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던 혁신은 실제로 일어났다. 1721년 법안이 통과되고 10년 후, 존 케이는 플라잉 셔틀을 개선하여 방직공의 생산성을 높였다.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산업혁명을 논하는 자는 모두 면직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수많은 방적기와 방직기가 쓸모없어졌다. 새로운 공장이 탄생하기 전인 18~19세기에 '기계 파괴' 시도가 일어났다.(러다이트라는 단어는 1810년대 기계 파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가상의 지도자 네드 러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후 75년간 영국의 면직물 산업은 오늘날 무척 낯익은 다양한 소비자 마케팅 수단을 개발하여 저렴한 신제품의 수요를 끌어올렸다. 패션 잡지, 주기를 단축한 유행, 소매상점의 쇼룸, 새로 닦은 민자도로와 유료 고속도로를 통해 물건을 공급받는 지역 창고 등이 이 시기에 등장 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7세기에 향료 제도를 네덜란드에 빼앗기면서 인도의 섬유로 눈을 돌렸듯, 18세기에는 완성된 면직물과 실크라는 고수익 무역을 빼앗기자 무게중심을 다시 옮겼다. 이번에는 중국과의 차무역이 새로운 관심 분야였다.
왕조차 동인도회사에 적개심을 품어 영국에 도착하는 가격의 최대 100퍼센트를 세금으로 부과했다. 영국인이 차에 중독될수록 왕은 차 수입으로 생기는 세금에 중독되었다.
관세가 높으면 밀수를 피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남부 해안과 웨스트컨트리는 밀수 차의 천국이 되었으며 프랑스 상인들은 채널 제도를 선호했다.
차와 설탕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으며 소비량이 나란히 증가했다. 설탕 생산자들은 차 소비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차 마시기를 장려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역시 설탕에 같은 입장을 취했다.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된느 차와 설탕이 귀족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애용하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1519년부터 노예무역이 막을 내린 1860년대 말까지 95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신세계로 이동했다.
중간 항로의 사망률은 15퍼센트로 추정되는데, 이는 곧 1100만 노예가 아프리카를 떠났음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착한 노예는 40만 명(4.5%)에 불과 했다. [표10-1]에는 신세계에 도착한 노예의 목적지별 비중과 1950년 현재 그 후손들의 비중이 요약되어 있는데 이상한 점이 보일 것이다. 우선 미국과 캐나다에 도착한 노예가 전체의 20분의 1도 안 되지만 노예의 후손들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양국에 거주하고 있다. 카리브 제도에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전체 노예의 5분의 2가 이 지역으로 향했지만 현재 노예의 후손 가운데 5분의 1만 카리브 제도에 거주하고 있다.
답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치명적 작물인 사탕수수를 재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탕수수를 베고 분쇄하며 가열하는 작업은 몹시 고됐으므로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조기에 사망했다.
11.자유무역의 승리와 비극
당시 동인도회사의 선박에 오르는 것은 흔히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주는 급여 자체는 자딘의 경우 두 달에 5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800달러) 수준으로 대단치 않았지만, 선원에게 할당되는 '특권이 부여된 톤수'에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외과의 조수에게 2톤, 외과의에게 3톤, 선장의 경우 떠나는 길에 56톤과 돌아오는 길에 38톤의 화물을 책정했다.
자딘처럼 진취적인 선원들은 자기 계정으로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나중에 근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역 제국을 설립하는 이 청년 의사는 19세기 초 세계무역에 불던 변화의 바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엄밀히 말해 중국에는 교역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황제는 조공을 받을 뿐이었고, 그 대가로 외국의 탄원자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조공을 받고 하사품을 전달하는 교환 행위는 현실적으로 다른 아시아 상업 중심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교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은 영국이 시암 같은 일반적 속국이라고 크게 착각했고, 그 오판의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일부 유럽인이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것과 달리 중국인은 어떤 유럽어에도 능통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임칙서는 당대 가장 유능하다는 역관을 고용했는데, 나중에 역관들이 남긴 문서를 조사해본 결과 피진어를 구사한 정도에 불과했다. 근본적으로 중국과 영국 사이에는 문화와 계급 면에서 깊은 골이 존재했다. 18세기에 영국 상인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상인들을 하찮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일이 원활하지 않았다. 우선 영국 동인도회사는 런던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교역 활동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금융시장이 초기 단계라 자본이 부족했으며, 이자율이 매우 높은 최저 생활수준의 사회였다. 공행은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거래로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고금리는 양날의 검이었다. 한편으로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민간 상인들은 본국에서 저금리에 차입한 자금을 중국에서 천문학적 금리로 대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됐다. 영국에서는 차에 대한 갈망이 커졌지만 중국은 영국에 특별히 원하는 바가 없었다. 19세기 중국의 무역 사무관이었던 로버트 하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식량인 쌀을 확보하고 있으며 최상의 음료인 차를, 최고의 옷감이 면, 실크, 모피를 가졌다. 이처름 생필품을 다 가진데다 수많은 부속물을 누리고 있으니 다른 데서 물건을 사면서 1원 한 장 쓸 필요가 없다.
중국에서 서양에 유일하게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구리와 진귀한 기계 정도였는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매출로는 차 대금 일부분을 지불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국인은 영국 물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인도의 면화만은 예외였다.
영국의 제조품이 인도로, 인도의 면화가 중국으로, 중국의 차가 영국으로 수출되는 방식이었다. 영국은 새로운 랭커셔 공장에서 생성된 면직물을 중국과 인도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1820년대 중국의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중국 내부에서도 목화 재배가 증가하면서 인도산 면화의 수요가 둔화됐다. 이제 영국은 차를 사기 위해 다시 값비싼 은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자 영국은 또 다른 디와니 작물인 아편으로 눈을 돌렸다.
19세기 유럽인은 많은 아편을 섭취한 반면 중국인은 아편을 피웠다. 아편을 피울 경우 경구로 섭취할 때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서양보다 아편을 더 위험한 물질로 간주했다.
