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었던 몇 권의 비트코인 관련책 중 가장 읽을거리가 많고 밑줄칠 거리가 많았던 책. 오태민작가 최근 본인이 만든 코인 때문에 욕 많이 먹던데 그걸 떠나서 책의 논리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음.
비트코인이라는 화폐현상은 그 가치가 이해되고 혁명적인데 과연 '비트코인'자체는 어디까지 갈 수 있고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가?
화폐현상은 부조리해 보일 정도로 난해하며 신비한 현상이다. 통화주의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은 "특정한 물건이 화폐로 채택되도록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후 이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모른다고 했다. 일단 어느 물건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이 관행은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고 성장하기 마련이다.
일단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화폐로 사용하고 나면 그 물건이 화폐로써 가치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그리고 그 물건의 상품으로서의 가치와 그 물건의 화폐적 가치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는 것은 화폐에 대한 경제학적 개념 정의가 화페현상이라는 실제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아직도 대중적인 화폐개념에 도달할 만한 화폐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정부가 발행하는 지폐에는 가치의 저장이라는 화폐의 덕성이 부족하다.
경제학자들이 비트코인을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가격이 안정되고 가치의 저장수단도 되며 누구나 쉽게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화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화폐는 뚜렷한 선으로 테두리를 그을 수 있는 명쾌한 개념이 아니다. 정부가 인정하는 교환의 매개물인 원화나 달러가 화폐의 기본적인 속성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다고 믿는 경제학자는 많지 않다. 가치의 안정은 화폐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가치의 저장이라는 덕목과 견주었을 때 둘 중 무엇이 우선하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둘 다 중요한 화폐의 속성이어야 하지만 이 두 덕목은 종종 충돌한다. 비교적 절제력이 있다고 하는 선진국의 법정화폐도 장기적으로 관찰하면 가치의 저장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래수단으로서 안정된 통화를 가진 국가 자체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안정된 사회의 시민들이 요동하는 비트코인을 안정된 통화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인쇄기로 돈을 찍어내서 인플레이션을 제약 없이 유발하는 국가에 살고 있다면 비트코인이 무엇보다 좋은 돈일 수 있다.(스위스 디나르의 예시)
서플라이체인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제시한 핀공장 분업 이야기는 경제학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도 친숙하다. 분업을 하면 생산성이 급격하게 올라간다. 그러나 분업이 효율적이라면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미개했기 때문일까? 주류경제학 시장이 없어서라고 답하지만 이 대답은 약간 동어반복이다. 분업이 없으므로 시장이 없고 시장이 없어서 분업이 없다고 해도 말이 된다. 이 순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내는가'야 말로 중요한 질문이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이렇게 말한다. 분업 더 나아가 직업의 분화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말이다. 직업의 분화를 시각화해 보자. 분화라고 하면 수평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직업의 분화는 수직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항상 필요한 재화가 있는가 하면 풍요로운 시절에만 소비되는 재화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농업에 종사했던 시절은 있었지만 모두가 의료산업이나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던 시절은 인류역사상 있어 본 적이 없다.
서플라인체인이 길어지면 직업이 분화된다. 말 그대로 생산의 단위들이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다. 길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생산과정이나 작업과정이 삽입된다는 의미다. 다만 공간적 길이만이 아니라 시간적 길이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간적으로 긴 서플라이체인은 시간적으로도 길다.
서플라이체인이라는 개념은 물고기를 잡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손이나 몽둥이로 고기를 잡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많이 잡을 수 없다. 낚시바늘을 이용하면 성과를 오르는데 낚시바늘의 생산과 공급이 물고기를 잡는 서플라이체인에 포함되어야 하므로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 그물과 보트를 이용해서 좀 더 깊은 물에 들어가 좀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그물과 보트를 제작하는 과정이 서플라이체인에 포감되고 경제학자들은 그물과 보트를 제작하는 과정이 서플라이체인에 포함되고 경제학자들은 그물과 보트를 자본재 혹은 생산재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자본이 축적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는 금속과 전자산업이 결합된 장대한 서플라이체인을 요구한다. 트롤어선이야말로 고기 한 마리를 잡는 가장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방법이다.
서플라이체인을 한 단계 늘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자본을 화페뭉치로 생각하지 않고 서플라이체인이라는 생산과정의 변화로 인식할 때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을 바라볼 수 있다.
