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LTCM의 흥망성쇄를 다룬 책이다. 1차적 사고 - '나' 에서 사고가 멈추는 단계, 2차적 사고 - 남을 생각하지만 나 이외의 타인을 나보다 떨어지는 지능으로 보는 단계. 라고 정의 한다면 2차적 사고에서 멈추었던 그리고 그들의 커리어상 그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천재였던 그들이 어떻게 시장에 뛰어들고 성공하고 처절하게 실패하는 지에 대한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흥망성쇄가 짧게 LTCM이 만들어진 1994년부터로 본다면 불과 4년만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심지어 '쇄'는 짧게 잡으면 불과 5주 만이었다.) 시장은 교만한 자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시장은 불확실하고 천재들은 그걸 측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건들이라고 측정했던 사건들이 수년마다 몇차례씩 나오는 곳이 시장이었다.
시장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들의 확신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레버리지를 썼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레버리지는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 책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똑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리스크를 신중하게 대했고 얼마나 신중한 성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랬다.
나오는 인물들이 레전드들이다. 블랙 숄즈 모형의 숄즈, 머턴 뿐만아니라 머턴의 스승 새뮤엘슨, 샤프 지수의 윌리엄 샤프에... 버핏도 나오고 조지 소로스와 드러큰밀러에 세스 클라만도 나옴..
그들은 채권에서 옵션으로 주식을 점점 자신들의 모델을 확장해왔고 잘모르는 분야에도 엄청난 차입거래를 통해 투자했다. 스스로가 화를 부른거다.
책 자체는 번역오류도 많고 오타도 너무 많고.. 아쉬운 부분은 많지만 LTCM의 교훈은 투자자라면 꼭 깊이 생각해봐야한다. 이 책은 투자가 잘 될 때, 자신이 올라갈데로 올라갔을 때 꼭 다시 읽어봐야 할 것이다.
<서론>
연방준비은행은 항상 논쟁의 조절자로 자리를 지켜왔다. 월스트리트와 나란히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인가 하면, 시장이 혼란을 맞은 와중에서도 초연하게 버티는 기관이었다. 맥도나우에게 간섭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혼란을,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1998년 초가을에 맥도나우는 결코 작지 않은 간섭을 해야 했다.
말썽의 원인은 아주 사소하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어서 중요하지 않게 보였다.
이번 경우에 총성은 LTCM이었다. 월스트리트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코네티컷 주 그리니치에 본사를 둔 이 민간 투자회사는 투자가 100면만의 돈을 관리했다. 미국인들 중 99%는 직원이 200명도 채 안 되는 이 회사가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사실 5년전만 해도 LTCM은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사실 8월 중순부터, 그러니까 러시아가 루블화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된 때부터 세계의 채권시장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LTCM 펀드는 살로먼 브라더스 출신의 유명한 트레이더 존 메리웨더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다.
은행가들이 LTCM에 대단히 좋은 조건으로 금융을 지원하는데 동의한 까닭은 순전히 메리웨더 때문이엇다. 그러나 그는 LTCM의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펀드의 핵심은 모두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머리 좋은 트레이더 그룹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대학교수였고, 노벨상 수상자도 두 명 포함돼 있었다. 모두들 매우 똑똑했고 그들 자신 역시 스스로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난 4년 동안 LTCM은 월스트리트에서 질시의 대상이었다. 펀드는 1년에 40%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손실을 입거나 불안정에 빠지는 일이 한번도 없어 리스크가 전무해 보였다. LTCM의 지적인 슈퍼맨들은 엄격하고 냉철한 머리로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언제나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베어스턴스의 최고 경영자 제임스 케인은 펀드의 가용 자금이 5억 달러 이하로 떨어질 경우, LTCM의 청산 결제를 중단하겠다고 단언한 바 있었다. 연초만 해도 LTCM의 자본은 47억 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5주 동안, 그러니까 러시아가 지급 불능을 선언한 이후 LTCM은 계속해서 손실을 입고 있었다.
그동안 LTCM의 비밀스럽고 까다로운 수학자들은 월스트리트의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해 왔다.
그러나 LTCM은 그들을 경멸했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조건만 고수했을 뿐, 은행들이 제시한 절충안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1부>월가 최고의 드림팀으로 성장하다.