아편으로 중국의 전체 인구와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통념은 오해다. 첫째, 마약은 가격이 꽤 비쌌기 때문에 대체로 고위 관리나 상인이 소비했다. 둘째, 주류와 마찬가지로 마약도 사용자의 일부에서만 치명적 중독 현상이 나타났다. 악명 높은 아편굴도 지저분한 명성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는 서머싯 몸의 묘사의 잘 드러나 있다.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는 유라시안의 손에 이끌려 아편굴을 방문했는데, 그를 따라가다 만난 계단에서 바람이 일렁이자 기대감이 커졌다. 깔끔하고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조명이 밝았고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다. 마루는 깨끗한 매트가 깔려 있어 푹신한 방석 역할을 했다. 칸막이 한 곳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은발에 손이 고운 한 신사가 앉아 있었는데, 긴 파이프를 옆에 높고 조용히 신문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방에서는 남자 넷이 장기판 주위로 쪼그려 앉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유쾌하고 편안하며 집처럼 안락한 곳이었다. 마치 지친 노동자들이 밤에 들러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베를린의 낯익은 맥줏집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편은 사회적 마약으로서 사용자의 일부에게서만 유해한 영향이 나타났다.
중국의 남성 절반과 여성의 4분의 1이 정기적으로 아편을 사용했지만 1978년 기준으로 중독 위험이 있는 수준으로 아편을 흡입한 중국인은 100명 가운데 한 명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황제와 고관들은 아편에 의한 심신 약화에 도덕적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한 대목은 마약이 무역수지에 미치는 악영향이엇다. 중국은 17세기 유럽의 여느 군주처럼 유럽형 중상주의 이론을 지지했다. 1800년 이전의 차 교역은 중상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 매우 유리했다.
1860년 이후 중국의 아편수입량이 차 수출량을 넘어섰고, 중국 은이 처음 해외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1818년 이후에는 은이 중국 수출품에서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1820년대에 이르자 권력이 막강한 관료 집단에서 아편 합법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는 아편을 합법화하되 은이 아닌(차 등의) 물건과 교환하여 구입하는 조항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디슨은 부를 축적한 이후 학문과 저널리즘을 추구했다. 당대 지적으로 뛰어난 많은 청년들처럼 매디슨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창한 자유무역 이념을 받아들였다. 1827년에는 중국 최초의 영어 신문인 광저우 레지스터를 창간했다.
여느 젊고 활력 넘치는 조직과 마찬가지로 매디슨의 회사도 모든 측면에서 효율성을 추구했다.
광둥무역 체제를 와해시킨 일등 공신은 자딘 매디슨의 탁월한 일군이자 언어학자 겸 의료 선교사였던 카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퀴츨라프 였다.
귀츨라프는 친영 성향의 포메라니아 루터교도였으며 중국 주요 지방의 방언을 구사했다. 그는 세명의 영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교도인 중국인을 상거래로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적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아편을 기독교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다.
자딘이 주도하는 지방무역 상인과 맨체스터 공장 이해관계자들의 연합 세력은 1830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특허장이 만료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들은 의회에 '새로운 상법'을 지지하는 신청서를 제출했으며, 의회는 요청에 응했다. 결국 영국 동인도회사가 동양과의 무역에서 누리던 독점적 지위는 1834년 4월 영구적으로 소멸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이미 아편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사무역 상인들은 오랫동안 동인도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준 차 무역도 차지했다.
150년 사이에 실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700년 어너러블 회사는 자유무역의 선봉에 서 있었고, 영국의 보호주의를 주창하는 직물업계는 잠식당하고 있는 기존의 독점을 유지하고자 발버둥 쳤다. 그런데 19세기 초가 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경직된 영국 동인도회사는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애쓴 반면, 면직물 제조업자들은 제약 없는 상업을 주장했다.
1700년 이전에는 차일드와 마틴의 세계주의 주장이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1830년에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론을 구현한 윌리엄 자딘과 제임스 매디슨이 승리를 거뒀다. 인도양의 상업 중심지에서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수백 년 전부터 합리적으로 개방된 시장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서양이 압도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군대와 해양 기술을 앞세워 진출했고, 중국과 인도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장한 독점주의자들의 방식을 버리고 자유무역을 끌어안았다.
아편이 영국 무역의 절반을 차지했는데 알짜 거래는 민간인의 손에 있었던 셈이다.
1차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은 1842년까지 이어졌다. 양국은 악명 높은 난징조약을 통해, 중국이 영국에게 금전적으로 보상하고 공행의 독점을 폐지하며 중국의 수출입 관세를 인하하고 광저우 외에 네개 항구를 개항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개항하는 항구에서 영국은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영국 영사의 지배를 받았다.
난징조약의 수치는 중국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주제다. 미국인은 관련 사건에 대해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21세기 미-중관계에서 그리 좋은 전조가 아니다.
아편같은 유해 제품의 수입이 중국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비난이 일었지만, 사실 기계가 생산한 면직물처럼 무해한 제품도 오늘날 인도를 빈곤에 빠뜨리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칼 마르크스가 영국 동인도회사 윌리엄 벤팅크 총독의 말을 인용한 것도 이런 시각에 서였다. "무역 역사상 이처럼 불행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면화 방직공들의 뼈로 인도 평원이 하얗게 변하고 있다." 인도의 건국자들도 오늘날 인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견해에 공감했다. 일반적으로 논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영국은 인도의 제조품 수출은 금지하면서 영국 제품이 인도로 '자유롭게 반입'되도록 허용했다. 그 결과 인도의 자랑스러운 섬유산업이 파괴되었다. 근대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장인 계층의 제거는 대량 실업 사태로 이어졌다. 산업과 제조에 종사했던 수천만 명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게? 어디에 가서 일해야 하는가? 과거에 몸담았던 일자리에서는 더 이상 이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구직자가 진입할 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목숨을 끊는 방법도 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모면할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실제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 토론에서 언급되지 않으나 반박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제 인도에서 빈곤층이든 부유층이든 수천만 명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좋은 영국산 옷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도가 다른 나라보다 빈곤해졌다기 보다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서양이 상대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봐야 한다.
곡물법은 1756년 7년전쟁이 발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식량 부족 사태가 북부의 산업 중심지를 강타했고, 폭도는 곡물 저장소와 빵집까지 약탈했다. 수백 년 동안 곡물법을 무시하거나 법에 의한 판매 제약에 대해 알지 못하던 곡물 상인들은 어느 한순간 법원의 결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지는 신세가 되었다.
