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선물시장 '투기의 신' 반복창을 아십니까?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 인천미두취인소

투기 열풍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더욱 뜨거워졌다. 쌀값이 요동치면서 투기 심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1910년 2000만 석대였던 쌀 거래량은 1918년에 3000만석을 넘고 1919년 6000만석을 돌파했다. 반복창이 한해 30만원(2019년 기준으로 약 15억원)을 벌었다고 알려진 1920년에는 9000만 석을 웃돌았다.

1916년까지 15원 안팎이던 석당 가격은 1919년 월평균 35원~48원으로 폭등했다.

쌀값이 하루에도 몇 원씩 오르내리자 인천항 일대는 논밭을 판 돈을 당나귀에 싣고 온 투기꾼으로 넘쳐났다. 마바라(소액투자자)를 유혹하는 '일확천금 비법서'가 불티나게 팔렸고 중매점들은 현대 '찌라시'의 원조격인 정보지를 만들어 하루에도 수차례 천국과 지옥을 오간 취인소 투사의 무용담을 전했다.

1921년 결혼식 당시 하루에도 3만 원(2019년 기준 가치로 약 2억원)을 쓴 반복창.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신랑이었던 이 사내의 영화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일본인 미두 중매점에서 일하며 모은 400원을 밑천으로 1920년 한때 재산을 40만원까지 불렸지만, 그 후 손실로 전재산을 날렸다. 아내 김후동마저 세 아이를 남기고 떠나버린 뒤, '투기의 신' 반복창은 합백에서 한판에 몇 전을 거는 '절치기꾼'으로 전락해버렸다. 서른이 되어서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고,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이후 20년 가까이 미두거래소를 떠돌던 미두신은 1939년 불혹의 나이에 송림리 곁방에서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다.

1939년 9월 1일. 경성 거리에 호외가 뿌려졌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이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의 증권시장은 맹렬한 기세로 치솟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대의 경험으로 유럽의 확전이 가져올 효과를 직감한 투자자들이 공격적으로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군수물자 특수로 인한 일본 경제 대호황이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증권시장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조선증권취인소 대장주였던 동신(도쿄증권취인소 주식)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닷새만에 24% 뛰어올랐다.

명치정(명동) 중매점(증권사)엔 대박의 꿈을 안고 몰려드는 투자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장세를 한순간에 뒤집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0년 9월 일제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면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것이다.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조선증권취인소를 즉시 해산한다."

이로써 19세기 말 쌀 거래를 시작으로 반세기에 걸쳐 조선인의 환희와 눈물을 먹고 자랐던 한반도의 자본시장은 완전한 암흑기에 빠져든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 소용돌이 안에 나도 있다. 역사에서 배울 것은 사람들은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

버블의 추억 - 한국 채권시장의 흑역사

채권시장에서는 '건국국채'가 유일한 상장 종목이었지만 거래가 활발했다.

"확률은 50%, 맞히면 떼돈 번다!" 57년에 퍼지기 시작한 어떤 소문. 정부가 '국채발행계획안'과 '외환특별세법안'을 동시에 상정한 때 였다. 증권가에서는 두 안건 중 하나만 국회를 통과할 것이란 관측이 탄력을 받고 있었다.

채권시장은 완벽한 도박장으로 변했다. 증권사들은 가진 돈 없이 '큰손' 흉내를 내며 대규모 공매수와 공매도를 반복했다. 채권의 실질가치는 더 이상 증권사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대한증권거래소는 1월 17일 청산거래를 일시 중단하고 긴급 이사회를 열었다. 미결제 약정의 매매증거금을 즉시 납입하라고 지시했다. 40여개 증권사 가운데 증거금을 구해온 '건전한' 곳은 6개에 불과했다.

