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절대반지와 같은 '힘'을 선한 사람이 얻으면 선하게 사용하고 악한 사람이 얻으면 악하게 사용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 영화의 큰 뼈대는 '절대반지'를 용광로에 녹여 없애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정의 모험이다. '초월적 권력'을 상징하는 절대반지를 아예 녹여 없앤다는 철학은 '성군이 권력을 얻으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정신을 대변하는 [삼국지]와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는 서구사상의 기원이 소크라테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는 기게스의 반지라는 이야기로 절대적인 힘이 생겼을 때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차이가 있는지를 제자들과 논하였다. 기게스라는 목동은 절대반지처럼 손가락에 끼면 투명해지는 반지를 얻자, 왕비와 간통한 후 왕비와 결탁하여 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다.

"만약에 이런 반지가 두 개 생겨서 하나는 올바른 사람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끼게 된다면, 그런 경우 올바름 속에 머무르면서 남의 것을 멀리하고 그것에 손을 대지 않을 정도로 철석 같은 마음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같이 생각됩니다."

존 왕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낸 귀족들의 특별함이 여기에 있다. 이들은 왕을 죽이거나 갈아치우는게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쿠데타였다면 권력자를 교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문제의 원인이 존 왕, 개인에게 있다고 보지 않았다.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재량권이 문제의 원인이라 생각했다. 권력을 사람의 손으로부터 거두어 법의 용광로에서 녹이고 권력을 봉인한다. 사람에 의한 지배는 예속을 뜻하지만 법에 의한 지배는 자유와 멀지 않다고 이들은 믿었다.

1588년 대항해 시대에 벌어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영국 여왕 앨리자베스 1세와의 싸움은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막강한 스페인 제국을 극복하고 세계의 주류로 영국이 등장했던 배경에는 영국의 관료제도가 있었다. 스페인 제국은 중앙에서 통치하는 독재체제였다. 스페인의 모험가들은 신세계에서 은을 찾거나 부를 축적하면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기 위해 왕에게 갖다 바쳤다.

영국에 무적함대를 파견하기 위해 스페인 연간 총세입의 다섯 배가 들었다. 스페인의 왕들은 국력은 자신의 의지대로 소진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의 신대륙으로부터 전제적 통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소진되었다. 영국의 모험가나 상인에게는 부의 축적이 목표였던 데 반해 스페인의 모험가들은 결국 모험의 결실을 왕에게 바치고 작위와 권력을 얻는 데 목표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왕권이 약했다. 마그나카르타의 영향도 있었고 왕의 전제권을 인정하지 않은 드센 귀족들도 한몫했다. 왕권이 약하다는 것은 왕이 임의대로 사회적 자원을 징발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왕은 전쟁을 위해서 왕의 토지를 처분하거나 임차해야 했다. 왕이 재산권을 임의대로 침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재산권에 대한 확고한 사회적 신뢰와는 상관관계가 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재산권에 대한 정치권력의 자의적 간섭이 부의 축적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폭력을 끊임없이 걱정해야 하는 불행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자기 부의 대부분을 파묻거나 숨기곤 한다. 이것은 터키와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일반적인 관행인 것으로 생각된다."

재산권의 확립이 부의 축적에 중요한 이유도 예측가능성과 관련 있다. 자신이 축적한 부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예상될 때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은닉하지 않고 투자를 통해 축적해 나갈 수 있다. 만약 부의 축적과 관련해서 예측가능성이 떨어진다면 애덤 스미스가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될 수 있으면 숨기려 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는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예측가능성은 비단 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공개하고 개발한다. 군주의 재량권에 국가의 자원이 휘둘릴 수 있다면 재물뿐만 아니라 재능 역시 이를 소유한 원주인에게 저주가 될 수 있으므로 재능 역시 자신의 재능을 은폐하며 천재들로부터 얻을 기회를 상실한다.

전력생산자, 즉 발전소 입장에서는 비트코인 채굴이 전기를 낭비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고려할 사안이 아니다. 발전소는 채굴업자에게 전기를 파는 것과 그렇지 않은 선택 중 어떤 것이 이익인지를 따지는 것으로 족하다. 만약 이미 다른 소비자가 전기를 사주는 시간대라면 굳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채굴업자에게 전기를 제공해서 비난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새벽시간대나 비수기에 설비를 늘려야 하거나 아니면 전기 자체를 버려야 할 때, 채굴자에게 전기를 팔면 발전소로서는 이익이다. 그리고 이는 파레토최적인데 다른 누구의 이익을 감소시키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발전소의 이익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트코인 전기채굴이 이산화탄소를 더 많이 배출하거나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는 쓸모없는 낭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채굴기가 하는 것이 아니다. 전기를 발전할 때 이미 이루어진다. 따라서 비트코인 채굴 자체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원인이 아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전기자동차에 적용된다.