돌연 곡물 무역 정책이 대중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의회는 소비자들에게 공급을 늘리고 토지 귀족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곡물법을 연이어 통과시켰다. 하지만 그 어떤 효과도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793년 이후 혁명의 기운에 사로잡혀 있던 프랑스와의 전쟁과 연이은 흉작으로 곡물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밀 가격은 1790년 이전 한 세기 동안 쿼터 당 평균 40실리에 거래되었으나 100실링 이상으로 치솟았다. 1795년 10월 29일 왕이 의회에서 개회사를 하러 이동하는 중에 폭도가 왕의 수행단을 둘러쌌다. 왕이 탄 마차를 향해 총성이 울렸고 폭도는 "평화를 달라! 평화를 달라!"라고 외쳤다.
정부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곡물 수출을 금하고 양조장에서 곡물을 쓸 수 없도록 규제했다. 모든 수입관세를 철폐하는 한편 공식 경로를 통해 발트해의 밀을 수입했다. 해군은 프랑스로 향하는 중립국 선박에서 곡물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광범위한 기근을 해소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빈곤하고 가난한 서민들로부터 더 이상 폭리를 취할 수 없게 된 부유한 지주들을 분노케 했다.
정부는 수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소비자들에게 밀을 보리나 호밀과 혼합하여 만든 빵을 먹으라고 장려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는 빈고층조차 흰 빵 맛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제빵업자들은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혼합 곡물 빵을 만들기를 거부했다. - 부동산 정책등에서 많이 본 장면. 원하는 집이 모자라는 것.
1800년 이후 수확량이 늘어 가격이 일시적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전시에 곡물 부족으로 이익을 누린 지주들은 1804년 11월에 수입 밀에 '차등'관세라는 전통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곡물법을 개정하라고 의회를 압박했다.
1804년 곡물법은 영국 곡물 재배업자들의 태도와 정치적 영향력을 드러낸 사례이며, 보호주의가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국내 생산업자(영국의 토지 귀족)를 보호했지만 그 비용은 소비자가 부담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국의 지주들은 전시의 높은 곡물 가격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했다.
리카도는 저서를 통해 [국부론]의 탁월한 후계자임을 직접 증명해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웨더럴은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 체제가 무엇인지 설명했다면, 데이비드 리카도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했다."라고 풀이했다. 특히 외국무역을 다룬 유명한 챕터는 중상주의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명쾌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시장의 발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수량과 교환할 수 있는 외국 제품의 수량이 두 배로 증가하더라도 우리가 더 큰 가치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이어 리카도는 비교우위론을 설명하면서 특징한 상황을 가정했다. 일정 수량의 와인을 생산하는 데 영국인 120명이 필요하고 옷감 생산에는 100명이 필요하다. 반면 포르투갈에서는 동일한 와인과 옷감에 각각 80명과 90명의 노동력이 든다고 가정해보자. 포르투갈이 와인과 양모 생산에서 모두 영국인보다 효율적이지만, 포르투갈은 80명의 노동력만 필요한 와인 생산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옷감을 만드는 대신 소비하지 않고 남는 와인을 영구에서 만든 옷감과 교환하는 선택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리카도의 결론은 당대 독자들에게는 모호하게 다가왔고, 오늘날에도 비교우위론은 잘못 이해되기 일쑤다.
그러니 더 와닿는 예를 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유명한 변호사가 있는데 인기가 좋아서 한 시간당 수임료가 1000달러라고 가정해보자. 게다가 일반적인 목공보다 솜씨가 좋고 생산성이 뛰어나다고 가정해보겠다. 예를 들어 부엌을 개조할 대 목공이 작업할 경우 200시간이 들지만 재능이 뛰어난 변호사가 작업하면 100시간에 끝난다. 목공은 시간당 평균 25달러를 받으므로, 변호사의 목공 기술은 시장에서 시간당 50달러로 책정될 것이다. 만약 변호사의 가족에게 새 부엌이 필요하다면 일반 목공보다 두 배 생산적인 변호사가 작업을 진행할까? 그런 일은 변호사가 시간당 수임료가 1000달러인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논문에서 리카도는 '진짜'영국이 거두는 주된 이익은 공장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곡물법은 외국 곡물의 구입을 가로막고 영국이 귀중한 노동력을 생산성이 떨어지는 농업에 낭비하도록 만들며, 이는 토지 귀족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론이 많은 사람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이즈음 코브던은 보호무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맞서는 달인이 되었다. 그가 남긴 일기의 한 구절은 나폴레옹 3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시사점을 던져준다.
황제는 프랑스 장관들이 자유무역 정책을 만류하면서 역설한 주장을 내게 되풀이했다. 특히 M. 망주 재무장관은 금지 정책을 완화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외국 상품이 대거 유입되어 프랑스에서 소비될 때마다 국내에서 제조된 제품을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나는 프랑스의 전국민이 의복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수입으로 인해 국내 제품의 추가 소비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망주 장관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프랑스의 수백만 인구는 스타킹을 신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데다 스타킹은 금지되어 있었다. 장관은 수천만의 인구가 빵을 거의 맛보지 못하고 감자나 밤등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현실에 유감을 표했다.
미셸 슈발리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수용한 것은 이번 세기의 가장 대단한 사건이다. 이처럼 강력하고 계몽된 국가는 위대한 원칙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다. 그러니 영국 모방자들은 영국이 간 길을 따라가는 일에서 어떻게 실패할 수 있겠는가?
1860년 코브던과 슈발리에는 영국 해협 양쪽에서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영불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 공로로 코브던은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 의원에게 찬사를 받았다.
코브던 - 슈발리에 조약으로 양국의 수입관세는 크게 낮아졌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이탈리아, 스위스, 노르웨이, 스페인, 오스트리아, 한자 동맹 소속의 도시가 행렬에 동참했다.
1776년 [국부론] 발간 이후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되기 까지 스미스, 리카도, 코브던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의 이론적,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글로벌 경제는 코브던 - 슈발리에 조약의 체결 이후 수십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보호주의자들은 값싼 수입 농산물 때문에 농민들이 재앙을 맞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품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곡물법이 폐지되고 한 세대 후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러시아에서 저렴한 곡물이 쏟아져 들어와 영국과 유럽 대륙의 농민들을 덮쳤다. 1913년 영국은 밀 소비량의 80퍼센트를 수입했지만, 20세기 초 사리 판단이 분명한 영국인 가운데 나라의 산업 기반을 놔두고 과거의 농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었다.