결국 국내 채권 발행잔액은 1980년대 초까지 10조원을 밑돌며 경제 규모 대비 지극히 왜소한 외형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의 채권시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뒤에야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2019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채권 발행잔액은 약 2000조원, 한달 거래대금은 400조원에 달한다. 글로벌 신용등급도 상위 세 번째인 AA로 평가 받고 있다. 중국과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새벽 4시부터 '대증주' 유상증자에 청약하러 나온 개인투자자들이 명동 은행가에 모여들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자본시장 육성을 천명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1세대 '개미'들의 장밋빛 꿈은 그로부터 1년 뒤 잔고가 70분의 1토막이 나는 처참한 종말을 맞는다.

충격적인 소문은 패가망신한 증권족의 흉문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대 전해진다. 창당 자금 마련에 혈안이었던 군사정권이 증권사들과 야합해 시세조종 '작전'에 개입했다는 내용이었다.

박정희,김종필 '4대 의혹 사건'

새내기주의 러시는 1975년을 전후로 주식 대중화의 꽃을 피웠다. 신규 상장기업은 며칠간 가격제한폭까지 상승했고 공모 청약일에는 새벽부터 번호표를 받으려는 인파가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유통시장도 달아오르며 주식 거래대금은 1972년 700억원 대에서 1976년에는 6000억원을 넘어섰다.

민간의 원활한 자본 공급은 산업구조를 기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ㅇ드로 바꾸는 투자 확대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화학공업의 수출 비중은 1970년 12.8%에서 1980년 41.5%로 뛰었다.

중동 특수가 불 지핀 건설주 광풍

1976년 1월 15일 한국 자본시장 사상 최대 낭보가 터졋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소문으로면 떠돌던 석유 발견 사실을 시인한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는 사상 최다인 55개(전체 상장 주식의 35%)종목이 상한가로 직행했다.

1977년 3월 11일 증권사들의 연합체인 증권업협회는 사상 초유의 '주가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묻지마 건설주 투자'가 확산하자 증권사들의 자진 결의를 통해서라도 거품의 확산을 막아보겠다는 의도였다.

건설주는 1975년부터 장장 3년 반 동안 파죽지세로 오르고 있었다. 종합건설업지수는 1975년 1월 7.45포인트로 시작해 1978년 6월말 403.34포인트로 53배나 뛰어올랐다.

투자자들은 연이어 터져나오는 천문학적 수주 금액에 이성을 잃고 열광했다. 해외 건설 수주금액은 1973년 1억 7400만 달러에서 1976년 25억 달러, 1977년 35억달러, 1978년 81억 달러로 매년 빠르게 불어났다.

현대건설은 1976년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규모의 주바일 산업항 공사를 거머쥐는 개가를 올렸다.

오일 머니는 한때 한국 무역외수입의 무려 24~50%나 차지했다.

1975년 3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착공으로 불붙은 강남 개발의 붐도 중동 건설과 함께 건설주의 파죽지세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하지만 오일 달러의 유입에 이은 기대인플레이션 상승, 부동산 투기 열풍은 각종 사회 문제를 낳기도 했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1975년 25.2%달했던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1977년 일시적으로 10.1%로 내려왔다가 빠르게 치솟기 시작했다.

당황한 정부는 1978년 6월 12일 과도하게 부풀어오른 풍선의 바람을 강제로 빼는 조치를 단행한다. 전격적인 '금리인상'이었다.

온갖 규제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건설주는 금리 인상 발표를 변곡점으로 자유낙하에 들어갔다. 한국금융사상 가장 전격적인 금리 인상 가운데 하나였다. 건설업 지수는 1978년 6월말 400포인트 대에서 그해 말 220포인트로 급전직하했다. 당시 건설주 시가총액 증발금액은 6개월 만에 약 4000억 원, 2019년 기준 가치로 3조 원에 달했다.

정부는 금리 인상 2개월 뒤인 8월 8일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놓으면서 아파트 시장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토지거래 허가제,기준지가 고시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 등 투기 억제책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1979년 말 건설업종지수는 122포인트를 나타냈다 1년 반 만에 시가총액의 70%가 사라진 셈이다. 시장의 관심은 컬러 TV 방송 조기 방영 재료로 이동해 전자업종 주식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건설주 시대의 끝을 알리는 주도주의 자리바꿈을 의미했다.

