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역에 대한 물건을 생산하고 교환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어마어마했다. 기원전에 이미 장거리 무역을 시작했고, 필요한 곡물이나 자원을 무역을 통해 구해왔다. 보호주의와 자유무역의 싸움은 지속적으로 벌어져 왔고, 지금의 보호주의무역의 물결은 또 그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화는 끝이고 이제 반세계화의 시대라는 말들은 전형적인 단기적인 시각일 뿐이다.
중국에서 로마까지 실크가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무척 더디고 위험하며 구간마다 고난이 기다리는 여정을 거쳤을 것이다. 중국 나부 항구의 상인들은 인도차이나를 따라 내려가 말레이반도와 뱅골만을 돌아 스리랑카의 항구에 닿는 오랜 여행을 떠나면서 실크에 배를 실었다. 스리랑카에서 만난 인도 상인은 이 실크를 인도 남서부 해안의 타밀 항국인 무지리스, 넬신다, 코마라 등으로 운반했다. 거기서는 다시 그리스와 아랍 중개인이 디오스코디아섬까지 실크를 옮겼다. 아랍,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 에티오피아 상인들이 한데 어우러진 용광로와 같은 지역이었다. 디오스코디아에서 그리스 선박에 실린 화물은 바브엘만데브의 홍해 입구를 통해 주요 항구인 이집트의 베레니스까지 이동했다. 이어 낙타로 사막을 건너 나일강까지 이동했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하류의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하면, 마침내 그리스와 이탈리아 로마 선박이 화물을 지중해 건너 로마의 거대한 종착지인 푸테올리와 오스티아로 가져갔다. 일반적으로 중국인은 스리랑카 서쪽을, 인도인은 홍해 어귀의 북부를, 이탈리아인은 알렉산드리아의 남부를 넘어 탐험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인들만이 인도부터 이탈리아까지 자유롭게 다니면서 큰 화물을 운송할 뿐이었다.
여정의 각 단계마다 길고 위험한 순간이 이어졌으며, 실크는 여러 사람을 거칠수록 값이 비싸졌다. 중국에서도 값비싼 제품이었지만 로마에 도착하면 원래보다 백배나 비싸졌다.
계절마다 불어오는 계절풍은 실크 교역을 촉진했다. 계절풍을 이용해 이동할 경우 중국 남부를 떠난 실크가 이탈리아의 오스티아나 푸테올리에 도착할 때까지 적어도 18개월이 걸렸다. 아라비아해와 벵골만의 위험 지대를 비롯해 각 지역마다 치명적인 문제가 상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명,선박,화물을 잃을 위험은 상존했기에, 비극이 발생하더라도 "모두가 침몰했다." 정도로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보통이였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도 무척 고달팠다. 상인들은 사업 계약을 하러 외국으로 나갈 때 소개장이나 이동 경로에 위치한 현지 통치자가 발급한 통행증 없이는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관련 문서가 없으면 강도나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모든 여행자에게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기본적 위생은 제쳐두고도 선장과 선원 자체가 위험 요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강도와 살인은 배에서 흔한 일이었으며, 상선은 부패한 정부 관료들에게 특히 손쉬운 목표물이었다. 나일강의 한 상인은 분명 항구를 떠나기 전 관료에게 '인두세'를 지불했으나 동일한 관료가 갈취하러 또 찾아오지 않을까 의심해야 했던 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중세 시대의 항해가 비용이 많이 들고 불쾌한 일이었다 해도 상인들은 육로보다 바닷길을 선호했다.
차라리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갑판에서 여러 주를 보내는 것이 당나귀나 낙타에 올라 망을 보며 몇 달을 이동하는 것보다 나았다.
상인들이 운 좋게도 화물과 사람 모두 무사히 여정을 마치더라도 변덕스러운 시장 때문에 쓴맛을 볼 수도 있었다. 가격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가격은 어떤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혹은 "가격은 신의 손에 달려 있다." 같은 경고가 종종 회자되었다. 그렇다면 상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따뜻한 가정을 몇 년이나 떠나서 목숨과 재산을 걸고 여행을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상인들의 삶이 아무리 암울해도 근근히 먹고사는 인구 90퍼센트의 농민들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운반하고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교환한다"라고 지적했다.
유럽의 교역 지배에 앞장선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등 국가 차원에서 운영되던 거대한 무역 기관이었다. 이들은 국제무역을 대형 기관의 전유물로 만들었으며, 20세기에는 다국적기업이 이를 이어 받았다. 다국적기업은 오늘날 서양, 특히 미국의 문화와 경제 지배의 원천으로서 강한 분노와 반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근대 다국적 대기업을 뿌리는 무엇이며, 오늘날 만연한 반미주의와 교역에 관련된 문화적 갈등은 새로운 현상인가?
세계가 교역의 지속적 흐름에 점점 더 의존하면서 우리는 번영을 누리는 동시에 취약해졌다. 만약 인터넷에 중대한 장애가 발생한다면 국제경제에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인터넷이 널리 사용된 지 불과 수십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놀라운 현상이다. 선진국은 세계의 가장 불안정한 지역에서 채굴하는 화석연료에 중독되고 있다. 게다가 화석연료 운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로는 페르시아만 입구를 지키는 좁은 해협을 통과해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20세기의 통신과 교통 혁신을 통해 처음으로 전 세계가 다른 나라와 직접적인 경쟁에 노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안정적인 국가는 무역 활동을 한다. 로마와 동아시아 사이의 교역은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활성화되었으며, 이후 200년 동안 지중해와 홍해 무역로에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세계화'는 단편적인 하나 혹은 여러 사건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전개된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인터넷의 발명과 교역으로 어느 순간 갑자기 '평평해진' 것이 아니며, 20세기 말 무역도 갑작스럽게 세계적 영향력을 거머쥔 대기업이 지배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의 여명기는 값비싼 화물 위주로 운반되다가 점차 저렴하고 부피가 크며 쉽게 상할 수 있는 제품으로 그 대상이 확대되고, 이 과정에서 구세계의 시장은 점차 통합되었다. 유럽인이 최초로 신세계를 탐험한 이후 세계를 빠르게 통합되었다. 오늘날의 거대한 컨테이너선, 제트기, 인터넷, 세계화된 공급과 제조망은 지난 5000년 동안 이어진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살펴보면 급변하는 국제무역의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메소포타미아의 초기 교역
'헬멧'은 가죽으로 만든 머리 덮게에 약 3밀리미터 두께의 신기한 주황색 금속을 덮은 형태였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평탄한 충적지에서는 구리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농경민들은 이전에 구리를 본 적이 없었다. 유목 부족도 서쪽 방향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시나이 사막에서 생산된 구리를 사막 주변에 거주하는 상인들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메르 농민들도 자체적으로 구리를 확보하기 시작했고, 메이스 끝에 뾰족한 모양의 구리를 붙인 치명적 무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더 두꺼운 투구를 만들어 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렇게 인류의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고, 무역을 통해 얻은 희귀 금속으로 무장하는 행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석기시대 어느 시점에선가 한 천재적 인물은 수면에서 사냥하는 일이 뭍에서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는 1만 5000년전 북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불과 20만 제곱미터의 지역에 5000명 정도가 거주한 것으로 추산하는데, 이러한 인구 규모는 농경 배후지에서 지원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정도다. 기원전 2800년경 소형 선박에 보리 수 톤을 싣고 페르시아만을 건너 딜문과 마간으로 갔다는 설형문자 기록도 남아 있다. 기원전 2000년쯤에는 화물선 규모가 곡물 수백 톤을 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지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지역에 원유를 의존해야 하는 현실을 불안하게 여긴다. 그런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고통은 이보다 더했다. 하천 사이의 평평한 충적지에 수자원과 토양이 집중되었고 이 제한 된 지역에서 보리, 밀, 어류, 양모가 주로 생산됐다. 하지만 고대 문명의 요람에는 당대의 전략물자라 할 수 있는 금속, 대형 목재, 건축용 석재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위대한 메소포타미아 민족들의 명운은 식량 잉여분을 오만과 시나이의 금속, 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의 화강암과 대리석, 레바논의 목재와 어떻게 교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청동기시대에는 구리가 귀했기 때문에 소, 곡물과 더불어 교역품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경 구리 공급이 증가하면서 가치도 하락했다. 그러자 구리 대신 은이 교환 수단, 즉 오늘날 '화폐'라고 일컫는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화폐가 없다면 서로 대응하는 물건끼리 맞바꾸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열 가지 물건이 있다면 경우의 수가 45가지 발생한다. 반면 은화를 보편적으로 활용하면 하나의 물건에 한 가지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에 총 10종의 가격이 존재할 뿐이다. 게다가 소 한 마리의 가치를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닭 50마리 또는 55마리로 결정하는 환경에서는 대규모 거래가 성립될 수 없다.