새로운 글로벌 경제에 대한 19세기의 반응은 21세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유무역이 전반적으로는 인류에게 이익을 안겨줬어도, 새로운 질서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패배자들도 양산했다.
12.기술 혁신과 대륙 횡단 무역
해밀턴 못지않게 영향력이 컸던 인물로 독일 태생의 경제학자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리스트를 들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는 농민과 노동자 모두 보호주의를 요구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곡물 가격이 하락했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미국 농민들은 국내시장에서 곡물이 유통되기를 원했고, 뉴잉글랜드의 공장주들은 랭커셔 공장과의 살인적 경쟁에서 피난처를 요구했다.
20세기에 소득세가 도입되기 전 수입관세는 미국 정부 수입원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경기 불황기에 미국 정부가 세수 충당을 위해 관세를 인상해야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 경기 하강기에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조치가 관세 인상이다. 영국 제조업에 대한 경계, 빈번한 경기침체, 정부의 세수 확충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북부에서 보호무역론자들이 득세했고 그 흐름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반면 남부는 자유무역을 원했다. 전쟁전 남부의 항구를 방문해본 사람들이라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1798년의 어느 날 찰스턴 항에만 117척의 선박이 머물렀는데 리버풀, 글래스고, 런던,보르도,카디스,브레멘,마데이라 등에서 온 물건을 싣고 있거나 목화, 담배, 쌀, 인디고 등 관세 보호가 필요한 제품을 싣고 떠났다.
1820년 이전에는 남부와 북부 사이에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딕시에서는 해밀턴의 미국 시스템을 대체로 지지했다. 하지만 미주리 협정으로 남부는 북부가 과반을 차지하여 노예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했다. 이에 남부는 북부와 의견이 엇갈리는 또 다른 사항을 파고 들었는데 그중 대표적 사례가 관세 문제였다. 노예와 관세 문제로 '호감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잭슨파는 칼훈에게 애덤스파가 협박하는 제약적 관세법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잭슨파는 애덤스파와 손잡고 '혐오관세'로 더 잘알려진 가혹한 1828년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 통과로 북부와 남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이제는 남부인의 성가신 반대도 없었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관세장벽을 거리낌 없이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가공할 만한 관세장벽은 남북전쟁 이후 50년 이상 미국의 산업을 영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했다.
19세기 초 미국과 유럽에서는 보호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소용돌이치는 한편 운송비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형 화물인 곡물의 경우 1830년 이후 운송비가 저렴해지면서 전 세계 단위로 시장에 새로 형성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운송비가 비싸서 미국에서 생산되 곡물 등 대형 화물이 유럽에서 경쟁할 수 없었음을 알려준다. 다시말해 대형 화물의 육상 운송비가 무척 비쌌기 때문에 화물에 부과되는 관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교역량의 증가는 늘 승자와 패자를 양산했다. 운송비의 하락 덕분에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오스테레일리아, 우크라이나의 농부와 목장 주인은 유럽 대륙에 곡물과 육류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반면 저렴한 국산 목재와 범선에 대한 전문 지식에 의존하던 미국의 조선사는 영국의 증기선과 철강 기술에 자리를 내줬다.
인도 역시 패자에 속했다. 면직물과 황마 재배자들은 번영을 누렸으나, 범선 위주의 해운업은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의 조합으로 황폐화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도 선박은 연안 무역조차 할 수 없었으며 조선업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13.대공황과 보호무역주의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그야말로 최악인 시기였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 지도자들과 논설위원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일방적이고 오만하며 위험하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분노에 찬 유럽인은 미국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무엇이 그토록 격렬한 반미주의를 일으켰는가? 이라크 침공이었나? 베트남전이었나? 맥도날드, 마이크로소프트, 디즈니가 전 세계를 장악해서인가? 사실 방금 묘사한 시기는 1930~1933년이며, 스무트-홀리 관세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 관세법은 의회에서 통과된 가장 악명 높은 법안으로 손꼽히지만, 그만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다. 스무트-홀리 관세법으로 미국의 관세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달했지만 사실 이전부터 관세는 고공 행진을 하고 있었다. 특히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일반인들의 통념과 달리 대공황을 일으키거나 그 정도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그 이전의 미국 무역 정책과 크게 동떨어진 법안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새로운 글로벌 농산물 교역에 맞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보호주의의 물결을 대표하는 사례로 봐야 한다.
해상 운송의 효율성이 크게 증가하면서 농산물 가격이 수렴했지만, 고난의 시기에 농민들에게 위안을 주던 가격 상승의 효과가 사라지는 문제가 있었다. 대양 너머는 말할 것도 없고 강 건너 지역에서 곡물을 들여오는 데도 비용이 많이 들던 시대에는 곡물 부족을 가격 상승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송비가 저렴한 글로벌 농산물 시장에서는 이러한 위안거리도 사라졌다. 익숙한 완충지대가 사라지면서 글로벌 경제로 인한 가슴 아픈 사례도 발생했다.
20세기 초 스웨덴의 경제학자 엘리 헤크셰르와 베르틸 올린은 이러한 흐름을 분석하기 위해 심사숙고했고, 겉으로 나타난 현상 뒤에 심오한 의미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의 '고전 경제학'에서는 모든 제품에 노동력, 토지, 자본이라는 세 가지 생산 요소를 고려하는데 각 요소는 임금, 지대, 이자를 발생시킨다. 헤크셰르와 올리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력은 운송비 하락이 전 세계 상품 가격의 수렴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세 가지 생산요소인 임금,지대,이자율에서도 수렴이 나타났음을 간파한 것이다.
최근 수행된 연구는 두 사람의 가설이 유효함을 확인시켜준다. 19세기 초 노동력과 자본과 더 풍부한 곳은 구세계였다. 따라서 구세계에서는 임금과 금리가 낮았으며 신세계에서는 높았다. 반면 신세계에는 토지가 훨씬 더 풍부했기 때문에 지대가 저렴했다. 경제사학자 케빈 오루크와 제프리 윌리엄슨은 1870년 신세계에서(실제 구매력으로 정의되는) 평균 실질임금이 구세계보다 136퍼센트 높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1913년에는 차이가 87퍼센트로 줄었다. 놀랍게도 이 기간 중 미국의 실질 지대는 248.9퍼센트 상승한 반면 영국에서는 43.3퍼센트 하락했다.
