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로운 금융 기법의 매끄러운 예술적 기교에 반한 그리스펀을 필두로 연준의 정책 담당자들은 파생상품에 대해 자유방임적인 접근을 택했다.
어떤 형태로든지 마진 규정을 고쳐 파생상품 업계에도 적용시키는 대신, 놀랍게도 그린스펀은 그 규정 자체를 없애자고 제의했다.
거래를 많이 할 수록(그래서 더 많이 빌릴수록) '유동성' 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고 근본적으로 좋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상의 제약을 없애는 것이 더 많은 대체 금융을 허용하여 좀더 효율적인 유동성 관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중개인과 거래인들의 수익과 안전성을 배가 시켜 줄 것입니다. 중개인과 거래인들의 경우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그들의 증권 여신을 감독할 하등의 정책적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약간의 유동성은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돕는 윤활제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펀이 간과한 것은 유동성이 너무 많으면 시장이 트랙에서 벗어나 넘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거래가 너무 많아지면 투기를 부추기게 되고, 시장이 아무리 유동적이라도 최후의 심판날에 팔려고 하는 모든 이들을 수용할 수는 없다.
은행들의 대차대조표는 계속해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월스트리트는 25대 1의 비율로 차입거래를 하고 있었다. 유동성이 넘쳐나 유동성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된 은행들은 자신들의 자산을 배출할 곳을 찾았고, 가장 유혹적인 곳이 헤지펀드였다.
아무도 전체 부채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누구나 묻지 않고 빌려주었다. 각 은행들은 개별 고객에 대해 자신들이 빌려준 금액만을 알고 있었다. 특히 LTCM에 대해서 그랬다. 아무도 이 헤지펀드가 열두세 군데의 다른 은행들에도 비슷한 채무를 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과 엄청난 규모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합시다" 스위스 은행의 매니저 시실리아노는 회상했다. "그러면 당연히 자신이 LTCM의 가장 큰 거래처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을 10번째쯤 되는 거예요. 그들이 그렇게 큰 규모로 일을 벌여놓고 있었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한 그들의 열망은 끝을 몰랐고 위험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성의 신봉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칼날 위헤서 발버둥치게 된 결말은, 더욱 부유해져야만 자신들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1997년 상반기에 펀드는 수수료를 포함해서 13%(종전의 평균치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놀라운 숫자였다.)밖에 벌지 못했다. 차입 비율이(파생상품은 제외하고) 30대 1에서 20대 1로 줄었다는 것은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숄스를 비롯하여 일부 회의적인 파트너들은 펀드의 포트폴리오에 대해 점점 불안해했다.
그러나 일본시장만은 전망이 밝았다.
우연히도 차익거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과 때를 맞추어, 두 명의 금융학 교수가 차익거래는 그 신봉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리스크가 높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LTCM 같은 유형의 차익거래 회사는 만약 '노이즈 트레이더(정보가 없는 투기꾼이란 뜻)' 가 실제의 가치 이하로 가격을 떨어지게 하면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통찰력 있게 경고했다.
머턴은 발표되기 전에 이 논문을 읽었지만, 그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데 증서 계약 후 몇 주가 지난 7월에 국제시장이 크게 흔들렸다. 채무 불이행에 직면한 태국에서 통화 가치가 20%나 폭락했다. 그리고 통화 가치의 폭락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한국에까지 파급되었다.
파트너들은 워터빌에서 메릴린치와 연례 골프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놀라운 강령을 발표했다. LTCM의 외부 투자가들로 하여금 투자액의 절반을 회수해 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프레드는 계속해서 줄고 있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 계획은 LTCM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단짝인 숄스와 머턴 역시 돌려주는 데 반대했다. 그들은 회사가 자산 관리자란 명분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에 펀드의 상당한 지분을 소유한 힐리브랜드와 하가니는 다른 소유주들과 이득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돌이켜볼 때, 외부 투자가들이 펀드에 계속 투자하게 해달라고 사정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강제로 돌려받게 된 투자금은 하느님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파트너들이었다. 앞뒤도 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부를 추구했던 파트너들의 행동은 탐욕 그 이상이었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그들은 다른 이들의 자산을 관리하는 일에 흥미를 잃고 그들 대부분을 몰아냈다. 그들의 비정상적인 이기심은 마침내 회사의 직원들이 보너스를 투자하는 경우에도 수수료를 징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기회가 사라지고 있을 무렵, 포트폴리오는 7,600개의 포지션으로 비대해져 있었고, 펀드는 이카루스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듯 방향이 잘못된 차입거래 규모를 무모할 정도로 크게 늘려갔다.