1970~1980년대 증권시장이 익숙하지 않았던 고객들은 창구 직원과 절대적인 신뢰관계를 맺는 경우가 흔했다. 직원 명함만 받고 뭉칫돈과 도장을 맡기기도 했다. 직원에게 "당신 판단에 따라 투자(일임매매)해달라."하며 돈을 맡겨두고 큰 수익을 기대하는 고객도 적지 않았다.

'중동 건설 붐' 이후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한국 경상수지는 1986년 47억 달러 흑자로 돌아섰고 이듬해 2배인 101억 달러, 서울올림픽이 열리 1988년에는 145억 달러를 기록했다.

일본 기업들의 덤핑공세로 '사업 철수'위기론까지 불거졌던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은 1985년 가을부터 '64KB램'공장을 풀가동하고 신제푼인 '256KD램' 양산 준비에 박체를 가했다.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삼성은 1993년에 메모리 분야 세계 1위 왕좌에 오른다.

주식 거래대금은 1985년 7조원에서 1989년 86조원으로 4년사이 12배로 불어났다.

정부도 증시 활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 승리 직후 소득 중위계층 이하 국민 대상의 '국민주 개발,보급 계획'을 발표했다.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을 시작으로 이듬해 한국전력 기업공개로 이어졌다.

'주식은 사두면 오른다'는 믿음이 갈수록 더 많은 투자자를 시장으로 끌어들였고 시장은 대량으로 쏟아지는 신주 물량까지 모두 소화해 냈다. 신바람 난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융자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현금의 2~3배까지 주식을 사도록 부추겼다.

1989년 3월 31일 코스피 지수는 대망의 1000선을 돌파했다. PER은 6배에서 14배로 올라 있었다.

이제 문제는 국민의 절반이 빚을 내어 고가에 매입한 주식을 누가 더 떠받쳐줄 수 있느냐였다.

주식시장은 예상보다 빠르고 더 잔인하게 무너졌다.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사상 최대 노사분규를 촉발했다. 서울 올림픽을 전후한 임금과 물가의 상승은 기업 실적을 짓눌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1987년 10월 '검은 월요일' 이후 원화 평가절상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1988년에는 한국과 대만을 첫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했고 절상 압력은 계속됐다.

과도한 증자와 국민주 공모도 공급 과잉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89년 1007포인트를 고점으로 1년 반마에 90년 9월 566포인트(-43%)까지 하락했다.

코스피지수는 1994년 경기 회복 기대에 힘입어 다시 1000선을 돌파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200대까지 고꾸라지는 부침을 겪는다. 1999년에도 정보기술주 급등으로 1000고지에 도달했으나 거품 붕괴로 2001년 반 토막 났다. 주가는 2005년 이후에야 1000선 위에서 안정을 찾았다.

주식시장 문호를 처음 외국인에게 개방한 1992년 1월 3일 외국인은 약 69억원어치 주식을 직접 매수하면 한국 자본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전체 766개 상장 종목 가운데 512개가 가격제한폭으로 치솟았다.

92년 외국인은 국내 증시에서 연간 약 1조 5000억원어치 주식을 순매수했다. 이후 약 30년에 걸쳐 600조원 규모의 주식을 쓸어담는다. 내재가치에 초점을 맞춘 종목 선정 성향은 재료와 풍문에 의존해온 투자행태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우물 안에 갇혀 있던 국내 투자자들은 이를 저 PER주 혁명으로 부르면 놀라워했다.

외국인 직접투자 빗장이 풀리자마자 태광산업, 한국이통통신서비스,신영,대한화섬 등 PER이 낮은 주식을 쓸어담았다. 당시 태광산업의 PER은 약 2배로 여전히 저평가 영역.

저PER주 외에 자산주 투자 열기도 뜨거웠다. 알짜 공장 부지를 보유했던 만호제강의 경우 1993년 8월 말부터 1년 6개월 동안 10배 넘게 상승했다.