지대의 수렴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자명하다. 저렴한 운송비 덕분에 유럽으로 곡물과 육류가 대량 유입되면서 구세계에서 지대가 하락했고 신세계에서는 상승했다. 구세계에서 농지 가격이 하락했으나 신세계에서는 상승했다.
자본시장의 수렴 현상은 보다 이해하기 쉽다. 전신 덕분에 지역 간 이자율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거 되었고, 심지어 자본과 신용의 즉각적인 '전송'도 가능해졌다.
다만 임금 수렴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가장 명쾌한 설명은 신세계의 임금이 높아 활발한 이주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유럽인은 자유나 금으로 포장한 천국 같은 곳을 동경하여 신세계로 이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더 높은 임금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유럽인이 대서양을 건너 대거 이주하면서 임금 격차도 점차 줄었다. 그러자 이민을 법으로 제약하기도 전에 이미 이민이 줄어들었다.
19세기 운송 분야의 혁명이 미친 영향을 따져보면, 구세계 노동자와 신세계 지주(주로 농민)는 승리자이며 구세계 지주와 신세계 노동자는 패배자 였다.
헤크셰르와 올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무역이 증가하면 일부 나라에서는 임금이 하락하고 노동자가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모델에 따르면 보호 정책이 상대적으로 희소한 요소를 보유한 국가에는 이익이지만, 풍부한 요소를 부유한 국가에는 손해다. 자유무역은 상황을 역전시킨다.(여기서 고려된 생산요소는 고전 경제학의 생산요소인 토지, 노동력, 자본이다.)
만약 A국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B국에서는 풍부하다면, B국에서는 임금이 낮을 것이며 B국에서 생산된 노동 집약적 제품의 가격은 쌀 것이다. 자유무역이 일어나면 상인과 소비자는 B국에서 생산된 저렴한 제품을 더 선호한다. 이에 따라 B국 노동자들은 이익을 보고 A국 노동자들은 손해를 보다. 나머지 요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유무역은 토지가 풍부한 나라의 농민들에게 유리하며, 토지가 부족한 나라의 농민들은 불리하다. 또한 자유무역은 자본이 풍부한 부국의 자본가들에게 유리하며, 빈곤한 나라의 자본가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1870년 이전에 영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자본과 노동력이 풍부하고 토지는 부족했다. 반면 미국은 자본과 노동력은 부족한 반면 토지가 풍부했다. 관세가 전세계적으로 급격히 인상되었고, 특히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관세가 폭등했다. 하지만 운송비가 관세 인상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무역은 더 증가했다.
스톨퍼-새뮤얼슨 정리에 따르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주요 이득을 본 집단은 각국에서 풍부한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영국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미국에서는 지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이들은 무역으로 이익을 봤으며 자유무역을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에서 희소한 요소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즉 영국의 지주와 미국의 노동자 및 자본가는 보호무역을 원했다.
유럽 대륙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자본과 토지가 부족하나 노동력이 풍부했다. 스톨퍼-새뮤얼슨은 1870년 이후 운송비 절감으로 유럽 자본가와 농민이 보호주의를 요구하리라 예상했다.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유럽 농민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곡물법 폐지와 코브던-슈발리에 조약 체결로 시작된 자유무역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실 프랑스는 조약에 불만이 컸다. 민주주의 세력과 농민들은 조약을 독재자 나폴레옹 3세가 일으킨 '왕의 쿠데타'로 간주했다. 1870~1871년의 치욕스러운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이 종언을 고했고, 프랑스의 자유무역 지지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이러한 보호무역론자들의 행보는 곡물을 재배하는 귀족에게만 유리할 뿐 그 이외의 분야에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융커는 수입 가축과 육류에 높은 보호관세를 매겨 북부 독일 소농의 소와 돼지에 방어막을 쳐주면서 소농이 관세를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이웃 덴마크 못지않게 훌륭한 축산업 기술을 보유했으면서도 여전히 가난했던 농민들은 어느 순간 값싼 사료용 곡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음을 깨달았다. 보호무역주의의 '조용한 살인자'(이 경우 원자재의 가격 상승에 따른 국내 산업의 타격)가 강타한 것이다.
1880~1914년에는 관세장벽이 빠르게 높아졌기 때문에 그만큼 세계 무역도 제한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세계 무역량은 오히려 세 배가량 증가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첫째, 증기선의 영향력은 세관보다 강했다. 해상 운송비가 줄어들면서 수입관세 인상분을 만회하고도 남았다. 둘째, 세계가 점점 부유해졌다. 실질 GDP 총액은 34년 동안 네 배가량 증가했다. 모든 상황이 동일하다면 부유해진 사회에서는 교환할 물건이 더 많기에 교역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는 일반적으로 교역량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빠름을 의미한다.
과세품의 평균 관세를 60퍼센트로 인상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정책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포드니-매컴버 관세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뿐이었다.
유럽인과 경제학자들은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미처 통과되기 전부터 공포에 질렸다. 법안이 상원에 도달하자 외국의 외교부 장관들이 미 국무부에 항의를 제기했으며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미국의 모든 경제학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후버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대통령은 스무트-홀리 법안에 서명했고 보복과 무역 전쟁이 시작되었다. 법안은 수만 개 품목에 적용되었는데 마친 모든 교역 상대국을 불쾌하게 만들 목적으로 고안된 듯했다. 수많은 '비관세장벽'도 배치했다.
관세법은 수입 시계에도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특히 미국의 '1달러 시계'와 경쟁하는 저가 시계가 대상이었다. 스위스 노동자 열 명 중 한명은 시계 산업에 종사하거나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시계 관세는 평소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양국 사이에 분노를 일으켰다.
유럽대륙의 강국인 이탈리아,프랑스,독일의 경우 그나마 미국에 일격을 가할 만한 위치에 있었고 미국 산업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자동차와 라디오에 평균 50퍼센트 이상의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다만 무솔리니가 고나세 문제를 실행하도록 몰아가는데 적잖은 노력이 들었다. 자동차 마니아인 무솔로니는 이탈리아 피아트가 만든 형편없는 자동차를 혐오했기 때문에 피아트 대표인 조반니 아그넬리의 보호무역 요구에 몇 년동안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스무트-홀리 관세법의 통과로 무솔리니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그는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관세로 맞대응하여 미국차량의 수입을 거의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자유무역을 외치던 연국도 1932년 대다수의 수입품에 1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다.