LTCM과 모회사격인 살로먼을 출범부터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두 회사 모두 차익거래 사업이 힘든 시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두 회사의 반응은 180도로 달랐다. 버핏은 살로먼을 좀더 다양한 파트너와 합병시킴으로써 살로먼의 주주들이 차익거래 사업과 시타 살로먼의 사업 분야에서 얻게 될 수익을 줄였다.
LTCM의 파트너들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사업을 더 크게 확대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파트너들의 것을 사들여서 더 큰 확장, 차익거래 투자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버핏이 수익성 없는 기업을 넘기고 90억 달러를 벌었는데 반해, LTCM의 파트너들은 안정적인 수입원을 미래의 (실현되지 않은) 거대한 도박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10월에 펀드에는 아주 좋은 일이 생겼다. 머턴과 숄스가 경제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겸손하게 "측정 가능하다고 해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개인의 신념을 밝히기에는 좋지 않은 시기였다. 아시아 전역을 가로질러 통화시장과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투자가들은 아시아의 혼란이 전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완전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하락에 대비한 보험을 판 옵션 발행자들은 10년 전의 블랙 먼데이 때와 마찬가지로 다급하게 주식을 팔아치워야 했다.
머턴과 숄스의 망령이 다시금 병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 매도의 연쇄 반응, 즉 머턴이 자신의 모델에서 그려낸 '역동적인 헤지하기' 가 시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LTCM은 다시 총알을 피했다. 펀드는 10월과 11월에도 성과를 올릴 정도였다.
그러나 교수들은 아시아의 더욱 거대한 진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시장은 더욱 단단히 연결되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자산들이 함께 올라가고 내려간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직전에 멀리 떨어져 보이던 뉴스가 와락 현실로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신용평가 회사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가 러시아의 국가 채무에 대한 평가 등급을 낮춘 것이다.
시장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비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98년 초, LTCM은 대량의 '주식 변동성' 을 공매했다.
그러나 LTCM의 장기인 '주식 변동성 거래'가 펀드를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몰고 갔다.
주식 변동성은 블랙-숄스 모델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주식의 변동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적으로 변할 것임을 전제로 한다.
이와 비슷하게 LTCM은 옵션시장이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대략 20%로 예상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LTCM은 실제의 변동성이 15%였기 때문에 시장의 예측은 틀렸고, 옵션 가격은 조만간 하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LTCM은 매도를 시작했다. 특히 S&P 지수 500과 유럽 주요 시장의 이와 같은 지수들에 포함된 주식의 옵션을 공매했다. 그들의 은어를 빌려 말하자면, 교수들은 '변동성을 팔았다.'
그리고 LTCM은 매일 옵션 가격의 동향에 따라 돈을 받을지 줄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 변동성(에 대한 가정)이 옳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오직 단기간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큰 거래에서 5년에 걸친 고통은 대단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사실상 LTCM은 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투자가들이 가격을 더 높이지는 않으리라는 데 거는 것이었다. 파트너들의 신조와는 달리 이것은 말 그대로 '투기' 였다. 파트너들은 단기간의 변동이란 운수에 스스로를 내맡김으로써, 자신들의 정확한 수학적 모델이 가지는 장점을 버린 것이다.
1998년 1월의 시장은 흐름이 좋았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여 아시아의 안정 기조를 다졌다. 유로화의 출범이 1년도 남지 않은 유럽에서는 투자가들이 낙관주의에 젖어 있었고, 미국에서는 다우지수가 신기록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투자가들이 자신감을 회복함에 따라 채권 스프레드는 줄어들었다.
이 같은 순조로운 흐름은 위험이 아직은 얼마간 더 남아 있었는데도 지난 가을의 위기는 지나갔다는 일반적인 느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혼란 직후인 1997년 10월에 메릴린치는 자사의 채권 트레이더들에게 거래를 줄이라고 명하고 빠져나갔지만, 1998년 초에는 종전의 사업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들 중 아무도 아시아의 위기가 확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파트너들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대출을 받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당할 만한 것으로 보였다. 한 평가에 따르면, 힐리 브랜드 혼자 5억 달러 정도를 떠안고 있었고, 메리웨더 역시 수 억 달러를 안고 있었다.
