는 잔칫집으로 변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건설사와 가계가 정신을 차리고 올아봤을 때, 장부에는 광란의 파티가 남긴 산더미 같은 빚이 남아 있었다. 2013년까지 100대 건설사의 절반을 파산으로 내모는 100조 원의 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과 훗날 한국 경제의 최대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700조원 대 가계부채 였다.

주가는 제자리걸음하고 부동산시장은 너무 뜨거웠던 06년 이후 슈퍼리치들은 자산을 어디로 옮겼을까? 개인투자자의 국고채 매입 증가

이후 10년 뒤 이들의 원금은 2배로 불어났다. 슈퍼리치 6-1호. 이후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730여개 중소 수출기업을 단숨에 파산 위기로 내몬 외환파생상품의 이름은 키코였다. 환율 변동위험 회피를 목적으로 한 이 계약은 원/달러 환율의 예상 변동 범위를 설정한 뒤 미래 환전금액을 확정하는 구조였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은 이 계약의 이면에 잠들어있던 파괴적인 조항을 깨우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안전자산 선호 심리로 환율이 폭등하면서 환율이 범위 상단을 한차례만 돌파해도 계약한 달러의 2배 이상을 약정환율로 환전해야 한다는 독소조항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동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단기 외화채무 잔액은 2008년 9월말 1600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조선업체와 해외 주식투자 관련 환헤지 수요 폭증에 대응하년 과정에서 달러 빚을 늘리는 파생상품 계약을 확대한 결과 였다.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허상

숲을 키우면 호랑이는 저절로 찾아온다.

한국의 자산운용시장은 높은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외환보유액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았다. 국민연금 운용자산은 2003년 100조원을 넘어선 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부동산에 80%나 쏠려 있는 가계 자산은 자산운용업계 관점에서 '긁지 않은 복권' 같았다.

그러나 기다려도 호랑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국세청 직원들이 05년 4월 골드만삭스,론스타,뉴브리지캐피털 등 외국 금융회사의 서울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전격적인 세무조사는 정부와 외국 금융회사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의 보도는 이같은 상황을 전면에 드러냈다. 금융허브를 추진하면서 외국 자본을 차별하는 '정신분열증적 행태'라는 등 원색적 비난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08년 10월 한,미 통화스와프 계약으로 한숨을 돌린 뒤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유럽 국가들의 연쇄 부도로 인하여 금융 시스템 붕괴 2라운드에 대한 우려가 확산했기 때문이다. 얼굴없는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던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는 3월 위기설을 제시했다.

미네르바의 3월 위기설이 처음 등장했던 08년 11월, 외환시장 딜러들은 난생처음 보는 숫자를 통해 은행들이 전례없는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감했다. 국내 은행의 달러 곳간 사정을 반영하는 통화스와프(CRS) 금리가 사상 처음 마이너스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CRS금리는 원화를 빌려준 국내 은행이 받는 원화 이자였다. 그 값의 마이너스 전환은 원화를 빌려주면서 '이자를 받기는 커녕 지급하는 계약을 맺고 있다'는 뜻이었다.

긴장감은 2월 달력을 펼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국내 은행 빚 104억 달러의 만기가 2월 3월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전체 만기 도래 물량의 절반에 가까웠다. '저승사자'무디스가 먼저 경고음을 울렸다. 한국 8개 은행의 신용등급은 2월9일 무더기로 떨어졌다.

운명의 3월이 밝자 곳곳에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동유럽의 연쇄 부도 우려가 가세하며 금융시장은 무섭게 요동쳤다. 환율은 3월 3일 1570원으로 36원 급등했다. 한국 정부의 부도 위험 지표인 크레디트디폴트CDS 프리미엄은 같은날 4.6%를 돌파했다.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최고였다.

지구촌 곳곳에서 울리는 금융시스템 붕괴 경고음에 놀란 중앙은행들은 다급하게 돈 보따리를 풀었다. 미국 중앙은행은 3월 18일 역사적인 장기국채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저축은행들은 부동산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2000년대 중반부터는 건물을 올리는 시행사 대출을 과감하게 늘리는 '도박'에 뛰어들었다.

PF 대출로 불리는 이 사업의 확대는 부동산 호황기 저축은행에 막대한 수익을 안겼다.

부동산 호황이 정점에 이르렀던 2007년 저축은행 PF대출은 12조 원을 부풀어 있었다.

11년초 부동산 시장이 혹한기로 접어들자 금융당국은 저축은행의 PF 사업장 전수조사 결과에 경악했다. 대출의 절반이 부실 우려 사업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 안에서 대중도 정치인도 중앙은행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눈물을 흘렸던 장면은 가끔 챙겨보는 장면이었는데..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으나 인간은, 정치인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평범한 가장,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고 싶었던 수많은 아버지들이 얼마나 실패하고 당해왔는지.. 수만은 투기꾼들이 결국 어떻게 망해왔는지.. 확신속에 위기가 있는데.. 나는 어떤 확신을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