한 가정이 이런 희생을 할 때는 이미 존재하는 직업을 목표로 삼는다. 뼈를 깎는 인내가 요구되기는 해도 한 세대 만에 어느 정도 성취가 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회가 서플라이체인을 늘린다는 것은 이전에 없던 직업군을 창출한다는 의미로서 불확실성에 맞서야 한다. 농업사회가 경운기나 트럭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희생만으로는 부족하다. 불확실성에 배팅해야 하므로 외부의 도움도 받아야만 한다. 이 과정은 보통 한 세대 만에 이루어지기 어렵기도 하고 급격한 사회변화까지 유발한다.
직업의 분화가 일어나려면 여러 조건이 우연히 갖추어져야 하는데 보통 첫 단계부터 쉽지 않다. 생존에 밀착된 필수재 생산에서 충분한 잉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야박하지만 필수재는 사회구성원들이 먹고 살기팍팍한 상태가 균형점이다. 생산이 늘면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를 맬서서의 인구함정이라고 한다. 인구 증가에 앞서서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가 있어야만 이 비정한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게다가 이렇게 힘들게 얻은 잉여물이 낭비되지 않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연구개발에 쓰여야 한다.
우리가 농업사회라고 부르는 시대는 사실 무사관료들이 농민을 보호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농업과 함께 세견된 귀족문화가 꽃피우는 일이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농업의 잉여가 서플라이체인의 길이를 늘리는 즉, 직업의 분화를 폭발시키는 충분조건이 된 적은 거의 없다. 농산물의 잉여는 앨리트들의 허세(예술)나 정치적 재화(통치와 전쟁의 수단)에 투입되어 버렸다.
그럼 지중해 문명권에서 500년 전 직업의 분화가 촉발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우연을 답으로 제시할 수 있지만 이 탐구의 스케일에서 보면 이 역시 동어반복이다. 과학자 집단도 종심이 긴 직업군이므로 과학자들의 집단적 등장은 서플라이체인이 어느정도 길어지고 나서야 가능했다.
한 가지 단서가 바로 재산권이다. 서플라이체인의 종심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 사회에 생산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플라이체인의 종심이 길수록 재산권을 보호하기 어렵다.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보호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의 폭력으로부터 소유물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소유물을 감추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의 소유권의 개념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점유권 수준에 머문다면 서플라이체인이 성장하기 어렵다. 낚시바늘이라 그물까지는 숨길 수 있다고 치자. 이보다 생산적인 보트 같은 자본들은 남들의 시선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점유만으로는 소유권을 지킬 수 업는 상태라면 생산재가 누적되기 어렵다. 아마도 이것이 직업의 분화가 그토록 지연되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비트코인이 몰고 온 소유권 혁명
2017년 6월 미국의 몇몇 의원들은 1만 달러 이상의 비트코인을 소지하고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소유총액과 체류기간 중의 변동사항을 보고해야 하며 신고의무를 어기면 외국인임에도 구속까지 할 수 있는 강력한 조항을 규제안에 포함시키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의 말마따라 비트코인은 물리적 실체가 없으니 몸에 지닐 수도 없으며 주인을 따라서 국경도 넘지 못한다.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 비트코인에는 딱 맞는 진실이다.
대공황 이후 거의 50년 동안 미국 국민들은 금화나 금괴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다. 화폐주권에 도전하는 비트코인에 대한 규제의 종착지는 소유의 금지다. 따라서 거래소 폐지 정도가 아니라 비트코인 소유를 국가가 금지할 경우도 고려하고 있어야 한다.
2017년 12월 SEC 제이 클레이턴 의장은 월가 투자자들에게 암호화폐와 ICO 투자 전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글을 게재했다. 클레이턴 의장은 암호화폐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빌려서 비트코인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1.중재자나 지역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가치를 이전하며 2.결제나 변재 도구로써 최종적이며 3.다른 결제수단에 비해 수수료가 저렴하고 4.거래를 공증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표현했다.
이 속성 중에서도 <결제나 변제도구로서의 최종성>이 비트코인이 금융 혁신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장 잘 드러낸다. 디지털 자산이 최종성을 가지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어느 기관이 인정해 줄 필요가 없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동시키고 나면 복사본을 남기지 않아야만 계약의 이행수단 즉, 결제수단이 될 수 있다. 비트코인은 복사본을 남기지 않으며 어떤 기관의 승인도 필요 없는 인류 최초의 디지털 자산이다.