그들의 모델에 따르면 자신들이 하루에 잃을 수 있는 최대 액수는 4,500만 달러였다. 또한 같은 모델에 따르면, 회사가 계속 불운에 빠질 확률(예를 들어 한 달에 자본의 40%를 잃을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미미했다.(그때까지 그들은 최악의 달에도 단지 2.9%만 잃었다) 사실 이 숫자는 펀드가 1년 안에 자본 전부를 잃을 확률로서 이른바 '텐 시그마 이벤트', 즉 10의 24제곱에 한번 나올 수 있는 통계적인 의미나 가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파트너들이 불안해한 것은 잃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처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할까봐였다. 적당한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는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그들은 더욱 외래의 볼모지(브라질이나 러시아의 채권 및 덴마크의 저당권 등)를 개척해 들어갔다.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거래해야 할 시기임에도 파트너들의 주간 리스크 관리 회의는 점점 판에 박힌 것이 되어갔다. 그들은 더 이상 이탈리아 채권의 경우처럼 거래에 대해 차분히 조사와 분석을 행할 인내심이 없었다. 때로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과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과 같았다. 숄스는 회사가 투자하는 여러 곳에 대해 반대했다. 회사는 거래액이 큰 일부 투자처에서 이미 말썽을 겪고 있었다. 분명한 적신호였다. 머턴, 뮬리스, 맥킨지 역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반대하려면 그만 두라는 소리에 반대 의견은 쑥 들어갔고 남은 방법은 메리웨더나 로센펠드에게 두 시니어 트레이더(힐리브랜드와 하가니)를 설득해 보라고 하소연하는 것 뿐이었다.
힐리 브랜드와 하가니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러시아가 자본주의자들의 다음 번 극락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지요. '아시아 문제는 끝났어. 다른 곳으로 가자구! 이들 지역에 들어간 돈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파트너들은 또 다른 새로운 분야, 즉 사설 주식 투기 사업을 모색했다. LTCM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6월 한 달에 펀드는 10%의 손실을 보았다. LTCM으로서는 사상 최악의 달이었다. 이로서 LTCM은 1998년 상반기 동안에 14%의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LTCM이 걷게 될 기나긴 손실 행진의 시작일 뿐이었다.
러시아는 LTCM 식의 트레이딩에는 대단히 좋지 않은 실험실이었다. 공산주의를 벗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았고 민주 사회로 가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러시아는 그 특성상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다. 역사학에 조예가 있는 하가니라면 그 점을 인식했어야 하였다.
미국과 유럽에서 시장은 쌓여만 가는 악재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러시아의 위기, 아시아의 악화, 이라크의 무기사찰 거부, 중국의 위안화 평가 절하 가능성, 그리고 백악관 직원인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관계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증언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전세계 투자가들은 러시아와 아시아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한 편으로, 안전성의 상징인 미국 재무부 채권을 미친 듯이 사들였다. 30년 만기 채권은 수익률이 5.56%로 떨어져 최저 기록을 새롭게 갱신했다.
자연히 크레디트 스프레드는 계속 벌어져갔다.
LTCM은 8월에 손실을 입었다. 파트너들은 더 이상 월스트리트에 대해 거만하게 굴 수 없었다.
LTCM은 8월에 손실을 입었다. 파트너들은 더 이상 월스트리트에 대해 거만하게 굴 수 없었다.
LTCM은 한때 중소 은행들을 냉대했지만 이제는 리먼브라더스에 친절히 대했다. "그들이 사업을 좀더 많이 해보자고 계속 찾아왔습니다." 리먼의 고정수입 부서장 제프리 밴더비크는 회상했다. "유동성이 말라버린 모양이구니"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메리웨더는 8월 중순에 들어 자신만만하게 중국 여행길에 나섰다. 파트너들은 자신들이 낙관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프레드가 너무 많이 벌어져 있어서 이제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주의에는 위험한 요소가 있었다.
8월 중순에 LTCM은 이미 헤지해 놓은 러시아 채권 못지않게 헤지하지 못한 채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대한 투자 액수를 더욱 크게 늘렸다. 러시아는 전세계가 주시고 있는 가운데 재정난에 직면하여 정부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는 노벨상이나 박사학위 따위는 상관도 없었다. 교수들은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LTCM의 한 트레이더의 말을 빌리면, 펀드는 "막판에 승산이 낮은 러시아에 몽땅 걸었" 던 것이다. 다른 트레이더는 비통하게 토로했다. "그건 전혀 우리답지 않은 짓이었습니다."
문제는 LTCM의 재앙이 단순히 하나의 고립된 사건, 즉 자연이란 항아리에서 어쩌다가 뽑힌 나쁜 패였는가, 아니면 시장의 모든 사람이 모든 리스크를 동시에 헤지할 수 있다고 하는 블랙-숄스 공식 자체가 불어넣은 허상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인가 하는 것입니다.