정부는 주식시장 침체 징후가 나타날 때마다 소유 한도를 단계적으로 확대했고 외국인은 신규 매수 주체로 등장해 주가를 떠 받쳤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친 1997년 8월~11월 외국인은 약 2조 원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외국인 자금은 코스피지수가 400선 안팎으로 추락한 1998년 초에야 다시 한국 주식시장으로 밀려들어왔다. 달러 부족에 시달리던 정부는 주식시장의 '폭탄 세일' 행사에 더 많은 외국인을 초청하기 위해 투자 한도를 1997년 말 종목별 55%로 대폭 확대하고, 1998년 5월에는 완전 철폐했다.

99년 2월 4일 국회 한보 사건 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90년대 중후반 30대 대기업그룹의 3분의 1이 쓰러진 배후에는 천문학적인 '유령금융비용'이 존재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91년 '금리 자유화'를 전후로 빠르게 성장한 중견 그룹들이 편법적인 단기금융에 의존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정부의 오랜 은행 통제와 소수 대기업그룹의 금융 독점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은행에서 1조원을 대출하면 돈을 다 안줍니다. 7000억은 지급보증으로 내줍니다.

정태수 전 회장은 은행들의 '꺾기'관행으로 입을 뗐다.

꺾기는 금리자유화 이전 은행들이 수익 증대를 위해 썼던 변칙 영업이었다. 공금리(정부가 직접 결정해 고시하던 금리)와 실세금리, 이 2개의 금리가 존재하던 시절에 현금을 대출금보다 적게 내줘 실질 이자수익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정부가 실세금리보다 훨씬 낮은 공금리로 예금과 대출을 규제하면서 생겨난 부작용이었다.

정부의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은 전략산업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만성적인 대출수요 과잉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굴지의 대기업그룹을 제외한 많은 기업이 은행에 접근하지 못하고 제 2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사채시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한보는 매년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금융비용을 분식회계를 통해 채워넣었다.

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그해 곧바로 모든 대출금리를 자유화했다.

은행들은 설립 후 처음으로 서로 다른 대출금리를 제시하며 경쟁 체제로 들어갔다.

98년 1월 5일. 한달 전 전국 14개 종금사에 내려진 영업정지가 풀리자 예치금을 찾으러 온 예금주들이 이날부터 사흘간 약 2만명의 고객이 1조 1000억 원을 찾아갔다. 전체 종금사의 개인 예금은 2조 9000억 원의 40%에 가까운 규모였다. 한국 금융 역사상 가장 극적인 '뱅크런'사태였다. 종금사의 멸종을 부른 비극의 씨앗은 93년 금융 산업 개편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 정부는 출범 첫해인 93년 '지방 단자회사의 종금사 전환 방안'을 발표했다. 나중에 큰 논란을 일으킨 이 방안은 이듬해부터 무려 24곳의 영세 단자회사를 종금사로 둔갑시킨다.

종금사는 박정희 시절 '선발 6개사'가 탄생했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다. 반면 새롭게 종금사로 전환 허가를 얻은 단자회사의 출생 배경은 선발 회사와 사뭇 달랐다. 선발 종금사가 정부의 비호를 받고 화초처럼 성장햇다면 단자회사들은 부실채권을 거래하며 잡초처럼 자라났다. 업무 영역도 사실상 '기업어음 할인'이 전부였다.

정부는 자본시장 개방에 발맞춰 금융의 경계를 허문다는 취지로 94년 9곳, 96년 15곳의 단자회사에 종금업 '날개'를 달아줬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앞다퉈 국제금융을 맡을 직원의 채용공고를 냈다. 미래 '외환위기 태풍'을 일으키는 날갯짓의 시작이었다.

국제금융 업무의 초점도 갈수록 위험한 분야로 이동했다. 새 종금사들은 낮은 이자로 빌려온 달러를 훨씬 높은 이자를 받고 장기로 대출하는 영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일부는 일본 엔화를 단기로 빌려 태국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 신흥시장 정크본드에 장기로 투자하는 위험천만한 도박도 일삼았다.