존 메리웨더가 살로만브라더스에서 일하는 동안 깨우친 한 가지 믿음이 있다면, 손실은 이윤이 될 때까지 그냥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엑스테인에게는 두 가지 가격이 앞으로 오를지 내릴지 알 필요가 없었고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관건은 어떻게 이 두 가격이 서로 관련을 맺으며 바뀌는가 하는 데 있었다. 엑스테인은 선물을 사고 현물 증권을 공매함으로써 이 두 가지를 각각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거래에서는 돈을 벌고 다른 한쪽의 거래(선물)가 현물보다 약간이라도 더 올라준다면(또는 약간 덜 떨어지기만 한다면), 벌고 있는 쪽의 거래 이득이 잃고 있는 쪽의 손실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76년 6월에 이 같은 패턴이 뒤집어졌는데, 그 이유는 선물 가격이 현물 가격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 엑스테인은 곧 정상적으로 가격이 회복될 거라 믿고 한판 크게 벌였다. 그러나 보상은 커녕 오히려 가격 차이가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엑스테인은 엄청난 마진콜에 시달리다 못해 선물을 팔아 치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메리웨더는 살로먼 내의 채권 차익거래팀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는 엑스테인의 거래가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조만간 가격이 반드시 보상될 것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메리웨더는 도박을 좋아했는데, 다만 이길 확률이 높을 때에 한해서만 그랬다. 실제로 도박은 그가 신중하게 리스크를 감수하는 태도를 통해 이득을 올리던 분야였다.
그는 기상예보를 확인하여 리글리 구장에서 바람이 어떻게 불지 여부를 예상하고 시카고 컵스에 내기를 걸 정도로 신중했다.
점차 세계 각국 정부는 자국의 금리와 환율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완화해 나갔다. 고정된 관계의 세계는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돈이 가장 주목받는 상품이 되었다. 선물거래가 재무부 채권이나 증권, 일본 엔화 같은 금융상품에 새로운 게약을 가져왔고, 새로운 증서와 새로운 옵션, 그리고 새로운 채권 등이 곳곳에 넘쳐나면서 전문적인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 말에 이르러 살로먼 같은 회사들은 호머가 꿈도 꾸지 못한 방식으로, 예컨대 흩어져 있는 주택저당증권을 하나로 합친 후 잘 다음어 먹기 좋게 한 입 크기의 저당권으로 만드는 식으로 채권을 잘라 굴리고 있었다.
채권 값을 결정하는 요소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채권의 액면에 나타나 있다. 만약 당신이 10%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줄 수 있다면, 12%의 수익을 올릴 채권을 프리미엄을 주고 사는 것이다. 프리미엄이 얼마냐 하는 것은 채권 만기일과 지불 시점, 미래의 이율에 대한 당신의 예상(예상치가 있다면)과 채권의 상환 가능성, 현금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 등등 여러 조건에 달려 있다. 다른 요소는 채무 불이행의 위험도다. 대개의 경우 이 요소는 꼭 숫자로 집어 말할 수 없고, 또한 리스크가 별로 크지도 않다.
채권의 리스크가 클수록 스프레드도 커진다. 즉 그 채권에서 얻는 수익과 재무부 채권(실질적인 무위험자산)에서 얻는 수익의 차이가 커진다.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개 그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진다.
가끔씩 이들 다른 투자가들이 겁을 먹고 자신들의 자본을 되찾아가고 싶어해서 일시적이나마 스프레드를 더 벌려놓아, 메리웨더는 손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거래를 계속 유지할 자본만 있으면 장기적으로는 보상을 받았으며, 이와 같은 그의 경험은 거의 적중했다.
다시 말해서, 손실을 입은 거래는 종국에는 회복되지만, 회복이 너무 늦어서 트레이더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트레이더가 도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길 때도 질 때와 똑같이 반쯤 긴장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는 대체로 트레이더들을 망치는 두 가지 감정, 즉 두려움과 욕심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자신의 이기심을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고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 메리웨더의 옛 동료 작가 마이클 루이스가 평가한 메리웨더 -
당시 월스트리트에는 사나이들의 게임인 트레이딩에 먹물들은 어울리지 않는 '샌님' 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먹물들은 곧 월스트리트를 장악했다. 그들은 얻을 수 있는 한 모든 채권의 과거 가격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리고 채권 가격들의 과거 동향을 조합하여 그 가격들이 미래에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모델을 고안해 내었다. 또한 시장 가격이 평소 움직임에서 벗어나면 컴퓨터 모델이 신호를 보내도록 했다.