1930년 스무트-홀리 법안이 통과되고 3년 만에 전 세계에서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레이스, 스페인의 과일, 캐나다의 목재, 아르헨티나의 소고기, 스위스의 시계, 미국의 자동차는 세계의 부두에서 자취를 감췄다. 1933년 세계는 경제학자들이 경제 자급자족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향해갔다. 각국이 품질을 따지지 않고 모든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여 소비하는 자급자족을 이루려 했다.
미국은 국제 상거래를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는데, 그 반대 움직임 역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34년 호혜통상협정법이 마련되었고, 보호와 경제 자급자족을 향한 반세기의 흐름에도 제동이 걸렸다.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3년이 걸렸으며, 이후에도 의회는 법안을 지속적으로 수정했다.
물론 무역난 속에서도 승자는 있었다. 피아트,캘리포니아의 와인 생산업자, 매사추세츠주 월섬의 시계 제조업자, 독일의 라디오 제조업자 등이 그런 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손해를 입었다. 손해가 어느 정도였을까? 경제적으로 보자면 놀라울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우선 경제성장은 무역을 발생시키는 강한 동력이기 때문에 그 반대 방향으로 보호주의가 세계를 빈곤하게 한다는 주장은 입증하기 어렵다. 1929~1932년 전 세계 실질 GDP는 17퍼센트 하락했으며, 미국에서는 26퍼센트 떨어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제사학자들은 세계와 미국의 GDP급락에서 관세 전쟁이 기여한 정도는 미미하다고 판단한다. 어림잡아 따져봐도 경제사학자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될 당시 무역량은 세계경제 생산량의 9퍼센트에 불과했다. 만약 모든 국제무역이 사라지고 이전에 수출된 제품의 국내 사용이 없다고 가정하면, 세계 GDP는 동일하게 9퍼센트 하락한다. 1930~1933년 세계 무역량은 3분의 1내지 2분의 1 줄었다. 감소량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퍼센트로 달라지지만, 손실은 값비싼 국내 제품으로 보상되었다. 따라서 손실은 세계 GDP의 1~2퍼센트 수준을 넘지 않으며, 대공황 당시 17퍼센트 하락과 큰 격차가 있다.
더 인상적인 대목은,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가장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무역이 GDP의 17퍼센트를 차지하지만 해당 기간 경제는 8퍼센트 후퇴하는데 그쳤다. 반면 미국은 GDP에서 무역의 비중이 4퍼센트에 못 미쳤음에도 대공화 기간 중 경제가 26퍼센트 후퇴했다. 이 대목에서 분명한 결론은 통념과 달리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대공황을 일으켰거나 그 정도를 심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0년대 무역 전쟁이 설사 세계경제에 큰 해악을 끼치지 않았더라도 국제무역은 중단되다시피 했다. 앞서 언급했듯 스무트-홀리 관세가 적용된 기간에 무역이 크게 줄었다. 1914~1944년 세계 무역량은 무려 30년 동안 침체되는 전례없는 모습을 보인 반면, 세계 GDP는 두 차례의 세게 전쟁에도 불구하고 두 배로 증가했다.
교역으로 인한 정치적, 도덕적 유익은 거의 한 세기 전 존 스튜어트 밀이 웅변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상업의 경제적 이득보다 중요한 것은 상업을 통해서 유발되는 지성적, 도덕적 효과이다. 현재와 같이 인간성의 향상이 낮은 상태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비슷하지 않은 인간들, 그리고 자기들에게 익숙한 방식과 다른 사고 및 행도으이 방식과 접촉하도록 하는 일의 가치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중략) 각 민족이 상대방의 부와 번영을 선의로 바라보는 법을 처음 배우는 것이 바로 상업을 통해서이다. 과거에는 세계 전체를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할 만큼 문화적으로 충분히 개명되지 않은 한, 애국자라면 으레 자신의 조국 말고는 다른 모든 나라들이 약하고 가난하며 정치가 잘못되기를 소원했다. 이제 그는 다른 나라의 부와 진보를 보면 곧 자기 나라에 부와 진보를 가져다 줄 직접적 원천으로 여긴다.
20세기 전반 전 세계 애국자들은 세계를 자기 터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큰 고통을 야기했다. 미국은 보호가 보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한 나라에 수입이 없으면 수출도 불가능하다.
또한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에도 무역 전쟁이 실제 전쟁을 촉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고립주의와 보호주의가 대재앙에 기여했음을 감지했다. 역사학자 존 벨 콘들리프는 1940년 선견지명을 드러내는 말을 남겼다. "만약 국제 체제가 회복된다면 팍스 아메리카나를 기초로 한 미국 주도의 체제여야 한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면서 지난 세기에 쌓아 올린 관세장벽을 무너뜨리는 길고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고도로 세계화되고 경제가 여러 국가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근원을 찾는 사람들은 1945년 발간된 [무역 및 고용의 확대를 위한 제언]이라는 미국무부의 보고서와 마주칠 것이다. 이 놀라운 보고서는 전시 미국의 관료 체제에서 작성된 것이나 스미스,리카도,코브던,헐의 정신이 담겨있다.
초안 작성자들은 세계가 특수한 단계에 놓인 상황에서 하나의 행위자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주변 환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으며, 전 세계의 운명은 그 환경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보고서의 첫 문장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힘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국제연합의 승리로 주어진 큰 상이다."에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경제사학자 클레어 윌콕스는 1948년 미국이 경제적 자급자족 지지자에서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의 선도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깔끔하게 요약했다.