종금산업 전체가 처음 공멸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은 97년 여름에 터져나왔다.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유예 협약 발표였다. 종금사들을 급작스런 유동성 위기로 내몰았다. 당시 국내 30개 종금사가 기아그룹에 빌려줬던 무려 3조원대 현금을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해외 금융회사들은 종금사의 부도 위험을 감지하고 빌려준 달러를 만기 연장 없이 회수하기 시작했다.

단기로 빌린 돈을 모두 장기대출과 부실 CP에 쏟아부은 종금사는 달러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비백산했다.

종금사들이 서로 달러를 더 비싼 값에 사겠다고 은행에 달려들면서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미국은 국채시장을 더 망가뜨리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을 뒷받침할 수단이 절실했다.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루빈이 주장한 강달러는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강달러로 떨어진 수입 물가는 '금리를 추가로 올려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압력을 떨어드렸다. 달러 가치의 하락을 우려해 아시아 신흥국으로 빠져나갔던 투자 자금의 환류를 자극해 채권과 주식 등 자산 가격도 상승했다. 글로벌 투자자들도 루빈의 정책을 '달러화 자산 매입에 나서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외국인의 미국 국채 투자잔액은 94년말 6673억 달러에서 3년 뒤 1조 2416달러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다우지수는 4000선에서 8000선으로 뛰어올랐다.

강달러 정책의 성공은 미국을 '잔치집'으로 바꿔놨지만, 신흥국에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졌다.

멕시코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를 버티지 못하고 뒤늦게 달러화 '고정핀 제거'라는 결단을 내렸다. 그 결과 페소화 가치는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폭락했고 치솟은 수입 물가는 경제 전체를 수렁에 빠뜨렸다.

그동안 통화 가치 상승을 자국의 경제 체력 강화와 동일시 했던 착각의 값비싼 대가였다.

달러화보다 빠른 원화가치 상승에 힘입어 '국민소득 1만 달러'의 위업을 달성한 이듬해인 96년. 한국 경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앓고 있었다. 실질임금 상승률이 88년부터 96년 사이 연평균 8.2%에 달하면서 기업 실적과 수출 경쟁력의 동반 악화가 나타났다. 기업의 이익 감소는 보유 현금을 바닥나게 했고 고금리 단기차입금의 증대로 이어졌다. 수출업체들의 최대 난제는 원화 가치의 고평가 였다. 증시 개방 등으로 인한 외국인 자금 유입은 원화 환전 수요를 키워 원화 가치를 경제 체력보다 높게 떠받쳤다. OECD의 가입 요건을 맞추려고 서둘러 금융시장 무장을 해제한 결과였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의 '구멍'은 달러 빚으로 메울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대외채무는 94년 808억 달러에서 96년 1448억 달러로 급증했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는 자연스럽게 원/달러 환율을 밀올려야(원화가치 하락) 정상이지만, 환율은 정반대로 95년가지 계속 하락했다. 94년말 달러당 789원 하던 것이 95년에는 776원까지 내려갔다. 사상 최대 적자를 낸 96년에 비로소 방향을 바꿔 800원 대로 올라섰지만 890원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수입물가 상승을 경계한 한국은행이 시장개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원화 환율은 겉으로는 수급에 따라 변하는 '시장평균환율제'였지만 외환당국의 잦은 개입 때문에 고정환율 성격이 강했다.

태국 정부가 7월 2일 바트화를 달러에 사실상 고정한 '복수통화바스켓제도'를 포기한다고 발표하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까지 아시아 금융시장 전체가 무섭게 요동쳤다.

바트화가 폭락하고 보름 뒤 국내에선 재계 8위 기아그룹의 채무상환 실패 소식이 터져나왔다.

강경식 장관이 이끄는 재정경제원은 무너진 신뢰를 되살려보려 금융개혁법안의 신속한 통과에 총력을 기울였다.

강장관과 관료들은 11월 중순부터 연일 국회를 돌며 대외 신인도를 개선할 수 있도록 같은 달 말 정기 국회 폐회전에 법안을 처리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제 15대 대선에 정신이 팔린 의원들의 회의 불참과 야당의 의도적인 회피로 결국 법 제정에 실패하고 만다.