"수익성 곡선, 변동성, 금리 등에 관한 전세계의 지표를 주면, 금융시장들은 서로 불일치하는 진술들을 내놓지 않겠는가?"
모든 가격이 각각 하나의 '진술'이다. 만약 두 진술이 상충한다면 바로 여기에 차익거래의 기회가 있다.
교수들은 '비효율성'이 오히려 기회라고 했다.
더욱이 교수들에게는 학문을 통해 익힌 굳은 심념이 있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시장은 더욱 효율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덜 위험한 채권과 좀더 위험한 채권 사이의 스프레드가 점점 줄고 있다고 믿었다. 이 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스프레드는 자산을 위태롭게 하는 '불확실성'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반영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이 효율적으로 변함에 따라 더 위험한 채권은 변동성이 낮아져 확실한 것이 되러갈 테고, 투자가들이 얻을 수 있는 프리미엄 역시 줄어들 것이다.
1980년대에 스왑거래의 스프레드는 2%였다. 이에 대해 그들은 "이건 아닌데, 이렇게 리스크가 높을 수는 없어, 좀더 효율적인 시장으로 변하는 전통적인 흐름이 나타날 거야"라고 예측했다고 말이다.
메리웨더의 차익거래팀이 남달랐던 것은 많은 돈을 걸었다는 점이다. 혹시 손실이라도 입게 되면 팀원들은, 특히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힐리 브랜드가 그러했는데 투자액을 배로 늘렸다. 컴퓨터 모델의 뒷받침을 받는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교수들은 매매를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바꾸는 데 탁월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햄 샌드위치에서 위험 요소를 분리해 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못했다. 메리웨더는 그들에게 기술 발전을 도모하기에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이 세상과 동떨어진 장소를 제공했다. 그의 비호 아래 차익거래팀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서로 격의 없이 지내면서, 자신들 외에 다른 이들과 사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차익거래팀이 돈을 벌수록 자연히 그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메리웨더는 코츠 같이 빛을 잃고 있는 경쟁자를 제치고 정부 발행채, 저당권, 고수의 회사채, 유럽 채권, 일본 국채 등 모든 채권거래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팀원들에게는 자신들의 모델을 다른 거래에까지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였지만, 살로먼의 다른 직원들로부터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메리웨더는 팀원 중에서 힐리브랜드와 빅터 하가니를 각각 런던과 도쿄 지사로 보내서 거래 액수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듯이 단 두 배가 아닌 무려 10배씩 배팅 액수를 올렸다.
1987년의 주가 대폭락 시에 차익거래팀은 하루에 1억 2000만 달러를 잃었다. 살로먼의 다른 사람들은 차익거래팀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무엇으로 이 손실을 메울 수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무조건 메리웨더를 믿었다. 사내의 라이벌조차 메리웨더를 좋아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몰락했다.
메리웨더가 재기한 1990년대 초는 투자의 황금기였다.
하버드의 로버트 머턴은 금융학계의 일급 학자로서, 이 분야에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로센펠드를 비롯하여 월스트리트의 많은 트레이더들을 배출했다.
머턴은 자신의 이론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LTCM에 들어왔다.