수메르나 이집트 모두 초기에는 관료와 사제가 교역을 주도했다. 그런데 수메르의 경우 기원전 2000년에 접어들면서 민간인이 교역의 대부분을 넘겨받은 반면, 이집트에서는 정부가 교역을 계속 주도했다.
당시의 교역을 엿보게 하는 흥미로운 단서가 많은데,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다수의 인장은 인더스강에서 흔히 사용되던 종류다. 동물의 머리 모양을 한 핀은 원래 메소포타미아에서 생산된 것이지만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도 출토된다.
이집트 왕조가 쇠락하자 페니키아 인이 홍해 무역을 장악했다. 가나안 해상 민족의 먼 친척뻘인 페니키아인은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에 정착했다. 새로 정착한 땅에는 목재가 풍부했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위치한다는 전략적 이점까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민족 가운데 페니키아인처럼 해로로 물건을 거래하는 데 뛰어난 민족은 없었다. 이후 1000년 동안 페니키아인은 동지중해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페니키아인은 최초로 장거리 '직접'무역에 종사한 민족일 것이다.
기원전 400년 페니키아인은 유럽 서부의 해안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동쪽과 서쪽 해안을 훤히 꿰고 있었다.
페니키아인의 선박 건조에서 핵심 기술은 선체를 삼나무 판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을 확보한 이집트인은 홍해를 거쳐 인도양가지 탐험했고, 정기적으로 인도까지 왕래하는 대양 교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집트인의 항해에서 우선순위는 교역보다는 '고대 세계의 탱크' 코끼리를 에티오피에서 데려오는 데 있었다.
이집트의 그리스계 항해사 히팔루스가 바로 이 계절풍을 이용한 덕분에, 그리스 상인들은 바브엘만데브에서 인도까지 불과 몇 주만에 아라비아해를 건널 수 있었다. 그 결과 소코트라와 말라바르 항구처럼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지는 대규모 도시가 번성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권좌에 오르면서 향후 200년 가까이 지속된 팍스 로마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대의 장거리 교역이 성행하는 안정적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리스 선박을 통해 대량 반입된 후추는 로마인이 먹는 지중해의 단조로운 밀과 보리 요리에 풍미를 더했다.
2.그리스 교역 해협을 누가 장악하는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교역의 역사와 무슨 연관성이 있겠냐 싶겠지만 사실은 연관성이 크다.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지배를 추구한 이유는 가장 기초적 상품인 곡물을 거래하는 일, 그리고 서구 문명에서 그리스라는 요람이 위치한 특유의 지리적 환경과 직접적 연관이 있었다. 서양 문화의 문화적, 제도적 기초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마련되었듯, 중요한 해상 교통로와 전략적 해상 요충지를 장악하려는 현대 서양의 집착은 곡물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그리스만의 농업적, 지리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영구과 미국에게 세계의 대양 항로를 차지하도록 충동질한 요인은 과거에 그리스가 식량을 수입 밀과 보리로 충당하던 시절에 처음 나타났다.
우리 시대의 최강대국이 중동의 전장에서 수렁에 빠지자, 사람들이 고대 시대에 일어난 갈등에 점점 더 관심을 갖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주요 외교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주요 인물들과 연관 짓기란 어렵지 않다.
에게해 지도를 잠시 들여다보면 많은 상황이 설명된다. 그리스의 해안선은 매우 복잡하며 섬, 반도, 작은 만, 내포, 해협이 상당히 많다. 이처럼 지형이 복잡한 데다 산악 지형이 주를 이루다 보니 대다수의 교역이 바다를 거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 농가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자급자족에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빈약했다. 반면 와인과 올리브유는 풍부하게 났기 때문에 외부에서 생산된 밀, 보리와 교환할 수 있었다.
아테네인의 생존은 지구상에서 가장 취약한 공급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희소한 곡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진 데다 지리적 환경이 분열되어 있다 보니 두 집단이 각축전을 벌이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한편은 아테네가, 나머지는 스파르타가 맹주였다.
외유내강의 아테네가 어떻게 이런 재주를 부렸는지를 살피다 보면, 오늘날 미국 독자들은 불편할 정도로 익숙한 레퍼토리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테네는 에게해와 흑해의 동맹 국가를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리스 정착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돌려달라며 만용을 부리던 지역 '야만인'의 공격에서 막아줬다. 그 대가로 동맹국은 아테네에 공물을 바치고, 피레우스 항으로 향하는 곡물에 수출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에게해 항로를 장악한 아테네는 스파르타, 코린토스, 메가라 같은 적에게는 반대로 불이익을 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메가라로 오가는 항해를 차단하기 위해 코린트만으로 가는 서쪽의 좁은 입구에 위치한 나우팍투스에 기지를 건설했다. 아테네는 정치와 군사적 영향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로도스(오늘날 터키의 남서 해안), 에게해 서부의 키오스섬, 레스보스섬 등 주저하던 동맹과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곡물 가격을 조절할 수 있었으며, 곡물 공급이 차단되거나 전염병이 돌 때를 대비해 비축하기도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수백 년동안 아테네는 서양의 노쇠한 제국이 세계적 강대국에서 야외 테마파크로 전락하여 오로지 예술, 건축, 학파, 과거 유산만으로 인정받게 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수많은 제국이 아테네의 전철을 밟았다.
그리스가 서양 문명의 요람이라면, 그리스 특유의 전략적 지리 요소는 해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양의 해군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베네치아, 네덜란드, 잉글랜드는 각각 13세기, 17세기, 19세기판 아테네였다고 할 수 있다.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집이 커지자 번영과 생존이 해로와 머나먼 카테가트, 영국 해협, 수에즈, 아덴, 지브롤터, 말라카,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같은 전략적 요충지의 장악 여부에 달려 있었다.
3.대상의 길. 낙타와 선지자
신흥 종교의 전설은 사막 아랍인의 조상으로서 변두리의 오아시스 작은 땅에서 일하던 정착 농경민에게서 시작된다.
암울한 유목 생활에도 이점은 있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정복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멸망 이후 서쪽에서는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양대 포식자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각각 트라야누스와 다리우스 시대의 영광을 되찾기를 원했다.
생사를 건 대립이 계속되는 사이 양강은 남쪽의 메마른 사막에 머물던 세력을 등한시했다. 이에 아랍 지역은 외따로 떨어져 독립을 누렸지만한 지역만은 예외였다. 바로 계절풍의 영향을 받고 토양이 비옥하며 향료를 생산하던 행복한 아라비아였다. 고대판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할 만한 패권 경쟁에서 행복한 아라비아는 운 나쁘게도 노리개로 전락했다.
세계의 주요 종교 가운데 상인이 창시한 종교는 이슬람교가 유일하다.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문서에는 상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코란의 유명한 구절도 마찬가지다. "믿는 신앙인들이여 너희들 가운데 너희들의 재산을 부정하게 삼키지 말라, 서로가 합의한 교역에 의해야 되니라." 교역과 상업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무함마드의 일화를 모은 하디스에 나오는데, 교역 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을 준다. "핫즈 기간 중 교역 행위가 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는 자와 파는 자는 갈라서지 않거나 갈라서기 전까지는 거래를 취소하거나 확인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들이 진실을 말하고 서로에게 물건의 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거래에 축복이 임할 것이나, 숨기는 것이 있고 거짓을 말한다면 거래의 축복은 사라진다."
무슬림 군대는 먼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듭 공략했으며, 751년 탈라스(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당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뒀다. 극적인 정복은 종종 놀라운 행운을 안겨주기도 한다. 탈라스에서 무슬림이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영토도 실크도 아닌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자원이었다. 탈라스에 억류되어 있던 중국인 죄수 가운데 제지업자가 있었고, 이들은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 놀라운 기술을 전파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초기에 무슬림 정복자들은 기본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재현했는데 규모가 그보다 컸다.
더이상 아시아로 향하는 세 가지 주요 경로, 즉 홍해와 페르시아만, 실크로드가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물류 체계가 통합되었고,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세력은 누구나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4.상인들의 종교. 범이슬람 상권의 등장
7세기에 중국인은 이미 많은 중동 상인들을 만났던 터라 항구로 쏟아져 들어오던 무슬림을 구별할 줄 알았다. 파사(페르시아)사람들은 긴 형태의 페르시아만에서 해양 강국의 전통을 쌓았으며, 내륙의 대식(아랍)에서 온 사람들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또한 중국인은 이슬람 세계를 더 멀고 신비로운 '불름(비잔틴제국)'과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알았다. 당시 비잔틴은 경이로운 원석과 율를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오늘날 사회보장제도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중구과 인도 여행기>에 설명된 중국의 세제, 노인 연금 체계를 참고할 만하다.