머턴 밀러. 미국 경제학회 주최 노벨상 수상 기념 오찬에서의 연설(1999년 1월 4일)
그들은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이기까지 한 사건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자신들의 운이 얼마나 빨리 바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런 사건이 벌어지면 일어날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도 간신히 상상만 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늦여름에 접어들어 월스트리트의 사람들이 햄턴스에서 지내고 있을 때, 파트너들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성공했으며 가장 자부심 강한 투자가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펀드는 자본금이 36억 달러나 되었는데, 그 중 2/5가 그들 개인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불과 5주 만에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8월 17일 월요일,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최소한 일부 채권자들에게는 통화의 평가 절하도 디폴트도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던 러시아 정부의 약속 불이행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최소한 처음에는 잠잠했다. 멕시코와 브라질의 채권이 하락하고, 일본과 여러 신흥시장에서 주가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다우지수는 거의 150포인트나 올랐다. 미국의 은행들은 192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존중하여, 재빨리 이번 폭풍은 악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가 큰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라고 단언했다. 총부채 측면에서 러시아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투자가들은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다음에는 단체로 신흥 시장 중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러시아의 채무 불이행 사흘 뒤인 목요일에 전세계의 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투자가들은 이제 신흥 시장들에서뿐만 아니라 투자 리스크가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이면 무조건 벗어나고자 했다.
말 그대로 심리다. 비슷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기 다르다. 각각의 사건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에서는 덤덤하다가도 몇 번의 중첩된 사건은 사람들의 심리를 극단적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지금은 어떤가? 그 와중에 레버리지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가지고 있다면?
신용시장에 가해진 타격은 더욱 컸다. 재무성 채권은 급반등했는데, 이것은 공황 심리에 따른 것이었다. 투자가들이 불량 채권의 리스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재무부 채권을 사들였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들은 리스크를 제대로 분별하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오로지 리스크만 생각했다.
전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안전한(수익이 적은) 채권을 사고 더 위험한(수익이 높은,하이일드) 채권을 팔아, 두 채권 사이의 스프레드를 더욱 벌려놓았다. LTCM은 1분마다 수 백만 달러씩을 잃었다.
그러다가 미국 스왑 스프레드 시세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크래스커가 아는 한 미국의 스왑 스프레드는 하루에 많이 움직여봐야 1포인트 범위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의 스왑 스프레드는 20포인트 범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결국 놀랍게도 9포인트가 올라 76포인트로 마감되었다.
트레이더들은 이 같은 움직임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 금요일 날에 LTCM은 투자한 모든 곳에서 돈을 잃었다.
마침내 불도저 한 대가 그를 덮친 것이었다.
회사가 하루에 3500만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을 일은 거의 없다고 고도의 수학적 정확성으로 계산하던 LTCM은 그 금요일 날에 자본의 15%에 상당하는 5억 5,500만 달러를 잃었다. 연초에 46억 7000만 달러에 달하던 것이 순식간에 29억 달러로 줄었다. 4월 말 이후로 LTCM은 순가치는 1/3 이상을 잃고 만 것이다.
그들은 결국에는 스프레드가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프레드는 항상 돌아온다' 고 하는 젊은 시절의 경험은 지금까지 메리웨더의 경력에서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본 손실로 인해 LTCM의 차입 비율은 위험할 정도로 높았다. 따라서 파트너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뭔가를 팔아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을 팔 것인가? 투자가들은 리스크가 최소인 채권만을 원했는데 LTCM은 그런 채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가지 방안은 합병 차익거래였다. LTCM은 거래 포트폴리오에서 합병 포지션이 크게 늘어 50억 달러라는 막대한 액수에 달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는 시티코프/트래블러스,MCI/월드콤 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요일 저녁, 로센펠드는 오하마의 자택에 있는 워렌 버핏에서 전화를 걸었다. 로센펠드는 1991년 모저 스캔들 뒤에 살로먼에서 열심히 사태를 수습하여 살로먼의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버핏의 찬탄을 받은 일이 있었다.
버핏은 귀 기울여 들었지만, 곧 자신은 한동안 합병 차익거래에 손대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레고리 호킨스는 조지 소로스의 펀드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메리웨더와 소로스 및 이 억만장자의 최측근 참모인 스탠리 드러큰밀러 3인의 아침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들은 투자도 다른 방식으로 했다. LTCM은 시장을 가격들이 합리적인 균형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보았다.
"나는 다르게 봅니다." 소로스는 그렇게 말했다. 이 투기꾼은 시장을 유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정상분포 곡선이란 틀린 개념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예외적인 현상들이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멘도사는 LTCM의 포트폴리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했다. 메리웨더가 힐리브랜드에게 스왑 포지션에 대해 멘도사에게 설명하도록 했는데, 흥분한 힐리브랜드는 거의 눈물까지 내비치며 자신의 귀중한 포트폴리오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너무나 확신에 차 있던 그는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제 그의 엄격하게 질서가 잡혀 있던 세계에 균열이 나타날 조짐이 있었고, 개인적인 파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처지였다. 자신이 철저히 틀렸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그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