제 1차 세게대전 이후 우리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 새로운 대출을 제공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대출을 실행하고 있다. 과거에 우리는 전쟁 수행 자금으로 동맹에게 제공했던 대출을 이자를 쳐서 받으려 했다. 동시에 관세를 신속하고 대대적으로 인상하여 부채 상환이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어렵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무기대여 계정의 전시 잔액을 상각했으며 무역장벽을 낮추는 일에 앞장섰다. 마침내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서의 우리의 위상에 필요한 바를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무역의 중요한 문제, 곧 근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가 '집단행동의 논리'라고 지칭한 문제를 해소했다. 자유무역은 인구 대다수에 적당한 이익을 주지만 특정 산업과 직업의 소수 종사자들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근대 세계화의 역사는 크게 4개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30~1885년으로 운송 및 통신 비용이 빠르게 하락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로 무역량이 크게 장가하며, 임금,지대,임차료,금리가 세계적으로 수렴하던 시대다. 2기는 1885~1930년으로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유럽의 보호무역론자들의 반발을 일으킨 시기다. 운송비가 지속적으로 하락한 덕분에 반발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3기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된 1930년에 시작되었고, 운송 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했으나 대대적인 관세 인상에 그 효과가 묻혔다. 4기는 1945년 시작되었으며, [제언]대로 미국이 앞장서서 자유무역을 주창한 시기로서 세계무역의 수문이 열렸다. 세계무역의 실질 가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후 50년 동안 연간 6.4퍼센트 수준을 기록했다. 1945~1998년 세계 무역량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5퍼센트에서 17.2퍼센트로 증가했다.
전후 무역량의 증가와 동시에 항만 노동자 조합이 증가하면서 선창에서 화차로 화물을 옮겨 싣는 비용은 대양을 건너는 여정 수준으로 상승했다.
정부의 연구 결과에서 화물을 최종 목적지까지 실어 나를 때 비용의 3분의 1이상이 부두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와이를 오가는 화물의 경우 부두 비용이 50퍼센트에 육박했다.(컨테이너 개발 이전)
맥린의 새로운 시스템이 널리 채택되면서 항구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이후 수십 년동안 크게 줄었다. 국제 화물은 1960년 이전 저렴한 수준이었다면 1960년 이후에는 사실상 비용이 없는 수준까지 하락했다. 경제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마찰이 없는' 상태였다. 관세와 운송비 부담이 사라지자 전 세계에서 화물이 보다 자유롭게 운반되었다. 셔츠나 자동차를 좀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나라로 생산이 이전되었다.
운송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자 유럽은 부유해졌다. 유럽 대륙의 새로운 부는 이제 풍부한 요소를 소유한 유럽 자본가들의 이익에 달려 있었다.
유럽공동체가 이른바 공동농업정책에 따라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으나 농업의 쇠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0년 농민들은 유럽 노동력의 35퍼센트를 차지했으나 1980년에는 15퍼센트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주요 정당의 무역 정책이 더 큰 폭으로 변화했다. 나라가 점점 더 부강해지고 자본이 풍부해지면서 전통적으로 자본가의 정당인 공화당은 보호주의에서 자유무역으로 돌아섰다. 반면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는데, 전자는 희소한 요소이고 후자는 풍부한 요소이다. 20세기를 거쳐 노동력의 규모는 커졌으나 농업 인구는 줄었다. 오늘날 농민이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 이처럼 유권자의 구성이 변하자 민주당은 보호주의로 기울었으며 이에 반발한 농민들은 집단으로 당적을 공화당으로 옯겼다.
세계가 부유해질수록 각국의 보호를 받는 식량과 의복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가령 2006년 미국인의 소득에서 식료품 지출이 차지한 비중은 10퍼센트 미만으로, 1929년의 24퍼센트에서 크게 하락했다.)- 앵갤지수와 유사
14.세계화를 둘러싼 논쟁
1999년 1월, 시애틀의 정치 지도자들은 연말에 열리는 WTO 3차 장관급 회의의 개최지로 시애틀 선정.
시위때문에 회의는 조기에 중단되었고 이제 세계의 관심은 글로벌 자유무역의 향방에 쏠렸다. 시애틀에서 벌어진 소동은 세계무역 역사의 새로운 조류를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경제, 이념, 전략의 기준으로 봐도 시애틀의 시위자들은 이전 세기의 반세계화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물건을 나르고 교환하는 본능은 인간 고유의 속성이다. 그 본능을 억압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류는 세계의 바다와 사막을 선박과 낙타로 탐험한 이후 교환할 만한 물건을 싣고 이동했다. 서력기원의 동이 틀 무렵, 문명화된 유럽과 아시아의 양극단에서는 서로가 만든 사치품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물건을 손에 넣기를 갈망했다.
오늘날 세계 교역의 80퍼센트가 선박을 통해 일어나며 대다수 선박은 요충지 일곱 곳 가운데 한 군데, 때로는 두세 군데를 지나기도 한다.
미국의 원유 수입량은 호르무즈 해협의 페르시아만 입구를 통과하는 양과 대략 일치한다. 그보다 양은 적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규모의 원유가 터키 해협, 바브엘만데브, 수에즈 운하, 수메르 파이프라인, 파나마 운하를 지난다. 마지막으로 중동의 해협을 빠져나가 동아시아로 향하는 원유는 대부분 말라카 해협을 지나가야 한다.이러한 항로 중 어느 하나라도 급작스럽게 폐쇄될 경우 세계경제는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1980년 카터 대통령으 연두교서에서 '카터 독트린'으로 알려질 내용을 발표했다.
페르시아만을 장악하려는 외부 세력의 모든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러한 공격은 군사행동을 포함한 모든 수단으로 저지될 것이다.
세계 무역체제는 수에즈 운하, 호르무즈 해협, 바브엘만데브라는 요충지 세 곳에서 가장 취약하다. 이 지역은 서양에 적대적인 국가와 비국가 단체들이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잇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로에도 문제는 있다.