[세금]은 개인이 보유한 부와 토지를 기반으로 징수되었다. 누구라도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관청에 등록했다. 18세가 되면 인두세를 부과했고 80세에 이르면 더 이상 징수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국고에서 [연금]을 지급했다. 중국인은 "젊을 때 세금을 거둬들였으니 늙었을 때 급여를 지급한다"라고 말한다.
기상천외한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인도양에서 있었던 중세 교역을 묘사하는 소품문이 동장한다. 책에는 당시 상인들과 선원들이 난파를 무척 경계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거의 모든 이야기에 난파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가는 여행은 위험천만했고 무려 일곱 번이나 항해를 다녀온 성장이 있다는 이야기에 저자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선장 이전에는 누구도 사고 없이 항해에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살아서 중국까지 도착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인데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기까지 하다니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신드바드의 모험은 사실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설정 면에서 상당 부분 [인도의 경이]와 유사하다. 두 작품을 모두 접한 독자들은 신드바드 전설이 먼저 기록된 [인도의 경이]에서 많은 부분을 빌려 왔거나 동일한 구전에 근거한다고 여길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도양에서 상인과 선원의 차이는 백지장 수준에 불과했다. 선원 중에서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역 물품을 운반하여 생계를 꾸렸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모험을 떠났을까? 애덤 스미스의 지적대로라면, 거래하고 물물교환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중세의 충직한 무슬림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이는 "여러 인종이 모인 사회와 교역, 이익을 향한" 욕망이며 바그다드와 광저우를 오가는 항로에서 일어나는 로멘스와 모험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마침내 바투타는 델리에 도착했다. 금융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신용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델리에서 활동하던 많은 기업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무함마드 투글루크의 환심을 사야 했다. 그러려면 호화로운 선물을 바쳐야 했고, 왕은 훨씬 더 가치 있는 보상을 베풀어 선물 바친 이가 궁정에 재정적으로 더 큰 이해관계를 갖도록 만들었다. 평범한 사람은 왕에게 바칠 값비싼 선물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진취적 계획을 품은 탄원자들은 대부분 대출을 활용했다.
중국과 인도의 상인들은 새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수천 디나르를 빌려주고 선물로 바치려는 물건이 무엇이든 구해줬다. 채권자들은 자금뿐 아니라 자기 사람들도 빌려주고선 수행원처럼 채무자 앞에 서 있게 했다. 술탄 앞에 선 탄원자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아 와서 채권자에게 빚을 갚았다. 이런 거래가 번창했고, 막대한 이익이 남았다.
탄원자가 그 순간에 원하는 바를 이루더라도, 일단 궁정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지면 신용이 내리막길을 걷기 십상이었다.
중국의 수준 높은 선박에 비하면, 전통적으로 인도양을 누비던 다우선은 한 겹이 선체를 코코넛 섬유로 이은 조악한 형태였다.
한 서구인은 다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대한 골풀 바구니와 같으며 쇠를 쓰지 않아 투박하고 틈새를 잇는 작없도 없다. 마치 노끈으로 천을 잇듯 배를 만들었다. 노끈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실제로 틈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에 나가려면 해마다 배를 수리해야 했다. 방향타는 탁자의 표면처럼 조잡했고, 방향을 바꾸는 작업은 몹시 고생스러웠다. 게다가 바람이 세게 불면 방향을 바꿀 도리가 없었다.
크기가 웅장했고, 선체에는 선실이 100개가 넘으며, 순풍이 불 때는 돛을 열 개를 펼쳤다. 돛은 장대했으며, 지지물의 두께가 세 종류였다. 가장 두꺼운 것은 우리 선박에 들어가는 지지물과 동일했으며 두 번째는 옆으로, 세 번째는 아래 방향으로 놨다. 정말이지 무척 튼튼한 배였다.
중국이 해양 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상인들이 말라카 서부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중국은 단지 1405~1433년에만 인도양에서 위력을 과시했을 뿐이다. 상인들은 기를 펴지 못한 이유는 유교에서 상업을 천시하고, 가장 뛰어나고 야심 찬 인재들을 교역보다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관료 사회에 집중시킨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중국(과 훗날의 일본)의 중앙집권적 정치 구조는 외세와의 접촉을 신속히 차단할 수 있었다.
반면 고도로 분권화된 중세 인도양 교역에서는 다원식 경쟁이 벌어졌다.
이와 유사하게 유럽의 정치 환경을 살펴보면 지형적으로 산과 강이 많아 수천 개로 쪼개진 국가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에게 유리했다. 그중 하나인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역사에 따르면 정화가 이끄는 중국의 거대 보선은 1405~1433년에 일곱 번 항해를 떠났다. 하지만 항해는 팽창주의를 추구하던 주체, 곧 영락제의 원대한 계획에서 시도되었다가 결국에는 유학자와 환관 사이의 해묵은 적대감에 희생되고 말았다.
-뛰어난 인재들이 있어도 그들 열정의 방향을 사회에서 잘못 잡아주면.. 거기다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정치적인 문제로 좌절하게 된 수많은 경우 중 하나.
중국에서는 불과 몇 세대 만에 함대와 상선이 고사해버렸다. 1500년 황제는 돛이 둘 이상인 선박을 건조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고 명했다. 1525년에는 아예 바다로 나가는 '모든' 선박의 건조를 금지했다.
오늘날 중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정화의 원정이 중국 외교의 따뜻하고 비공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정화의 원정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당시 원정대는 황제의 권위에 어울리는 경의를 표현하지 않는 현지인을 납치하고 도륙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차 원정 당시 정화는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을 5000명 이상 살상했다. 해적의 우두머리는 활제에게 올리는 선물로 중국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바스코 다 가마와 정화의 활동 시기는 불과 65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만약 인도양으로 진출한 최초의 유럽인의 보선을 마주쳤으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보선을 지원하는 가장 작은 정크조차 포르투갈의 초라한 범선을 위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컸다. 포르투갈은 다행스럽게도 역사의 변덕 덕분에 수치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을 항해할 당시에는 그를 물리칠 능력이 있는 세력이 마침 자리를 비운 뒤였다.
동남아시아에서 개종이 일어나기에 앞서 무슬림 상업이 번창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독교와 동방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학이 뒷받침하지만, 이슬람의 근간은 상업을 비롯해 모든 분야를 다루는 법체계에 있었다. 따라서 아라비아의 신흥 일신교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던 영국의 관습법처럼 객관적 당사자에 의해 강제되든 관계없이 조직적인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슬람 개종은 신용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일반 대중은 이웃의 무슬림 상인들이 누리는 부와 경건함에 감명을 받고 이슬람의 길을 따랐다.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개종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정복 활동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5.중세 향료 교역과 노예 교역
유럽인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탐나는 향신료와 교환할 상품을 생산했는가? 그럴 만한 상품이 없지는 않았다. 당시 군사를 탐욕스럽게 모집하던 무슬림 군대에게 노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1200~1500년경 이탈리아 상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노예 상인들이었으며, 흑해의 동부 해안에서 사람을 사서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팔아 넘겼다.
역사학자들은 희귀한 향신료가 약효 때문에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해석했다. 예를 들어 한 역사학자는 중세 프랑스의 향신료 상점과 19세기 미국의 약국에서 파는 물건이 거의 비슷했다고 지적했다.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위풍당당하게 메카로 돌아온 직후 이슬람 세력은 바브엘만데브를 차단해버렸다. 그리스 선박은 더 이상 온난하고 소용돌이치는 남서 계절풍을 타고 동쪽의 인도 서고츠산맥을 향해 항해할 수 없었다. 후추는 여전히 무슬림의 손을 거쳐 서쪽으로 유입되었으나 동양의 지식은 더 이상 접할 방법이 없었다.
무함마드가 승리를 거둔 시점과 ,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오는 시점 사이에 해당하는 9세기에 유럽인은 인도양에 배를 띄울 수 없었다. - 어떻게든 인간의 욕망은 방법을 찾는다...
향료의 일부분은 육로를 거쳐 왔지만, 실크로드는 서로 전쟁을 벌이던 부족과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실크로드가 인도양과 경쟁하려면 경로 전체에서 정치가 안정되어야 했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은 13~14세기 몽골의 통치 기간 중 잠시나마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해양 교역과 해양 세력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몽골 칸들은 장거리 이동 때 페르시아 고원을 거쳐 페르시아만의 타브리즈까지 이동한 다음 선박으로 중국과 향료 제도에 접근하는 방식을 주로 활용했다.