비트코인 가격이 1달러라는 의미 있는 가격을 갖기 시작한 건 2010년과 2011년 무렵이다. 이때 이미 화폐에 대한 기존의 국가통제가 회복 불능의 타격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비트코인을 이용하면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송금할 수 있게 된 기점이기 때문이다. 외화를 몸에 지니거나 금융망을 통해 계좌로 이체하지 않아도 되기에 국가가 금융네트워크와 국경을 틀어쥐고 개입하는 방식, 즉 전통적인 외환관리방식이 무력화되었다.
비트코인 개념이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전송수단과 화폐자체를 구분하는 오래된 사고체계 때문이다. 신용카드는 결제수단이지 달러나 원화와 같은 화폐가 아니다. 삼성페이나 애플페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전송수단의 성격도 있고 화폐의 성격도 있다. 왜 비트코인은 전송수단과 전송의 대상을 분리하지 않았을까? 금과 비교해야만 이 특성을 부여한 설계자의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금은 소유권을 이전해도 물리적 실체를 이동시키는 건 따로 해야 한다. 또한 청산을 요구할 때도 실물 금을 전달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네트워크에서 금화를 결제수단으로 이용하려면 소유권자 대신 금을 보관하고 청구하면 내어줄 기업이 필요하다 아무리 금을 맡기고 받은 디지털코드가 금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결제에 이용된다고 해도 이는 금에 대한 권리의 이전이지 금 자체의 이전은 아니다. 평상시에는 이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차단하려고 할 때, 이 두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이골드의 실례가 증명하듯이 정부가 금을 모아둔 금고를 압류하면 전자적 코드는 가치를 잃어버린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약속을 믿을 수 없을 때이다. 고객이 금의 디지털 권리를 구입하면 그만큼의 실제 금이 금고에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고객이 동시에 금을 청구하지 않는 한 보증인은 유통되는 권리만큼 금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 회사는 보관 중인 금을 빼돌려 다른 데 사용할 수 있으므로 금의 전자적 청구권이 금과 1대1로 교환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은행도 이와 비슷한 조작을 한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무엇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바로 그 '무엇'이다. 비트코인을 전자적으로 지구 반대편으로 보낸다는 건 금을 물리적으로 부치는 것처럼 '무엇' 그 자체를 보낸다는 의미다. 보내고 나면 이쪽 컴퓨터에 복사본이 남지 않으므로 전자코드임에도 물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진 비트코인은 최종적인 가치물이다. 정부가 빼앗을 수도 없고 복제도 불가능 하다. 개인키를 지배하는 사람만이 이 가치물을 보관하고 이전할 수 있다. 만약 비트코인의 가격이 1달러를 넘지 못했다면 비트코인은 그냥 코드일 뿐이다. 다른 상품과 교환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발명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신이 주목하고 합의해 주기도 전에 비트코인이 1달러가 넘어 의미 있는 가격을 갖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가격을 갖는 무언가가 네트워크상에서 자유롭게 그것도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감히 인류역사 최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운송비용이나 제3자의 보증을 전제하지 않고 가치물을 지구 반대편까지 빛을 속도로 보낼 수 있게 된 사건이 말이다.
미국의 포브스지는 지난 3월 1일 기사에서 비트코인이 자신의 내제가치를 세상에 보여주었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뽑았다. 기사는 최근 네 가지 사건을 들어서 비트코인이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캐나다 정부가 백신반대 시위대에 대한 후원계좌를 동결한 사건이다. 둘째,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월경하는 피난민들이 비트코인을 소지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돕는 후원금들이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로 쇄도하고 있다. 셋째, 놀랍지도 않지만 서방의 금융제재를 받게 될 푸틴의 러시아에게도 비트코인이 금융통제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넷째로는 값어치가 종이보다 빨리 떨어지고 있는 터키의 리라화다.