극동의 일본,한국,중국으로 향하는 원유는 말라카 해협을 지나는데, 이 지역은 해적과 자말 이슬라미야 같은 테러 집단이 활동하고 해안선을 국경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3국이 준설 비용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미국의 7함대가 해협을 순찰하고 있으나, 중동과 유럽으로 향하는 원유와 상품 통제에 중국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향후 미-중 갈등이 벌어질 가능성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북서항로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10~20년 안에 연중 항해가 가능한 지역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상업적 해로로 이용할 가능성에 대해 캐나다와 미국 정부가 향후 활발한 토론을 벌일 전망이다. 북서항로가 개방된 후 지구의 기온이 추가로 상승하면, 동아시아에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으로 이동할 때 베링 해협을 거쳐 북극 지역을 이용하는 경로가 활용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현재 수에즈를 거쳐 가는 경로보다 거리가 3분의 1 단축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극지 횡단 경로가 현실로 다가오면 베링 해협의 통제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 간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유무역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무역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과장해왔다. 19세기 역사는 무역이 성장의 엔진이라는 주장에 의문부호를 던진다. 만약 자유무역이 국부를 창출하는 길이었다면 역사상 최고 수준의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절대 번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은 관세 인하의 '황금기'인 1860~1880년의 성장률이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던 1880~1900년보다 더 높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호무역주의 기간의 성장률이 더 높았다. 또한 보호무역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 유럽의 경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영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케빈 오루크도 19세기 유럽의 부유한 8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에 대해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관세 수준과 경제 성장률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세율이 높을수록 나라가 더 나은 성과를 낸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의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19세기 관세와 성장률이 양의 상관관계에 있었다는 베어록의 가정은 성장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통제한 상황에서 최근에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에 적용했을 때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19세기 관세 인상이 이로웠다는데 동의하지 않는 무역 역사학자들도 있다. 보호무역주의는 뉴잉글랜드 기업인들이 영국의 최첨단 증기선과 산업 기술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지연시켰다고 지적했다. 관세 인하가 기존 뉴잉글랜드 공장을 황페화했을 것이라는 빌스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번영을 누리고 자본 집약적인 '첨단' 산업 부문을 육성하는 사뭇 다른 결말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들롱은 주장했다.
하지만 1945년 이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1950~1960년 GATT관세 인하는 북부 유럽의 성장률을 1퍼센트 정도 추가하는 데 그쳤으며 미국에는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자유무역주의를 채택한 빈곤한 국가가 부유한 국가를 따라잡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지리적 요인도 기여했다. 규모가 크고 경제적으로 다양성이 높은 나라일수록 자립도 수준이 높고 무역의 중요성이 떨어졌다. 미국은 독립 이후 세계의 주요국 가운데 자급자족에 가장 가까웠다.
19세기에 미국처럼 규모가 크고 자립적인 국가는 보호무역주의로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세계가 긴밀하게 엮여 있는 21세기에는 경제 자급자족 상태가 훨씬 더 위험한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피해는 대부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자유무역으로 주어지는 보이지 않는 보상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점차 덜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주된 원인은 이웃이 죽기보다는 살 때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은 인류에게 전반적으로 이익을 안겨줬으나 패배자들을 양산했다. 앞으로 경제 번영, 관세 인하, 운송비 하락에 따른 세계무역의 확대는 더 많은 승자들을 탄생시키는 동시에 패배자들의 증가로도 이어질 것이다. 패배자들을 공정하고 온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벌어질 수 있다.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이번에도 적합한 틀을 제공한다. 이번에는 두세 가지 생산요소가 아닌 노동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 고려하여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집단에 대해 살펴보자. 선진국은 전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 노동자가 풍부하고 비숙련 노동자가 적다.
선진국에서는 누가 자유무역으로 손해를 볼까? 상대적으로 희소한 요소에 속하는 비숙련 노동자이며, 이익은 숙련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또한 세계화는 부유한 국가에서 빈부 격차를 확대한다. 인플레를 감안한 소득은 숙련 노동자의 경우 빠르게 증가하는 반면, 비숙련 노동자는 천천히 증가하거나 하락한다.
문제는 불균형과 불안정성의 증가가 자유무역 대문에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피해가 아웃소싱과 공장 해외 이전으로 발생하고, 얼마나 많은 부분이 고도로 훈련되고 교육받은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 상승분 때문인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인다. 농장 일꾼 두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한 사람이 밀을 수확하는 효율성은 99.5퍼센트이고 다른 사람은 95퍼센트다. 첫 번째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겠지만 그 격차는 크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100가지 제조 공정이 필요한 복잡한 마이크로칩을 생산하는 공장을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각 단계를 99.5퍼센트의 정확도로 완료하는 노동자는 불량률이 39퍼센트인 반면, 각 단계별로 95퍼센트인 노동자는 불량률이 99.4퍼센트로 치솟는다. 따라서 선진 제조와 서비스 경제에서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가 비숙련 노동자보다 많은 임금 프리미엄을 받는다.
폴 크루그먼은 미국에서 점차 커지는 임금 불균형은 대부분 숙련도 프리미엄의 증가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제학자 에이드리언 우드의 데이터는 불균형의 주요 원인이 국제무역의 증가에 있음을 가리킨다. 아마 두 학자의 주장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임금 격차 확대에서 5분의 1 내지 4분의 1은 무역 때문이며, 나머지는 부유층을 겨냥한 세금 인하와 국내 교육 및 훈련에 대한 보상 증가 때문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자유무역으로 낙오된 사람들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혹은 보상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했다. 1825년 존 스튜어트 밀은 곡물법으로 지주들이 추가적인 이익을 보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곡물법은 국가 차원에서 훨씬 더 큰 비용을 발생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주를 매수하는 편이 비요을 줄일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 패배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패배자에게 직접 보상해주는 편이 비용도 훨씬 더 들고 낫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GDP의 절반가량을 차지했으나, 이후 이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지금은 세계 GDP의 4분의 1에도 못미친다. 만약 1945년에 미국이 10년 전 코델 헐이 처음 열었던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면 세계의 부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상황이 유지됐을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세계경제라는 파이가 지금보다 훨씬 작고 변질된 상태였으리라는 점이다. 1900년에는 브리타니아 가 파도를 다스렸지만, 오늘날 영국은 미국의 패권에 밀려 조연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 중에 현재의 영국이 아닌 1900년의 영구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새뮤얼슨의 설명은 이어진다.
국가가 선택적인 보호무역주의를 도입하거나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유무역의 세계에서 점점 진화하는 비교 우위라는 룰렛 휠로 진정한 해악을 분배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자기 방어 차원에서 시도하는 조치가 쓸데없이 제 발을 쏘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관세장벽을 세우면 그 결과로 산업이 침체를 겪는다고 새뮤얼슨은 주장한다. 산업을 보호하기보다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것이다. 그렇더라도 새뮤얼슨은 대다수 국민의 형편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고통 당하는 요소를 매수하는' 능력을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때때로 보호무역주의는 자유무역을 향한 움직임을 뒤엎으려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선진국과 개도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유무역의 진정한 대안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인류가 수메르에서 시애틀까지 무역 탐험을 수행하면서 전혀 좋아진 바가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흐름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20세기 인류가 겪었던 가장 암울한 사건을 재연할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 항해한 해협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을 모래톱이라는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