머턴은 LTCM을 보는 시각이 메리웨더와 그의 파트너들과는 사물 달랐다. 한마디로 '해지펀드' 가 아니라, 은행이 하듯이 자금을 시장에 공급하는 '금융 중개기관' 으로 보았다. 동네 모퉁이의 은행은 예금주들에게서 돈을 빌려 지역 주민과 사업체들에 돈을 대출해 준다. 이 자산을 부채와 맞추고, 돈을 빌려간 사람들로부터 예금주들에게 지불하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은 이율로 돈을 받아 이윤을 남기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LTCM은 채권을 파는 것으로 '빌리고', 약간 더 수요가 낮기 때문에 조금 더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채권을 사는, 그런 사업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펀드는 은행과 마찬가지로 스프레드를 벌어들이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LTCM은 리스크가 높은(그러므로 수익성도 높은) 채권에 투자하여 시장에 '유동성' 을 공급하는 일에 종사할 것이었다. 그런데 은행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 외에 무엇을 했는가? 머턴 덕분에 이 신생 해지펀드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1993년 여름에 메리웨더는 또 다른 저명한 학계 인물인 마이런 숄스를 고용했다. 숄스는 살로먼에서 일한 적도 있어서 메리웨더의 팀과 가까웠다. 늘 노벨상 후보로 거명되는, 금융계에서 가장 똑똑한 두 사람을 영입한 LTCM은 마치 마이클 조던과 무하마드 알리가 한 팀에서 뛰는 격이었다.
LTCM의 지명도를 높이는데 열중하던 메리웨더는 오마하로 날아가 버핏과 저녁을 하면서 투자를 권유했다.
이 유쾌한 억만장자는 여느 때와 같았다. 다정하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투자는 정중히 거절했다.
1994년 초에 메리웨더는 가장 유명한 사람을 손에 넣었다. 다름 아닌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부의장인 데이비드 뮬린스 였다.(앨런 그린스펀의 다음 가는 2인자)
개인 투자가들도 이 펀드가 금융계의 최고 두뇌들은 물론이요, 월스트리트가 어떻게든 그린스펀을 능가하려고 하는 게임에서 최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현직 중앙은행 인사를 영입한 사실에 압도당했다.
LTCM이 모은 투자금은 총 12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투자가들은 한 유가증권에 차입 투기를 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자신들의 다른 증권들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것은 기억해 둘 만한 사실이다. 즉 증권들 자체는 서로 관련이 없을 수 있지만, 그 증권들을 소유한 투자가들은 비상시에 암묵적으로 그 증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금융계 전사들이 똑같은 증권에 몰두할 때, 경계선이 무너지고 만다. 분산을 통한 안정성이란 개념, LTCM 자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기본이기도 한 이 개념은 바로 여기에 그 가치가 있다.
스테인하트는 '유동성' 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손실을 입었다고 했다. 앞으로 수년 동안 LTCM이 말끝마다 입에 올릴 '유동성' 이라는 용어는 사실 허수아비 같은 것이다. 시장이 무너질 때마다 투자가들은 살 사람이 충분히 없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한다. 케인스가 관찰했듯이, 시장 전체를 위한 '유동성' 이란 있을 수 없다. 시장은 반드시 유동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나 팔고자 할 때는 항상 매수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착오다. 1994년의 진짜 범인은 차입투기였다. 채무가 없다면, 무너질 리도 없고 내다 팔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유동성' 과는 전혀 무관하다.
LTCM은 이중으로 운이 좋았다. 스프레드는 LTCM이 대부분의 투자를 하기 전에 이미 벌어져 있었고, 일단 기회가 생겼을 때 LTCM은 전반적인 불황을 활용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몇 안되는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의 거래 중 많은 경우가 유동성을 제공하는 일이었어요. 우리는 모두가 팔기를 원하는 것을 사들였습니다." 라고 로셀펠드는 말했다. 로센펠드는 LTCM이 모든 시장에서 유동성이 적은 유가증권을 사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산이 주사위를 던져 처음 나오는 수와 다음에 나오는 수의 관계처럼 완벽하게 서로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사실 LTCM의 자산은 말 그대로 '모두가' 팔기를 원하는 때가 닥치면 한꺼번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12bp는 미미한 것이어서 대개는 문제시할 가치도 없었다. 가격 차는 1000달러짜리 채권 한 쌍당 15.80 달러였다. 스프레드가 두어 달 사이에 2/3로 줄어든다 해도 LTCM은 1000달러짜리 채권 한 쌍당 겨우 10달러 또는 1%의 이자를 벌 것이다. 그러나 차입거래를 통해 이 미미한 스프레드를 몇 배로 늘릴 수 있다면 어떨 것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실제로 LTCM은 이 같은 전략으로 가격이 더 싼 구 채권 10억 달러어치를 사는 동시에 더 비싼 신 채권 10억 달러어치를 팔았고, 그 합은 어마어마했다. 파트너들은 LTCM의 자본 전부를 걸었다. 당연히 그들은 그 돈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나는 사고 하나는 팔았기 때문에 그들은 두 채권의 값이 비슷해지리라는 데, 그리고 채권의 스프레드가 채권 값들간의 차이보다 더 적을 것이라는 데 거는 것이다. 당신의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당신 이웃의 집값도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주 단기간이 되겠지만 스프레드가 더 벌어질 위험도 있다. 만약 두 채권이 12포인트의 스프레드로 거래된다면, 스프레드가 14포인트나 혹은 20포인트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LTCM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정확함으로 '한 채권을 소유하고 다른 채권을 공매할 때의 리스크가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 리스크의 1/25' 임을 계산해 내었다. 그리하여 신중하게 이 장/단기 채권 중개에 25배의 차입거래를 걸 수도 있겠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이익을 몇 배로 증대시키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손실도 몇 배로 늘릴 수 있다. 아무튼 그들은 돈을 빌렸다. LTCM은 월스트리트의 한 은행 및 다른 몇몇 은행드로부터 빌린 돈으로 값이 더 싼 구 채권을 사고, 자신들이 공매한 채권은 대부받는 형식으로 빌렸다.