무슬림이 유럽인보다 상업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9~10세기 지중해에서 무슬림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지만 살레르노, 아말피, 베네치아를 출발한 이탈리아 선박은 무슬림이 장악하고 있던 세계 교역에 처음으로 의미있는 반기를 들었다. 기원후 첫 밀레니엄이 막을 내릴 즈음 유럽은 점점 부강해졌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이끄는 이탈리역아는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티레에서 서양의 물품을 향료와 교환했다. 또한 서양이 레반트에서 무슬림 손아귀에 있던 장거리 교역을 빼앗아 오면서 향후 교역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1072~1091년에는 노르만족이 팔레르모, 몰타, 시칠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급격히 퍼져 나갔고 스페인은 톨레도를 탈환했다. 이와같은 승리에 힘입어 기독교인은 대담해졌으며,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일으켰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했고, 여기서 기독교 국가의 통치자들은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성안에 있던 무슬림,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남녀와 어린이 대부분을 살육하며 성스러운 임무를 완성했다.
4차 십자군의 암울한 역사는 서양의 성지 탈환 시도가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잇속을 얼마나 채워줬는지, 당대에 가장 집중적으로 거래되던 향료와 노예라는 상품의 쌍무 무역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이 시점에 인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엔리코 단돌로다. 1193년 베네치아의 도제에 선출되었을 당시 단돌로는 약 80세 나이에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단돌로는 아드리아해의 자다르를 점령할 계획도 품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가장 부유한 교역 상대국인 이집트를 침공하는 계획이야말로 단돌로가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단돌로는 부두에서 대기하고 있던 십자군에게 진짜 행선지가 어디인지 흘렸다. 배가 성지로 향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크인 군사들 상당수가 집단으로 이탈했고, 약속한 승선일에 배에 오른 군사는 3분의 1에 불과했다.
어쨋든 갤리선은 1202년 11월에 출항했고, 십자군은 추가로 보상을 받는 대신 자다르를 약탈하기로 합의했다. 자디르를 점령하자마자 단돌로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받았다. 필리프 폰 슈바벤왕은 비잔틴에서 축출된 황제이자 장인인 이사키오스 앙겔루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면 이집트 원정의 나머지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제안했다.
단돌로의 계획대로 4차 십자군은 성지를 밟지 못했으며 베네치아와 이집트의 교역 관계도 유지되었다. 90세가 된 눈먼 노인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거래였다.
베네치아와 이집트 간 교역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슬람 특유의 맘루크 노예제는 중세 무슬림 세계의 군사, 인구, 정치적 필요와 더불어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중세와 고대의 맘루크 제대는 대개 백인 노예를 토대로 했다.
맘루크 제도의 권위 있는 학자인 데이비드 아얄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술탄이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준 맘루크는 술탄의 주요 지지 세력을 구성했다. 맘루크 노예제는 맘루크에게 주인이자 해방자를 향한 강한 충성심을 심어주는 한편 다른 노예들에게도 유대가믈 느끼게 만들었다. 술탄과 그의 맘루크들은 강한 연대감으로 하나가 되어 끈끈한 집단을 형성했다. 술탄과 맘루크는 말하자면 쌍방향 관계였다. 맘루크는 술탄이 지배하는 동안 권력을 누릴 수 있었고, 술탄의 권력은 맘루크에서 나왔다.
해방 노예들은 군에서 고위 지휘관의 지위까지 올랐고 이내 술탄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권력이 주는 특혜와 호사를 누리는 사이 가장 뛰어난 맘루크들은 군인으로서의 자질과 기술을 서서히 잃어갔다. 한두 세대 만에 주변부 체르케스와 이집트 훈련소에서 도착한 굶주린 노예 병사들이 유약하고 나태한 주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았다. 새로운 맘루크 술탄은 이전 술탄의 군대, 이른바 '로열 맘루크'의 최고위층을 제거한 뒤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된 것이다. 권력 집단이 대체되는 작업은 빠르거나 완만하게 진행됐고 무력을 사용하거나 보상을 활용했다. 어떤 경우든 축출된 맘루크 여러 세대가 민간과 군대의 하위 계급에 공존하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맘루크 사이에서 현재 술탄이 자신들이 은혜를 베푼 덕분에 권력을 잡고 있다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전체 시스템이 부패했다. 파이프스는 "군사들은 통치자가 자신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기며 그저 결정권자로만 인정했다."라고 지적했다. 오래지 않아 술탄은 '옛 친구들'에게 압박을 느꼈고 '새 친구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등공신들의 기어오르는 패턴과 토사구팽 패턴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하던 1250년, 맘루크 군사들은 마지막 아이유브조 술탄인 투란 샤를 겹겹이 포위한 뒤 살해하고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맘루크조는 이후 250년 동안 명맥을 이어갔으며, 맘루크 군대는 19세기까지 이집트 군대의 중심축으로 기능했다.
다시 말해 백인 노예인 맘루크는 몽골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이 노예들은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나중에 몽골제국도 쿠빌라이의 영토를 제외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나중에 몽골제국도 쿠빌라이의 영토를 제외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일련은 사건을 거쳐 이집트의 맘루크는 지중해 동부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고 레반트에서 서양의 야망을 좌절시켰다.
몽골이 맘루크에 패배하고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이 멸망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세력은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기에 눌려 있던 제노바였다. 제노바는 루이 9세의 이집트 원정대에 선박을 건조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원정대가 패배하면서 군사적으로 힘이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1453년 오스만조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기독교도와의 모든 거래를 중단시켰으며, 무슬림과 이탈리아인 사이의 향료 교역도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을 따라 아래 방향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8년 아프리카 남단의 곶을 발견했고, 10년 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무슬림이 아시아와 서양의 교역을 독점하던 시대도 영원히 막을 내렸다.
6.흑사병과 질병 교역
1343년 타나가 공격을 받자 이탈리아인은 서쪽을 카파로 도망쳤고, 황금 군단의 투르크 동맹이 킵차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후 3년 동안 킴차크는 무시무시한 투석기를 앞세워 종종 카파를 포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308년 도시가 폐허가 된 이후 제노바인은 보스포루스를 통해 해상 원조를 늘리고 동심원 형태의 성벽을 이중으로 쌓아 카파의 방어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킵차크인도 제노바인도 모르는 사이에 심판의 무기가 동쪽에서 유입되었고, 양쪽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성 밖에서 공격하던 킵차크가 무너져 잠시나마 카파 안에 머물던 이탈리아인에게 숨통을 틔워줬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방어자들도 무너졌다. 이후 심판의 무기는 제노바 갤리선을 타고 유럽을 강타했으며, 이어 선지자 무함마드의 땅에도 상륙하여 잿빛 파멸을 이끌었다.
페스트균. 설치류 가운데 특히 주목할 대상은 타르바간이라는 천공동물 인데, 생김새는 거대한 다람쥐와 같으며 키 60센티미터, 무게 8길로그램에 겨울잠을 잔다.
1000년 동안 스템 지대의 거주자들은 감염된 설치류와 거리를 유지했다. 감염된 동물은 행동이 굼떠서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감염 확산을 차단하는 문화적 장벽이 무너지곤 했다. 가장 흔한 사례가 현지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인이 감염된 동물을 사냥하는 경우였고, 이는 흑사병의 발병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무역과 여행(더불어 현대와 같은 인구밀도 상승)은 새로 건설된 지역이든 역사가 오랜 곳이든 병원체가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가게 만든다.
수천 년 동안 아시아의 야생 설치류에 잠복해 있던 페스트가 최초의 밀레니엄 중반에야 유럽에 도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페스트가 발생한 이후 800년 동안 잠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유럽의 동로마제국에 집중된 반면 중세에 창궐한 페스트가 유럽 대륙 전체에 피해를 입힌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전염병은 교역을 통해 전파된다.
'무슬림 격리'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아시아와 접촉하지 못한 유럽 상인들은 13세기 몽골의 정복 이후 육로로 교류를 이어갔다. 칭기즈칸의 후예들 덕분에 육상 교역에 재개되면서 그동안 유럽에서 잠잠했던 페스트가 더 큰 화를 불러왔다.
6세기 페스트는 바다를 통해 유입된 반면, 14세기에는 육로로 전파되었다.