블록체인은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소유권을 토큰화해서 극소단위로 분할하므로 거래를 매우 원활하게 해준다. 쉽게 말해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은 경제의 포용성을 극대화하므로 훨씬 더 많은 인구를 지구적 공급사슬망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블록체인을 활용해 재산권을 확보하는 프로젝트가 아프리카의 변화를 촉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미군들로부터 유입된 말보로가 강력한 지불 수단이었던 적이 있다. 일단 어떤 상품이 화폐의 지위를 얻고 나면 본래의 상품 가치는 의미를 잃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들에게도 담배는 화폐로서 의미가 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마저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개비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흠연자와 비흡연자가 평가하는 담배의 가치가 동일해진다. 신비한 일이다.

자본의 축적은 몇 세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 인류가 보유한 공급사슬망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확장되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산재는 약탈에 노출된다. 아주 오랫동안 축적해왔다 해도 한순간에 빼앗길 수 있다. 이때 거대한 생산재를 약탈하는 주체는 주로 왕권이었다.

근대 금융의 발달을 이야기할 때 유대인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무기명 채권이나 주식, 중앙은행이 유대인들의 발명품이 아니라고 해도 이 시스템들이 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학자는 드물다.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2000년 이상 유지해 온 이들은 핍박받아 온 다른 소수민족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패턴을 보여준다.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류 사회의 핵심부에 접근했다가 추방당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무대와 배우만 바꾼 채 동일한 각본으로 재연되는 연극과도 비슷하다. 기독교나 이슬람 국가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유대인들은 몇 세대에 걸쳐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주류 사회의 하층민으로부터 질시를 받는다.

모든 비극의 뿌리를 캐들어가면 거기에는 탐욕스러운 유대인들의 음모세력이 있다는 식의 소문도 정설고 굳어지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군왕이 등장해 결국 유대인들의 학살과 추방으로 귀결된다. 광기가 잦아들면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숨겨진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곤 했다. 유대인들의 성공이 유대인들의 고난을 초래한 셈이다.

소수민족으로서 권력을 가진 왕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은 일종의 보험이기도 했지만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빚을 갚지 않으려는 왕은 구실을 만들어 채권자를 죽이려고 했다. 왕실에 빚을 떼이고 비참한 몰락을 경험한 유대계 금융인들은 무기명 채권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채권은 비인격적인 채무이기 때문에 유대인 금융 재벌을 추방한다고 간단하게 털어버릴 수 없다. 여기에 채권자 쪽에서도 왕실의 재정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채권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손쉽게 대처할 수 있었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재정을 비인격화해서 경제 과정을 합리화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본능"이라고 말했다.

빚이 채권의 형태로 미분화되고 비인격화된 덕분에 오늘날 정부들은 채무를 없애는 데 있어서도 추상적인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거대한 채권자들을 잡아다가 족치는 방식이 아니므로 그 피해는 훨씬 광범위하다.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이때 정부는 악마재판처럼 근사한 논리를 제시한다. 대표적인 게 바로 근대화폐이론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경기를 활성화하고 불황에 빠진 경제를 구해낸다.

이런 정부를 둔 주민들은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자산을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은행을 통제하기 때문에 달러나 신용카드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국경이나 실물에 매이지 않는 권리물이 필요하다. 화폐를 국가가 인정하는 지불수단이라고 정의하는 데서 한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경제학자들로서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비트코인의 무정부성이야말로 약탈자와 다름없는 국가의 주민들이에게는 일종의 복음인 셈이다.

화폐는 정부나 국가의 개입이 없어도 나타나는 제도이다. 그러나 국가는 화폐제도에 깊이 개입하려 한다. 화폐가 인간사회의 본능이라면 화폐에 개입하려는 것은 국가의 속성이다. 국가가 화폐에 개입하며서 화폐는 하나의 제도로써 생활 속에 파고든다. 그러나 국가가 개입한 화폐는 국가의 무절제로 인해 붕괴의 길로 치닫고 만다.

표준화로 인해 화폐의 통용성은 더욱 증가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를 독점하려는 이유는 화폐발행 이익(세뇨리지)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순전히 공익적 목적으로 화폐제도를 독점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화폐발행 이익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깊이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