터키의 리라화 폭락은 비트코인의 인플레이션 헷지 능력을 증명한 것이지만 이는 비교적 익숙한 현상이었다. 나머지 세 개는 비트코인이 기존의 금융망을 타고 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이 특성은 지정학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들이 언제 비트코인을 금지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로서는 비트코인이 세계질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언젠가 미국이 비트코인을 완전히 금지할 것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만약 푸틴의 러시아야 SWIFT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우회해서 비트코인을 사용하면 미국정부로서는 오랫동안 사용했던 전략적 제재수단 하나가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실제로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비트코인을 제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미국의 정치가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뒤 바이드 대통령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에 대해서 포괄적 규제를 담은 행정명령서에 사인했는데 국가 안보와 관련한 부서들로부터 기한 내에 비트코인과 암호화폐가 미국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제한해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만 작용할까? 만약 그렇다면 미국의 관료들은 비트코인을 반대하는 쪽으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비트코인에 대해서 신중하거나 호의적이엇다. 약간 우호적인 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비트코인이 미국에게는 실보다 득이 많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무역적자국이다. 기축통화국의 어쩔 수 없는 부담이다. 미국이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처럼 자기 나라를 상대로 무역흑자를 내는 국가들을 바라볼 때 이들 흑자국이 환율을 조작한다고 의심한다. 흑자국이 달러에 대해서 자국통화의 가치를 내리면 미국의 수입업자는 유리하고 수출업자는 불리하다. 그런데 그 나라 국민들이 비트코인을 많이 가지게 되면 환율조절이 여의치 않게 된다. 이건 금본위제 속에서 무역흑자나 적자가 금의 유입과 유출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 때문이다. 국민들이 자국의 화폐가 아니라 비트코인을 많이 가지고 있고 외국에 자유롭게 보내고 외국에서 자유롭게 받으면 수출경쟁력을 위해서 자국통화의 가치를 일부러 떨어드리는 정책을 펼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중국이 비트코인을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을 미국의 고위 관료들은 일찌감치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비트코인이 각국의 이해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해서는 훨씬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 단순하게 이익과 손실을 나눌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비트코인은 금융망을 통하지 않고 국경을 넘을 수 있다. 공항 검색대나 국경수비대의 몸수색도 피할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도 빛보다 살짝 늦은 정도는 속도로 도달한다. 이런 특성 떄문에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한 지역의 일반 시민들에게 비트코인은 생명줄이 될 수 있다. 비트코인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트코인이 지정학적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챈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화폐를 꿈꾸는 사람들이 30년 동안 만들고자 했고 실패를 거듭하다 얻은 결실이다.
사람들은 비트코인이 지정학적 위기에 빠진 국민들의 동아줄이 되어줄 것이라는 주장을 비웃곤 했다. 그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평화적인 세상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 있다. 1945년 전쟁의 종료와 함께 만들어진 세상은 외견상으로 처참한 상태였으나 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역사상 보기 드물게 단순한 상태로 리셋될 수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제국들은 거의 몰락했으며 전쟁에 이긴 소련도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오직 미국만이 건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자신들이 생각해온 이상에 맞추어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설계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비록 공산주의의 도전이 지속되었지만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평화적인 질서와 함께 법치의 개념이 자리 잡았다.
글로벌 금융은 세상이 마치 원래부터 법대로 움직여온 것마냥 착시를 일으키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선 은행을 끼고 하는 원거리 무역에서 고려할 문제는 운송비용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전부였다. 통계적으로 계산 가능한 자연재해는 보험으로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에 원거리 무역의 모든 위험은 비용으로 치환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경제학자들이 수식을 파악할 수 있는 세상이 창조된 셈이었다. 현대 인문학에서 경제학이 제왕적 자리를 차지한 것도 포스트 1945시스템이 만든,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평화적인 질서의 시대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비현실적인 세상이 막을 내리고 있다. 미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또 제국이라 부르든 패권국가를 부르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애초에 한 나라의 국내 통화를 세계 무역을 결제수단으로 삼는다는 자체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예일대학교의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 교수는 기축통화국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무역적자를 떠안게 되는데 무역적자가 쌓이면 국가신뢰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어서 기축통화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고 일찌감치 예견했다. 