카파의 공격자들을 덮친 페스트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즉시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물러나기 전에 역사상 가장 참혹한 생물학 테러를 감행했다. 데 무시의 설명을 계속 살펴보자
죽어가던 타타르인은 질병이 몰고 온 엄청난 재앙에 넋이 나갔으며 달아날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포위에도 관심을 잃었다. 하지만 악취로 성안의 모든 사람이 죽기를 바라면서 사망자의 시체를 투석기에 올려 성안으로 던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병사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성안으로 던져 넣었다. 악취가 무척 심했고 수천 명 중 한 사람도 남아 있는 타타르 군에게서 도망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내 카파를 지키던 수천 명의 방어자들도 공격자와 같은 운명을 맞았고, 흑사병은 몇 달 만에 유럽과 중동을 휩쓸었다.
중세에는 전염병의 감염 원리에 무지했기 때문에 피해갈 수 있었던 수천만 명의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과학적 지식의 부재는 반유대교 정서를 부추겼고 유대인을 질병보다 더 무서운 상황으로 몰아갔다. 역병이 돈 원인을 둘러싸고 온갖 설이 나돌았다. 육체적 범죄나 신학적 범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설명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고, 사시와 오염된 '기운'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설은 히브리인이 우물을 오염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망상은 기독교도를 패닉으로 몰아갔다. 유대인 수천 명이 모진 고문 끝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허위로 자백했고 화형이나 능지처참을 당했다.
-인간 역사에 항상 반복되었고 2차 세계대전에 일본과 중국에서 있었고 항상 소수자인 외국인같은 약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던 일. 심지어 코로나 때도 동일한 방식의 희생양 찾기는 반복되었음.
서유럽에서 페스트가 마지막으로 발생한 사례는 1720년 마르세유에서다.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19세기까지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에서는 20세기 초에도 수천 명이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 발병 직전 유럽 인구는 5000만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최소의 발병 당시 1200~15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100년 동안 더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을 것이다. 역병이 거듭 발생하면서 사망이 출생률을 압도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몽골과 명나라의 인구 자료는 1330~1420년 중국 인구가 7200만명에서 5100만명까지 감소했음을 시사한다. 현대 이전에, 심지어 전쟁중에도 군인과 민간인을 쓰러뜨리는 데 칼보다 더 무서운 무기는 미생물이었다. 중국의 인구 감소로 세수가 줄어든 요인은 1433년 정화의 마지막 원정 이후 인도양에서 중국 해군이 자취를 감추는 데 한 몫했다.
이집트에서는 교역과 산업구조가 거의 붕괴되고, 세계 무대에서 몽골족이 모습을 감추며, 인도양을 누비던 중국 해군이 사라져 공백이 생기자 간신히 버텨낸 유럽인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여지가 생겼다. 6~7세기에 비잔틴과 페르시아제국을 공격하여 무슬림에게 평탄한 앞길을 만들어줬던 페스트균이 14~15세기에는 오히려 이슬람의 쇠퇴를 앞당겼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영국에서 페스트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더 이상 목재 틀을 쓰지 않고 벽돌짐을 세우면서 쥐가 숨어들기 어려웠고, 벼룩도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에서 사람에게 뛰어들기 힘들었다.
7.대항해시대
인도 제도를 찾아 미지의 대서양으로 항해를 떠난 최초의 유럽인이 제노바 사람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향료 교역에서 베네치아에 밀리던 제노바는 소금이나 백반 같은 광물과 목재, 농산물, 노예 등 지중해와 흑해를 오가는 선적 화물에 상업적인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돛으로 항해하던 둥근 배는 화물을 싣는 데 더 적합한 모양으로 입증되었고, 장거리 탐험에 안성맞춤이었다.
기원전 205년 알렉산드리아에 에라토스테네스라는 그리스인이 살았는데, 그는 지구가 구체라고 결론 내리고 직경을 계산했다. 이후 2000년 이상 그보다 더 오차가 적은 계산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다. 사실 콜롬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 제도에 닿을 수 있다고 제안한 최초의 인물도 아니었다.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도로 가는 경로는 1세기에 활동하던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세계의 발견이 탐욕스러운 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불하다는 사실은 양모 방직공의 야심만만한 아들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발견한 '일확천금'에 이르는 길은 귀족들의 자금 대여 행렬 못지않게 경이로웠으며, 신세계에서 콜럼버스가 귀환한 이후 사회는 엄청난 대격변을 겪었다. 이를 시인 겸 극작가이자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자기 수입과 지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럽인, 자신이 병풍 신세에 머물고 있다고 느끼지만 기회를 기다리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 청년들, 실직자들, 귀족의 사생아들, 도피자들 모두 신세계를 밟기를
포르투갈은 교역 제국의 면모보다 돈을 갈취하는 폭력배의 모습을 보였다. 현지 상인들에게 향료 등을 시장가격보다 싸게 팔도록 압박하고, 무슬림 등의 세력을 정직한 상거래에서 내쫓았다. 보호와 해적질은 종이 한장 차이인데, 포르투갈은 그 경계를 넘나들기 일쑤였다.
이따금 포르투갈인은 다우선을 약탈하고 시체를 매달아 사격 연습을 했고, 현지 통치자에게 시체 토막을 전달하면서 카레 재료로 쓰라고 권했다. 포르투갈인의 잔악함은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도 정도가 심하며,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이를 더 부추겼다.
섬나라의 이슬람 술탄들은 포르투갈인의 선교 열정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회가 평민들을 점차 개종시키자 경계했다. 평민들은 별다른 경계심 없이 교회 의식을 따라했고, 테르나테 무슬림 지도자들의 탐욕으로부터 교회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1530년대 중반 포르투갈은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가능케 만들었다. 테르나테와 티도레가 다른 왕국과 연합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인에게 항거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사건에서 오늘날과의 연관성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멀리서 온 기독교 세력의 전략적 자원 탈취 시도에 맞서 오랜 숙적이 손잡고 지하드 운동을 일으킨 사례를 보라. 하지만 16세기 후반 몰로카 제도의 상황은 오늘날보다 더 복잡했다. 놀랍게도 몰루카인은 포르투갈에 맞서리라 기대되는 다른 유럽인을 환대했다. 세계 일주를 하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79년 바불라와 깊은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드레이크는 영국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으며, 사치품이나 100여명의 아내와 첩에 푹 빠진 술탄이 그리 독실한 무슬림은 아님을 확인하고 떠났다. 20년 후 네덜란드의 탐험대가 도착했을 때도 바불라와 그의 후손들은 새로운 손님들을 가증스러운 포르투갈을 견제할 평형추로 여기며 반겼다. 하지만 네덜란드인은 포르투갈인보다 더 잔악함을 증명하고 말았다.
8.에워싸인 세계. 기축통화가 된 스페인 달러
1635년 6월, 멕시코시티의 스페인 이발사들은 현지 중국인 이발사들의 영업에 불만을 품고 총독에게 항의했다. 총독은 문제를 시의회에 회부했고, 의회는 총독에게 스페인 본국의 관행처럼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이발소를 12곳으로 제한하며 위치도 근교에 국한시킬 것을 권했다. 총독이 정확이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미처 한 세대가 지나기 전인 1654년,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23명의 네덜란드계 유대인이 뉴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북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최초의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300년 가까이 흐른 1931년 어느 오후, 열한살 짜리 오스트레일리아 소년이 퍼스에서 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해변 근처의 모래언덕을 산책하다가 스페인 동전 40개를 발견했다.
대체 17세기 중반에 중국인 이발사들은 어떻게 멕시코시티까지 갔을까? 유사한 시기에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은 브라질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뉴암스테르담에서는 왜 민간 기업인 서인도회사가 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내렸는가? 어떻게 스페인의 은화를 가득실은 네덜란드 선박은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기 한 세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끝자락의 해저에 멈춰 섰는가?
이상의 네 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탐험 시대로 시작된 세계경제의 확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화와 이에 대한 불만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다음 다섯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1493년 콜럼버스의 2차 항해 이후 수십 년 안에 옥수수, 밀, 커피, 차, 설탕 등의 작물이 대륙을 넘나들면서 세계 농업과 노동시장에 혁명이 일어났다. 작물의 교환이 인간의 생활 조건을 늘 개선한 것은 아니었다.
둘째, 17세기 초 스페인과 네덜란드 선원들은 지구 풍향 체계의 마지막 비밀을 풀어냈다. 덕분에 드넓은 대양을 비교적 손쉽게 건널 수 있었다. 1650년에는 온갖 물건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세계 대다수 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다.