이것은 LTCM의 가장 간단한 거래 중 하나였는데도 실상은 훨씬 더 복잡했다. 그들은 구 채권을 사자마자 이것을 다른 월스트리트의 회사에 빌려주고 돈을 끌어다 썼다. 그리고 다시 그 돈을 자신들이 빌린 채권의 담보로 사용했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런 단기 부담보부 대출을 '환매계약금융'이라고 불렀다.
LTCM의 현금 거래는 완벽하게 수지 균형이 맞았는데, 그것은 실로 '트레이드의 미학'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장기물에 사용한 돈은 공매해서 받은 돈과 일치했다. LTCM이 담보로 지불한 돈은 LTCM이 담보로 받은 돈과 일치했다. LTCM은 20억 달러짜리 거래를 하면서 자기 주머니에서는 동전 한 푼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채권 가치의 1%에 상당하는 최초 마진 10달러를 '헤어컷'이라 하는데, 이것은 채권 값이 오를 경우에 메릴린치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 된다.
헤어컷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거래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헤어컷을 피할 수 있다면, 거래 한계가 없어진다. 이것은 기름 없이도 차를 달릴 수 있는 것과 같아서 가고 싶을 때가지 갈 수 있게 된다.
출범할 때부터 LTCM은 헤어컷을 지불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획기적으로 줄인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은행들 역시 차익거래 사업을 했기 때문에, 메리웨더는 그들을 자신의 주요 경쟁자로 보았다. LTCM은 소로스의 퀀텀펀드와 같은 다른 헤지펀드보다는 골드만삭스 같은 주거래 은행의 차익거래 부서와 좀더 닮아 있었다.
LTCM은 거래의 각 단계에 필요한 주문을 각기 다른 브로커와 진행했다. JP모건이 하나를 볼 것이고 메릴 린치는 다른 것을, 골드만삭스는 또 다른 것을 보겠지만, 아무도 전체를 볼 수는 없었다. 심지어 LTCM의 변호사조차도 몰랐다. 그는 LTCM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는 동안 파트너들이 '트레이딩 전략 3호'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만약 회사가 한 사람으로 압축된다면, 다름아닌 힐리브랜드였을 것이다. 수년 간의 잘못된 베팅과 그것에서 힘겹게 탈출한 경험을 가진 대개의 베테랑 트레이더들은 냉소적이며 불안해하는 것이 보통인데 비해, 힐리브랜드는 초연하고 너무나 자신만만했으며 또 너무나 열심히 일했다. 그는 순수한 트레이더였다. 그는 모델을 믿었고, 자신의 가격을 고집했으며, 채무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확실한 큰돈을 위해 도박하기보다 작은 돈을 확실히 줍는 일을 더 선호했다. 잔돈을 한두 푼 끌어들이는 과정을 수천 배로 늘리고, 차입 투기를 통해 그 미미한 마진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할 수 있었다. 물론 잔돈이라도 100%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펀드매니저 스테인하트가 실감했듯이, 차입 투기의 경우 틀린 대가는 감당 불능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4년에 LTCM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그들이 손댄 모든 거래가 황금으로 변했다.