그의 예견을 맞아떨어졌고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크고 작은 분쟁에 개입하느라고 엄청난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 달러를 찍어낼 수 밖에 없었다. 비현실적으로 좋았던 시절은 이런 보이지 않는 막대한 세금으로 유지된 셈이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오래된 국가들과 민족들이 즐비하다. 민족적 갈등은 역사적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에 실타래를 풀 수 없을 만큼 뒤엉켜 있다. 그런데 석유나 물자를 실은 배들은 그런 갈등 지역을 오고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행세를 내거나 갈등에 휩싸여서 가라앉거나 압류되지 않을 수 있었다. 현대 경제시스템의 토대는 물자의 긴 운송로를 지켜주는 미국의 해군력과 유라시아 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의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어떤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미국이 자국의 돈을 찍어내서 외국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무역적자를 지속적으로 쌓는데도 흑자국들이 미국의 채권을 구입해주는 식으로 기축통화로써 달러의 가치를 지지해준다. 즉 빚이 계속 갱신되는 셈이다. 이런 말이 좀 안되는 행태가 글로벌 경제시스템을 뒷받침하는 지정학적 보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세금이었다. 어느 나라의 정치가도 노골적으로 입 밖에 내고 싶어하지 않는 진실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걸 보면서 어떻게 21세기에 저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떤 의미에선 세상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이 같은 행보는 예전처럼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에 깊이 관여할 의지가 없다는 미국의 시그널이며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것을 정확하게 읽은 푸틴 대통령의 지정학적 모험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지금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미국 없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처럼 지정학적 비극을 맞이한 개인들이다. 유럽과 동아시아에 새로운 패권이 잡을 때까지 사람들은 익숙한 과거로부터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세상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경험을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인데 무엇보다 은행에서 돈을 찾을 수 없거나 돈을 보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국경을 넘을 때 몸수색을 당할 것이고 값나가는 모든 것들이 모래알처럼 손에서 빠져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지구 어디에선가는 정정 불안, 경제 위기, 전쟁 등으로 한 국가나 지역 경제 시스템이 붕괴 직전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이런 국가의 국민들일수록 정부의 방해를 뚫고 외부세계와 연결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기존의 금융 시스템만으로는 궁지에 몰린 국민들을 도와줄 수 없다. 평온한 나라의 국민에게 비트코인은 한낱 투기 수단이거나 흥미로운 발명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위기에 처한 국가의 시민들에게는 삶과 직결되기에 대체품이 따로 없는 희망이다.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2022년 3월. 1억 4922만 달러어치의 비트코인이 예치되었으며 노드 수도 3만 5천을 넘었다. 결제 처리 속도는 비자의 1660배에 이른다. 라이트닝네트워크의 성장이야말로 단지 투자를 위해서 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을 거래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사용을 위해서 비트코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전 지구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실은 애플의 아이폰이나 삼성의 갤럭시에게 특별한 메세지를 던진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는 평생토록 은행계좌를 만들지 않는 이들이 절반을 넘는다. 신용카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신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은 이들에게 매우 귀중한 재산이다.
아이폰이나 갤럭시가 바로 소유자들과 1:1로 라이트닝네트워크 채널을 만든다고 상상해보자. 가장 큰 허브가 되는 셈이다. 사용자는 소량의 비트코인을 스마트폰에 예치하고 결제에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비트코인의 가격이 변동하므로 두 회사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현재가로 동결하거나 매번 시가에 맞추는 선택권을 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동결하면 사용자는 변동성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가격이 오르면 아이폰이나 갤럭시가 수익을 취하면 되고 가격이 내리면 회사의 손실이다. 그러나 사용자가 많으면 이는 통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서 회사로서는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으로 아이폰이나 갤럭시는 어떤 은행보다도 많은 예치금을 보유한 금융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은 닉 사보가 30년 전에 상상한 전자적으로 통제 가능한 이상적인 담보자산에 가깝기 때문에 신용가트 사기와 같은 문제로부터도 자유롭다. 한 해 전 세계적으로 280억 달러가 넘는 신용카드 사기 규모로 볼 때 이는 결코 작은 이점이 아니다.
전기산업은 비용 효율성이 낮다. 특히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 재생에너지일수록 효율이 낮다. 계절이나 시간대에 따라 수요가 일정하지 않고 전기를 오래 보관하거나 멀리 보재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비트코인 채굴은 궁극적으로 수력,지력,풍력발전소의 경영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발전소는 비수기에 낭비되는 전기를 이용해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성수기에는 채굴하지 않을 수 있다. 버리는 전기로 비트코인을 생산해 얻은 수익은 전기료 인상요인을 제거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기 소비자들에게도 이익으로 돌아온다.