셋째, 페루와 멕시코에서 거대한 은 광산이 발견되며서 세계적 통화체계가 탄생했다.(이와 더불어 은화가 지나치게 주조되어 살인적인 인플레가 발생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스페인의 8레알 동전은 오늘날 미국의 100달러 지폐나 비자카드처럼 통용되었다.
넷째, 17세기에는 주식회사가 탄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무역 질서가 형성되었다. 주식회사는 이전의 개인 판매원, 가족 기업, 왕족의 독점 등과 비교해 이점이 컸다. 이내 대규모 기업에 세계 교역을 장악했으며, 이후 세계 무대에서 대기업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섯째, 변화는 누군가를 불만에 빠뜨렸다. 16~17세기의 새로운 세계경제로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이 수입되자 섬유 제조업자, 농민, 서비스 근로자는 타격을 입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프랑스 농민들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 근로자 들이었다.
페루의 식민지인 포토시(오늘날 볼리비아의 영토)에서 '은 광산'이 발견될 즈음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도 지상 은맥이 발견되었다.(발견 시기는 각각 1547년과 1548년) 멕시코시티와 더불어 리마에서도 은 공급의 과잉이 일어났다. 리마의 '상인 거리'에서는 대형 상점 여러 곳에서 사치품을 구매할 수 있었고, 일부 제품의 가격은 은 100만 페소 이상에 달했다. 1602년 페루의 총독이 펠리페 3세에게 보낸 서신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곳 사람들은 무척 호화로운 생활은 합니다. 모두가 실크를 입는데 최상품이고 값이 비쌉니다. 여성들은 화려한 드레스와 옷을 넘치게 지니고 있으며,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막대한 부의 재분배는 이미 들썩이던 세계경제에 충격을 일으켰다. 모든 일이 그렇듯 승자가 있으며 패자가 있는 법이다. 이 게임에서는 누가 패배자였을까? 멕시코시티의 스페인 이발사들은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17세기 버전으로 값싼 이주 노동자와 불공정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는 것이다. 이발사들은 총독에게 중국 출신 이발사들을 시장에서 배제하는 일이 국익을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열등한 인종과 무능으로부터 대중의 건강을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스페인과 멕시코의 실크 산업이 타격을 입었는데, 이들은 마닐라 갤리언으로 아카풀코에 유입된 중국산 옷감과 가격으로나 품질로나 결쟁할 수 없었다.
1581년에는 마닐라와 페루 사이의 직접 항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크 제조업자들의 항의 빗발치자 이듬해 스페인 왕은 항해를 금지 시켰다. 그럼에도 리마와 멕시코시티의 상인 및 관료들은 왕의 칙령을 번번히 무시했다. 마닐라와 페루의 교역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1593년,1595년,1604년에도 같은 내용의 칙령이 반복적으로 공포되었다.
놀랍게도 왕은 신세계 최대의 식민지 두 곳이 서로 교역을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페루와 뉴스페인(멕시코)총독에게 양국 간 상거래와 교역을 철저히 금하고 억제할 것을 명령한다." 마닐라 - 페루의 교역 금지 시도처럼 효력 없는 칙령은 반복적으로 공포되었다.
필리핀에 머물던 스페인 사람들은 중국에서 수출된 실크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하던 식량과 노동력을 새로운 아시아 식민지에서 공급받았다. 마닐라 외곽의 파리안은 원래 식민지 당국이 중국인 이민자의 숙소 정도로 조성하였으나 불과 수십 년 만에 중국이 2만 명이상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1628년 스페인 총독은 중국인에 대해 "일반인이든 종교인이든 스페인 사람이 그들을 통하지 않고 음식, 옷, 신발을 얻을 수 없다." 라고 전했다. 부유한 '마닐라 사람' 상인, 멕시코 중개인, 식민지 관료 모두 중국인 하인을 부렸다. 그중 많은 중국인이 파리안에서 마닐라 갤리언을 타고 아카풀코로 향했다. 이런 배경으로 멕시코시티의 보호주의자들이 중국이 이발사들을 경계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값싼 아시아산 전자 제품이 판매되고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4세기 전이었다.
이 대목에서도 현대의 독자들은 17세기 최초의 유대인이 뉴욕에 도착한 사건이 충격적일 정도로 오늘날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생각할 거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상품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갑작스럽게 터전에서 유리되고 불가피하게 이전의 생산 중심지에 보호를 요청하며, 전문 기술자들이 원래 살던 땅에서 멀리 이주하는 것이다.
16~19세기에는 멕시코에서 주조한 은화가 시장의 신뢰를 얻으며 사실상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은화는 강력한 무역 회사가 보유하든 하층 계급의 지역 상인이 보유하든 지니고만 있으면 반다해에서 육두구를, 구자라트에서 캘리코를, 마닐라와 멕시코에서 실크를, 예멘에서 커피를, 스리랑카에서 계피를 살수 있었다.
이 거대한 보물선이 동인도회사의 자산이라는 사실은 1600년대 중반의 장거리 국제 교역이 다국적기업 자본주의의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17세기에 네덜란드 기업은 부패하고 붕괴 직전에 있던 포르투갈 교역 제국의 영역을 차지해 나갔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에 더 심각한 위혐을 가하는 도전자가 있었으니, 또 다른 기업인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8장에서 소개된 항해술의 발전으로 전 세계에 포진한 유럽의 교역소와 농장을 중심으로 갈등이 전개되었다. 특히 대부분 갈등은 육군과 해군이 아닌 기업 사이에서 발생했다.
9.기업의 등장
유럽에서 평화로운 무역이란 스페인과 네덜란드처럼 부강한 나라에서나 가능했다. 이들은 해적으로부터 바다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기득권 세력이었다. - 팍스아메리카나의 힘의 원천. 반면 영국은 16세기의 빈곤하고 후진적인 여러 나라들처럼 해외 선단이 방해 없이 바다를 지나가도록 지켜보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 영국의 미래는 약탈이 아닌 교역에 있었다. 곧 회계장부가 칼보다 강력한 힘을 미쳤다. 해적, 영웅이나 고독한 상인들, 박력 넘치는 해군 사령관의 시대는 저물고 전근대 다국적기업에 소속된 정체불명의 경영자들이 각광받았다.
최초의 다국적기업은 17세기 장거리 교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18세기 교역을 주름잡은 주인공은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무척 상이한 제도적 기반과 철학에서 탄생한 양대 기업은 200년 동안 세계무역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으며, 이들 기업의 성쇠는 곧 그 나라의 성쇠를 반영했다.
1585년 펠리페의 조카인 파르마 공작(이탈리아)이 안트베르펜을 점령했고, 당대와 어울리지 않는 품위를 발휘하여 도시의 신교도들이 평화롭게 떠나도록 허용했다. 같은 시기에 펠리페는 연합주와의 통상 금지령을 내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항구에서 연합주의 선박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이상의 세 가지 조치는 크나큰 실수로 드러났다. 펠리페 덕분에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유능한 상인들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즉시 구축되었다. 또한 안트베르펜에서 추방된 신교도들은 이베리아 항구를 우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장 많은 난민이 정착된 장소는 암스테르담이었다. 암스테르담은 홀란트주의 수도였지만, 그 이전에는 별달리 중요한 항구가 아니었다. 1585~1622년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신교도 난민의 유입으로 3만명에서 10만 5000명으로 크게 증가했으며 유럽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반면 안트베르펜은 저항자들이 봉쇄에 나서면서 별 볼 일 없는 도시로 전락했다.
이미 살펴봤듯 잉글랜드의 경우 인도 제도로 떠난 상인 모험가들은 태생적으로 왕실이 부여하는 독점권을 추구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중세 유럽에서 일반적이던 절대왕정 국가가 아니었으며, 정부가 국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 조치를 취했다. 특히 이 사안은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는 문제였다.
이렇게 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새로운 조직이 탄생했는데, 설립 배경 자체가 네덜란드와 닮았다. 동인도회사를 구성하는 6개 기업은 근거 지역에 본사를 설치했으며, 6개 기업을 감독하는 임무는 17인 위원회가 맡았다. 17인은 각 중의 인구에 비례하여 구성했는데, 규모가 작은 4개 주에서는 각각 한 명씩, 두 번째로 큰 제일란트주에서는 네 명, 가장 큰 홀란트주에서는 여덞 명을 선출했다. 이에 더해 홀란트주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도록 17번째 위원은 제일란트와 나머지 4개 주에서 번갈아 임명했다.