1994년 채권시장의 혼란은 주택담보증권에 대한 상대적 가치 거래의 입자를 싹트게 했다. 주택담보증권은 저당권에 흘러드는 현금 흐름을 자금원으로 하는 증서였다. 듣기에는 별로 재미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약 1조 달러에 달하는 주택담보증권이 언제든지 나와 있었다. 이것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영리한 투자 은행들이 주택 소유주들에게서 상황받는 대출금을 '이자' 상환과 '원금' 상환의 두 체계로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LTCM은(서로 상관 있는) 두 체계의 가치가 주택 소유주들이 얼마나 빨리 대출금을 갚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만약 주택담보대출금을 리파이낸스 한다면, 대출금을 한 몫에, 그러니까 원금을 목돈으로 갚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자 체계로는 더 이상 현금이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소액을 내게 되면, 다달이 이자와 원금을 내며 길게는 30년 동안 갚아나간다. 그러므로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리파이낸스하면 '이자만의 증권' 은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선지불하면 가치가 올라간다. '원금만의 증권' 의 경우는 반대로 움직인다.
유럽시장은 제 3세계 시장과 마찬가지로 미국시장보다 비효율적이다. 이 시장들에서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트레이더(또는 교수)가 많지 않았다. LTCM 입장에서 볼 때 이 미개발 시장은 기회로 가득찬 행복한 사냥터였다.
그들은 스프레드가 크게 벌어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수익을 냈다.
로센펠드는 일본에서 약간의 '동전'을 발견했다. 일본 주식들의 보증증권을 도쿄 주가지수의 옵션에 반하여 차익거래를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LTCM이 보통 주를 거래하게 된 시초가 되었다.
하가니는 시장이 이탈리아 정부의 채무 불이행 리스크를 지나치게 높이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가니는 대담한 성격대로 잘못 매겨진 가격이라는 가정 하에 엄청난 규모의 거래에 나섰다. 이것은 계산된 도박이었다. 만약 이탈리아가 실제로 채무 불이행 사태에 빠지게 되면, LTCM은 투자가들의 계약 취소로 무일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거는 돈이 너무 많아져서 전액을 다 보험에 드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운명을 운에 걸 수밖에 없었다. 회사 내부의 판단으로는 이탈리아가 파산하면 펀드 자산의 반을 잃게 될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규제를 받지 않는 헤지펀드는 이탈리아에서의 리스크를 투자가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메리웨더의 서한은 통계로 가득 차 있었지만 회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 사람의 외부 인사가 외견상 별 문제 없어 보이는 LTCM의 채무 상황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었다. 소규모 헤지펀드들의 집합체인 보포스트 그룹의 최고 파트너 세스 클라먼은 자신의 투자가들에게 밝히기를 옛 살로먼브라더스의 트레이더들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펀드, 그러니까 LTCM임이 분명한 회사로부터 지분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클라먼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월스트리트의 추세에 불안감을 느꼈다. 공허한 수학 같은 것에 사로잡힌 투자 은행들은 금융 자산을 잘라서 투자가들이 부주의하게 사들이는 최신 유행의 증권들, 즉 IOs와 Pos에 쏟아 붓고 있었다. 더 나쁜 것은 투자가들이 차입 투기에 대한 욕구를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다. 채권에서 두 자리 수의 수익률을 올린다는 것은 과거의 일이었지만, 특히 '모든 것을 뻥튀기해야 하는' 신행 헤지펀드들을 포함하여 투자가들은 수익을 높이기 위해 거듭해서 차입에 의존해 투자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투자가들은 시장이 항상 유동적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클라먼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투자가들이 '외부 변수'에 눈을 감고 있음을 우려했다. 갑작스러운 혼란이나 가끔씩 일어나는 시장의 붕괴 같은 변수는 과거에도 항상 투자가들의 잘 짜여진 계획을 망쳐놓았다.