여당의 일부 의원은 상황의 시급성을 호소해도 '경제가 망하면 김영삼 대통령이 망하지 우리와는 관계없다'는 식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야당 의원들은 은행감독원을 내주지 않으려는 한국은행 등 법안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 회의에 불참하는 전략을 썼다.

실낱같은 희망이 하나둘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97년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원/달러 환율은 한국이 경제 주권을 빼앗긴 뒤에야 수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되돌아왔다. 97년 12월 23일에는 달러당 1962원까지 치솟았다.

한국 경제의 최대 위협이엇던 경상수지 적자는 1998년 보란 듯이 401억 달러 '흑자'로 전환했다. 한국 경제 사상 최대 흑자였다.

강 경제부총리의 회고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뜻밖에 걱정하는 기색 없이" IMF와의 협의를 재가했다.

디데이 오전 11시. 청와대는 난데없이 임청열 통상산업부 장관은 새 경제부총리로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임명 6시간 만에 기자회견장에 나온 임 경제부총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돌출 발언을 내놨다. 'IMF 도움없이도 국난 해결이 가능'하다는, 기존 합의를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었다.

국제적 합의의 일방 파기. 정권의 파국을 모면하고자 벌인 일종의 '정치적 도박'이었다는 의혹을 남긴 이 사건은 미국과 IMF가 한국 정부의 경제 체질 개혁 의지에 강한 불신을 갖는 계기로 발전한다. 구제금융 협상은 이때부터 한국 경제를 더욱 고통스러운 개혁의 소용돌이로 내모는 IMF의 강업적 요구로 돌변했다.

정부는 곧바로 IMF와 실무 협상에 들어갔지만,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더 나은 조건의 돌파구를 찾는 이중 플레이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을 방문해 브리지론을 요청하는 적극성도 보였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 같은 시도는 그날 오후 2시에야 완전히 막을 내린다. 분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해 IMF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경고한 뒤였닫.

IMF는 자금 지원에 앞서 우선 이행해야 하는 조치 등을 담은 '이면 각서'에도 서명하도록 했다. 내용은 콜금리 연 25%로 인상, 재일은행과 서울은행의 퇴출, 9개 부실 종합금융사의 영업정지, 외국인 적대적 기업인수 허용 법안 제출, 외국 금융회사의 국내 금융회서 인수 허용 계획 발표 등 받아들이기 가혹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미국의 '선물'과 한국의 '약속'은 외환위기의 끝이자 모든 경제 분야에 닥칠 새로운 위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살인적인 고금리와 인적 구조조정으로 한국의 실업자는 97년 말 57만명에서 99년 2월 180만명을 돌파해싸. 98년 경제성장률은 건국이래 최악인 -5.1%로 곤두박질쳤다. 99년까지는 3년 동안 거래소 상장폐지 기업은 218곳에 달했다.

'검은 거래'의 고리 CD

정부가 84년부터 취급을 허용한 CD는 '은행에서 예금을 보관하고 있다'는 증서다. 증서 소유자는 일반적으로 액면에 적힌 금액보다 싸게 매입한 뒤 만기 때 액면 금액에 해당하는 현금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 만기는 3개월이다. 채권처럼 사고팔 수 있다는 점이 일반 예금과 다른 매력이다. 과거 은행들은 이러한 특징을 지닌 CD를 변칙 영업인 '꺾기'에 적극 활용했다.

해당 CD는 은행에서 대출금을 내주면서 이중 일부를 다시 CD를 사는데 쓰도록 하는 꺾기의 부산물이었다. A사에 50억원의 대출을 해주는 대신 10억원은 재예치(CD매입)를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CD는 소유자 이름을 따로 기록하지 않는 무기명 특성 대문에 검은 거래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03년 현대그룹 비자금 수사에선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등이 뇌물로 CD를 언급했다.

은행들은 '죽은'CD 금리를 대체할 수단을 강구하던 끝에 '코픽스'를 도입하고 10년 2월부터 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