기업의 설립 조항에는 17인 위원회가 전국회의에 충성 서약을 하고 '방어'목정에서만 전쟁을 치르는 조건으로 군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어느 곳에 있든 사실상 주권국가로 행동했으며 17인 위원회나 공격적 성향의 지방 총독 또는 사령고나이 원할 경우 재량을 발휘해 아시아 경쟁자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전쟁 기구 못지않게 인상적인 부분은 네덜란드 금융이었다. 1602년 투자자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초기 자금 모집에 650만 길더를 투자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달러로, 인력을 고용하고 선박을 구매하여 향료와 교환할 은과 교역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이 자본은 영구 자본이었다. 성과가 좋아 이익이 발생하면 이익금의 상당 부분을 기업 확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투자자들은 해마다 적당한 수준의 배당을 받더라도 초기에 투자한 650만 기더를 곧 회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근거가 없었다. 오늘날의 투자자에게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투자로 보이겠지만,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영구 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금융 제도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17세기 초에 모든 길은 네덜란드로 통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무역 체계를 세운 나라였다. 오늘날까지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패는 그 규모가 아니라 선진적인 정치, 법, 금융 제도에 달려 있다. 1600년 네덜란드는 이런 면에서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며, 포르투갈이 세운 교역 제국에 도전장을 내밀 만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뮌스터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1648년에야 막을 내렸다.
전쟁을 벌이는 중에도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국, 다른 유럽 나라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영국은 나포 면허장을 지닌 드레이크의 활약, 무적함대에 거둔 승리, 영국 동인도회사가 근소하게 앞서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가 종교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었고, 금융시장은 원시적 단계로 불안정했으며, 결국 치명적인 내전을 겪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왕실의 독점과 만성적 부패로 더 뒤처진 상태였다. 반면 네덜란드 연합주는 유럽에서 절대왕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나라였고, 법과 금융 제도가 엄격했으며, 야심만만하고 재능 있는 인재들에게 종교를 불문하고 관대했다.
두 가지 간단한 통계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경제사학자들이 추정하는 1600년 잉들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오늘날 가치로 약 1440달러, 네덜란드는 2175달러다(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1370달러와 1175달러다). 이는 식민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된 이래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기술과 상업적 격차가 벌어졌으며, 제도와 금융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영구에서는 평판 좋은 채무자의 이자율이 10퍼센트인 데 비해 네덜란드에서는 4퍼센트에 그쳤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이자율은 최저 수준이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왕실이 채무를 거부하기 일수여서 채권달은 왕실에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대체 네덜란드의 금리는 어떻게 그렇게 낮았을까? 흥미롭게도 지리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했다는 점과 문화 자본 덕분에 1600년에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금융이 가장 발전한 나라로 발돋움했다. 양질의 농토 대다수가 해수면보다 낮은 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은 수백 년에 걸쳐 제방을 쌓고 풍차를 이용해 개간했다. 간척 사업은 지역에서 운영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새로 확보한 비옥한 토양에서는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고, 덕분에 소작농들이 왕실이나 봉건영주의 도움 없이 자율이 누리면서 번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간척 사업은 국가의 신용 시장에 활기를 더했다.
소유권 배분은 '네덜란드 금융'의 핵심적 특징이었으며, 기업인과 투자자에게 위험을 분산시키는 탁월한 방법이었다.
지분을 부분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상인들은 신중하게 위험을 질 수 있었다. 또한 특정 선박에서 손실이 나거나 상업적 결과가 부실한 데 따른 충격이 완화되어 투자자의 안전 한계를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적극적으로 자본 투자에 나섰고, 결과적으로 금리는 더 하락했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상인이자 경제학자, 영국 동인도회사의 총독이었던 조시아 차일드는 "모든 나라는 현재 지불하는 이자 수준과 통상적으로 지불해온 이자 수준에 비례하여 부강하거나 빈곤하다"라고 지적했다.
영국 금융시장의 안타까운 상황은 동인도회사의 초기 자본이 6만 8000파운드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영국 기업의 자본은 영구 자본이 아니었다. 회사 선박이 템스강으로 돌아와 상품을 판매하는 순간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모두 돌려줘야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보잉이 소프트웨어나 항공기 개발을 완료할 때마다 초기 투자 자본을 전부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신규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처음부터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 외국 기업과 경쟁을 벌일 수 있을까? 이따금씩 주주들에게 배당 대신 소프트웨어 디스크나 비행기 날개 보로 지불하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다. 이는 네덜란드와 경쟁하는 나라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연합주의 총독이 산파 역할을 한 덕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느슨한 민간 상인 연합체의 형태였기 때문에 해외에서 외국 교역 세력의 공격을 받을 때 피난처를 기대하거나 보호를 바랄 수 없었다.
분산된 형태로 움직이는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경쟁자에 비해 부패에 취약했다.
론소스 학살과 당시 쿤의 역할이 보고서에 담긴 제안과 후일 그가 보인 잔악함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제 새로운 교역은 무력을 앞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경험상 아시아 무역은 무기를 사용한 보호와 호의로 추진되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무기 사용에 따르는 비용은 교역으로 발생하는 이익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전쟁 없이 무역을 수행할 수 없으며, 무역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의 해양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희망봉을 돌아가는 경로는 '신드바드의 길'과 홍해 길을 이요하는 것보다 저렴한 수준에 이르렀다.
17세기 초에는 지브롤터를 통해 서쪽에서 도착하는 후추와 고급 향료가 지중해에 과잉 공급되었다.
베네치아의 오랜 교역도 막을 내렸다. 베네치아는 주요 수익원이 사라진 후 한 세기 반 만에 나폴레옹 군대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네덜란드는 고립주의를 고집하는 일본과 잘 맞는 상대였다.(금욕적인 포르투갈인이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과 달리) 네덜란드와 일본은 모두 독주를 진탕 마시기를 즐겼다. 이 칼뱅주의자들은 이교도의 영혼 구원보다 금전적 이익에 더 관심이 컷다.(스웨덴의 칼 10세는 종교와 자유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 네덜란드의 외교관을 향해 주머니에서 네덜란드 동전을 꺼내 보이고는,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당신의 종교가 여기 있다"라고 대꾸한 것으로 유명하다.)
홀란트의 항구에서 동양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50만명 이상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얀 드 브리스라는 경제사학자의 말을 빌리면 "동인도회사가 도시의 거지와 실업자를 쓸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참자들의 소양이 형편없었다는 점은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발목을 잡았다. 반면 영국 동인도회사는 항해능력이 있고 화물을 다룰 줄 알며,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인력이 부족한 동인도회사 선박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할 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에 따라 자격을 갖춘 신청자만 선발했고 왕실 해군의 강제징집을 면제시켜줬다.
이제 어려운 작업이 남았다. 막대한 양의 물건을 분배하면서도 물량 공급으로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다양한 계약을 활용했으나, 일반적으로 특정 상품의 물량 전체를 미리 정한 가격에 판매하는 계약을 애용했다. 여기에는 회사가 향후 정해진 기간 동안 재고를 풀지 않겠다는 약속이 따라붙었는데, 네덜란드는 이를 '정지'라고 불렀다.이는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90년 이후 50년 도안 향료 시장을 물샐틈없이 통제하여 육두구와 정향 가격을 거의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시켰다. 여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는데, 특히 수확량의 변동이 극심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1714년에는 몰루카 제도 북부에서 정향이 150만 파운드 재배됐는데, 이듬해인 1715년에는 생산량이 20만파운드에 불과했다. 또한 1719년에는 수확량이 무척 많았던 반면 유럽의 수요가 저조해서 정향 450만 파운드, 육두구 150만 파운드를 처분해야 했다.
상업에서 발생한 부만큼 다른 나라의 질시를 유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도 없다. 이러한 감정은 17~18세기 영국 - 네덜란드의 관계를 파고들었고 양국은 네 차례에 걸쳐 전면전을 벌였다. 우리 시대처럼 무익한 상업적, 외교적 무언극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역 전쟁을 벌였다.
런던의 상인 및 정치인의 결단과 더불어 서양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로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곧 막을 내렸다. 모순적이게도 빌럼 3세가 영국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영국은 네덜란드를 끌어내리고 세계경제와 군사 패권국으로 발돋움할 길을 마련했다. 향료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고 동인도 제도에서 배청당한 영국인은 북쪽의 인도와 중국, 서쪽의 카리브해와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이 지역에는 향후 인기를 누리는 면직물, 차, 설탕, 아편, 노예가 풍부했다.
10.플랜테이션과 삼각무역
1773년 12월 16일 인디언 복장에 얼굴을 검게 칠하고 차 상자를 보스턴 앞바다에 던져 넣는 이미지. 미국 건국 초기의 애국자들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낯익은 장면이다. 시위대는 겉으로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라고 외쳤지만, 이 자극적인 구호는 실제 현실보다는 혁명가들의 필요를 반영한 문구였다.