지방정부들은 피크타임을 기준으로 전력공급능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블랙아웃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피크타임이 아닐 때 전기 수요는 생산설비에 미치지 못한다. 피크타임은 계절적인 요인도 있어서 일 년에 며칠 동안 피크시즌, 그중에서도 피크타임을 기준으로 설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이 말은 평상시에는 절반 가까운 설비가 가동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기가격만 유연하면 전기차의 주인들은 피크타임을 피해서 충전하려 할 것이다. 낭비되는 발전설비를 전기차가 활용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부담없이 총행복을 끌어올릴 수 있다. 따라서 물리학적으로는 아닌 듯이 보여도 경제적으로 보면 전기차는 친환경차가 맞다.
마찬가지로 기업형 채굴업자는 1년 중 피크시즌과 하루 중 피크타임에는 전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기업형 채굴업은 전기사용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발전소가 어렵지 않게 현황을 파악해서 감독할 수 있다. 피크타임 전기료를 할증하지 못하는 경색된 가격정책으로 인해서 피크시즌의 피크타임 전기도 영세한 개인 채굴업자가 사용하곤 하겠지만 기업형 채굴을 양성화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문제다. 발전소가 채굴업자와 전략적으로 협력하면 발전소의 경영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
피크시즌일 때는 채굴업자들이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니 비트코인 시스템이 허약해질까? 지구적으로 보면 피크시즌도 다르고 시간대에 따라 피크타임도 달라진다. 보통 산업수요와 가정 수요가 겹치는 늦은 오후부터 초저녁이 피크타임이다. 비트코인은 지구적으로 단일 시스템이다. 어느 지역의 전기료가 비싼 시즌에는 다른 지역의 전기가 사용된다. 따라서 지구 어디서나 24시간 채굴기가 돌아간다. 이렇게 비트코인 시스템은 때와 장소를 바꾸어 가면서 싼 전기를 찾아내서 채굴기를 돌리므로 발전소와 협력해서 국지적으로 채굴을 차단하는 해우이가 시스템의 강건성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에르난도 데소토가 쓴 [자본의 미스터리]는 블록체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블록체인이 몰고 올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는 페루나 저개발국가의 국민들이 자산을 자본화할 수 없어서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자산을 담보로 금융을 끌어올 수 있으면 교육도 받고 사업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저개발국가일수록 소유권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은데다 등기제도도 발달하지 못했다. 금융기관이 신뢰할 만한 자산이 적다는 건 선진국의 국민들처럼 집이나 신분을 담보로 학자금이나 사업자금을 끌어오기 어렵다는 의미다. 결국 서플라이체인이 긴 직업으로 진출하지 못하므로 날품팔이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렇게 자본화할 수 없는 자산을 '죽은 자본'이라 부른다. 빈곤의 원인은 시간의 지평이 협소한 때문이기도 하다. 삶을 전망하는 시야의 지평이 짧을수록 저축보다는 소비를 즐기며 그것도 당장의 생존과 감각적 쾌락을 충족하는 데 투입한다. 협소한 시야는 금융지원을 받지 못해서 생기는 빈곤의 습관으로서 사회적으로는 하나의 문화를 이루기도 한다. 소유권에 관한 신뢰할 만한 기록과 등기제도가 갖추어져서 죽은 자본에게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면 빈곤의 습관도 바뀔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사회도 발전하는 문화로 전활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스마트콘트렉트에는 약속의 불이행이라는 개념이 없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도 프로그램 안에서는 하나의 선택사항이므로 선택에 대응하는 결과를 얻게 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부상의 변화 자체가 실제적인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스마트콘트랙트에 따라 비트코인의 주소가 변경된다면 이 거래는 그것으로 종결된 것이다. 금융기관이 법원의 명령에 따라 지불을 철회할 수 있는 온라인 뱅킹이 아니라 현찰거래와 비슷하다. 바로 이 속성 때문에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있어도 협력이 가능하다. 내전상태에 있는 소비자나 생산자와도 무역이나 금융거래 가능하다. 산업사회에서도 기존의 규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금융파생계약의 폭과 대상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만약 비트코인이 가격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면 블록체인 기술만 가지고는 스마트콘트랙트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 금융망이 통제할 수 있는 송금시스템으로는 계약의 이행여부를 조건으로 자산의 장부상태를 변경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금융망에서 거래를 승인하는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부상태가 변화해도 이것이 재산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스마트콘트렉트를 맺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고가의 자산이기 때문에 계약에 따라서 비트코인이 이동하면 계약은 완료된다. 따라서 비트코인이 1달러를 넘은 이후 스마트콘트랙트는 정부의 도움 없이도 활성활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