사실 차에 부가되는 유일한 세금이란 약 10퍼센트의 수입세가 전부였는데, 보스턴 차사건이 일어나기 6년 전에 제정된 타운센드법에 따른 것이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적당한 수준의 세금이 부과되었음에도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통해 말린 잎을 밀수하여 법을 우회했다. 결국 정부에 신고되는 소비량은 전체의 5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보스턴 사람들이 법이 제정되고 6년 후에야 분노를 표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동인도회사가 차를 시장에 덤핑할까 두려워 바닷물에 던져 넣은 것이다.
1773년 5월 의회는 동인도회사의 요청에 따라 차조례를 통과시켰다.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지는 않았으나, 동인도회사가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직접 차를 수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차조례는 차 가격을 절반으로 낮췄기 때문에 식민지 소비자들에게는 유익한 법이었다.
하지만 법의 제정으로 타격을 입은 중개인, 현지 밀수업자, 차 상인은 불만을 품었다. 차조례의 통과 소식이 보스턴에 전해지자 동인도회사와 '불공정한 해외 경쟁'을 벌이게 된 두 집단이 분개하여 행동에 나섰다. 바로 상인과 밀수업자였는데, 차조례 덕분에 국민이 막대한 혜택을 입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무시한 채 국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주의자의 낯익은 논리를 펼쳤다. 이들은 '한결같은 애국자'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차조례가 "현재 우리나라 상인들이 누리는 정당한 이익을 가로채며 동인도회사에 양보하기 위해" 정직하고 근면한 아메리카 상인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독자들의 무관심과 당파성에 의지하여 '대표 없는 과세'라는 해묵은 의제를 들춰냈고, 영국이 아메리카의 모든 상업을 장악할 것이라는 설득력 없는 위협을 제기했다.
미국독립혁명 즈음에는 낯익은 세계화의 요소가 등장했다. 다국적 기업은 제품을 전 세계에 판매하고 소비자의 기호를 형성했다.
무슬림 세계에서 커피가 북쪽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예의 도덕성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맛이 강하고 달지 않은 커피에 때로는 정향, 아니스, 카다멈을 첨가한 음료가 하렘을 향했다. 여성들은 로스팅한 원두의 안정적인 공급을 결혼의 의무 사항으로 여겼고 이를 위반하면 이혼 사유로 간주했다.
영국이 상업 분야에서 급부상한 것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였다.
1689년 혁명의 후속조치는 막대한 효과를 냈다.
첫째, 권력이 절대군주에서 대의의 입법기관으로 옮겨 가면서 법치가 활성화되었다. 이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는데 필수적인 토양이다.
둘째, 왕실의 물품세 징수로 정부는 손쉽게 부채를 상환할 수 있었고 덕분에 신용 위험이 줄어 금리가 급격히 하락했다. 게다가 지도자들은 입법부가 주로 부유한 채권자와 기업인으로 구성된 만큼 채무불이행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1690년에서 1727년 사이 영국의 기준 금리는 10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하락했다.
셋째, 1688~1689년 혁명 이후 네덜란드 금융업자들은 상업 중심지가 이동했음을 인식하고 대거 런던으로 몰려갔다.
혁명의 후속조치는 영국 경제를 급격히 성장시켰다.
예멘에서만 커피 원두가 생산됐다면 그 희귀성 때문에 비싼 값을 유지했을 것이다. 18세기 초반 점점 더 많은 유럽 상인들이 예멘에 몰려들었다. 처음에 모카 항에 몰려들던 상인들은 항구 북부의 커피 재배 지역으로 먼지가 날리는 베이트알파키까지 찾아갔다.
17세기 후반 동인도회사는 고국으로 연간 150만 필의 면직물과 의류 품목을 운반했는데, 수입 총가치의 83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제 향료 시장은 종언을 고했다. 면직물이 진정한 왕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경쟁자들은 반발했다. 예를 들어 1681년 레반트 회사는 인도에서 고급 면직물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방안을 추구했다. 레반트는 보호주의자들이 고매한 척하면서 내놓는 익숙한 주장을 되풀이 했다.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영국의 금지금이 유출된다는 논리였다
금은 캘리코, 후추, 가공 실크, 생사를 구입하는 데 쓰인다. 인도에서 생산된 캘리코와 가공 실크는 이 나라 빈곤층에게 분명한 피해를 입힌다. 생사의 경우 투르크와의 교역을 틀림없이 파괴할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에는 영국의 선진 기술을 인도에 수출했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회사는 인도에 연사공,방직공,염색업자를 보내고 실크 제조업을 일으켰다. 이미 완성되어 날염을 마친 옷을 영구에 들여오면, 그렇지 않을 경우 일자리를 잡을 수 있는 노동자들을 빈곤화하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한다.
17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국에서는 아시아로부터 면직물 수입을 막기 위해 세 집단이 한데 힘을 합쳐 기이한 보호주의 동맹을 형성했다. 첫 번째 집단은 도덕주의자들로, 새롭고 화려한 옷가지로 야기된 사회불안에 분노했다.
두 번째 집단은 실크와 양모 방직공들로, 값싸고 더 나은 외국 제품으로 일자릴를 잃었다. 세 번째 집단은 중상주의자들로, 그저 패션을 위해 은을 유출하는데 분노를 표현했다. 이 세력들은 영국 동인도회사에 맞서 회사에 치명적인 결과를 입혔고 영국의 경제, 사회구조, 제국에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인도 경제의 근간이 섬유산업을 파괴했다.
중상주의자들의 이론자체는 단순했다. 국가의 부는 국가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으로 측정된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해 국제 교역은 제로섬게임으로, 한 나라의 이익은 다른 나라의 비용으로 발생하기에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수입보다 수출을 늘려 해외에서 금과 은을 모으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현대적 어법으로 말하자면, 부국이 되면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암울한 줄다리기였다.
중상주의자들은 높은 관세를 매겨 수입을 최소화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수입 금지를 실시하는 반면, 수출 화물의 승선세를 없애고 심지어 수출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수출을 장려하라고 요구했다.
중상주의자들의 유령은 수입관세와 수입제한의 형태로 여전히 현대 세계를 배회하고 있으며, 농산물 보조금이 그중에서도 가장 해롭다.
1696년 캔터베리, 노리치, 노퍽, 케임브리지의 방직공과 방적공은 캘리코와의 경쟁으로 빈곤해지자 의회에 구제를 요청했다. 하원은 면직물을 왕국으로 들여오는 수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위반할 경우 100파운드의 벌금(노동자의 평균임금 5~10년 치)을 부과하는 가혹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 찬성자들은 인도 무역으로 손해를 입은 증인들을 줄지어 소집했다. 양모와 실크 제조업자들 외에 칠기 노동자와 가구 및 부채 제작자들이 포함되었는데, 저렴한 인도 제품이 수입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법안 반대자들은 영국 동인도회사와 실내장식 상인, 리넨 상인, 염색업자, 캘리코 날염업자 등이었다.
법안은 하원을 순조롭게 통과했지만 상원의 밀실에서 가로막혔다.
차일드가 제공하는 뇌물 세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수천명의 방직공이 차일드의 저택으로 분노의 행진을 이어갔고, 군인들은 무리를 향해 발포하여 한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이제 부유한 후원자들도 영국 동인도회사에게 등을 돌렸다. 몇 년 동안 소규모 민간 상인들은 아시아 항구에서 동인도 회사의 독점을 위반하며 교역을 했다.
이처럼 중대한 시기인 1699년 차일드가 돌연 사망했다. 그의 지략과 재력이 사라지자 보호주의 세력이 결국 승리를 거뒀다.
캘리코 법은 세 가지 이유에서 역효과를 냈다. 첫째, 캘리코가 금단의 열매가 되자 이를 원하는 소비자의 열망은 더 커졌다. 둘째, 금지에는 필연적으로 밀수가 뒤따르게 마련이라 법안이 통과된 이후 밀수가 점점 심해졌다.
셋째, 법안은 국내 면직물 제조업자들이 선진 날염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끔 일반 천을 대량으로 공급하도록 만들어 제조업자들에게 보탬이 됐다. 특히 마지막 역효과가 방직공들에게 가장 나쁜 영향을 미쳤다. 양모 제조업자들은 오히려 법안 때문에 상황이 악화됐음을 깨달았다.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는 인도에서 날염한 캘리코를 부유층만 사용하고 빈곤층은 양모를 계속 입거나 사용했다. 이제 캘리코가 영국에서 날염되면서 가격이 크게 내려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걸치고 집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