이러한 상황 전반에 대해 클라먼은 경고했다. "성공적인 투자가는 100년의 홍수를 피할 위치를 고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점점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되고 있다." 옛 살로먼의 트레이더들이 운용하는 펀드, 즉 LTCM에 대해 클라먼은 진행 중인 차입거래 규모를 볼 때 작은 실수 하나가 펀드의 자산 대부분을 날려버릴 수도 있음도 지적했다.
"물론 두 가지 실수가 동시에 일어나면 대재앙이 발생할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세상이 과거처럼만 돌아간다면 리스크는 없다.
머턴 밀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사실 LTCM의 서한에서는 펀드의 철학적인 '처방약'에 대해 장황하게 말했지만, 구체적인 거래나 투자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투자가들은 LTCM이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유념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평균' 얼마의 수익률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특정 연도의 수익은 평균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예를 들어, 주사위 두 개를 던지면 평균은 7이다. 그리고 평균으로부터의 변화 폭은 5보다 클 수 없다. 그리고 이 주사위 게임에서 세 번에 두 번꼴로 당신은 7을 던지든지, 7보다 2가 크거나 적은 수 사이에 있는 숫자를 던질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투자가는 5와 9사이에 돈을 걸 것이다. 물론 항상 5와 9사이를 던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100만 번을 던질 수 있고 끝에 가서 정산하게 된다면, 그 때는 당연히 집이라도 걸어야 한다. 한 번이나 두 번 혹은 세 번은 2를 던질 수도 있지만, 100만 번을 던진다면 잃을 확률이 엄청나게 작아진다. 시도해 보라.
IBM 주식과 주사위 놀이의 결정적인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주사위 게임에도 위험은 있다. 2를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없다. 왜냐하면 7을 얻을 확률이나 다른 모든 결과를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에는 리스크와 더불어 불확실성도 따른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LTCM의 서한은 하나의 극적인 도약이었다. 서한은 리스크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잃을 확률을 숫자로 제시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마법과도 같은 예언의 비밀은 어처구니 없이 간단했다. 주사위 놀이에서 핵심이 되는 숫자가 7을 중심으로 한 편차인 것과 같이, LTCM의 핵심 숫자는 채권 가격의 일상적인 편차, 다른 말로 '변동성' 이었다.
메리웨더의 트레이더들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부심했다. 변동성은 일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펀드를 운용하는 핵심이었다.
이러한 방식이 평범해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1990년대에 들어서 이와 같은 접근법이 월스트리트에 널리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LTCM의 일부 투자가들은 이러한 신조를 안락한 요람 안에서 배웠다. LTCM과의 회의를 늘 기록하던 테렌스 설리번은 "그들이 심각하게 틀리는 경우는 하나의 '재난'과도 같은 사건, 그러니까 100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드문 일이 될 것" 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가격이 기준치에서 벗어나고 시장이 그들에게 등을 돌려, 돈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의 모든 거래가 지속적으로 기준치를 벗어나는 경우는 통계상 일곱 번 연속으로 주사위의 합이 2가 되는 것, 또는 번개를 연거푸 두 번 맞는 것 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머턴이나 숄스는 사소한 자문과 같은 일 외에는 LTCM의 트레이딩에 관여하지 않았다. 또한 일부 투자가들이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투자자의 세부 사항을 포괄하는 '모델' 들을 개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머턴과 숄스는 펀드의 철학적 아버지 였다.
블랙과 숄스 및 머턴에게는 금융시장에서의 가격 변동 역시 '무작위적인' 것이었다.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예언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런 가격들의 분산이 가령 동전 던지기나 주사위 던지기, 고등학교 학생들의 키 등과 같은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패턴과 같아질 것이라고 가정했다. 미국 재무부의 신 채권이나 이탈리아 채권 역시 종 모양의 곡선을 그릴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날은 가격이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드물게는 갑작스런 수직 상승이나 시장 붕괴라는 극단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변화의 합(변동성)을 알고 있다면, 일정 시간 동안 주식과 채권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자산의 오르고 내리는 정도도 계산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블랙-숄스 공식에서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우리는 주식과 옵션 시장의 이상적인 조건을 가정할 것이다. 주식 가격은 연속되는 시간 안에서 '무작위적인 움직임' 을 보인다."
그러나 블랙과 숄스는 대단히 중요한 가정을 했는데, 주식의 변동성이 '안정적'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수들은 한 주식의 변동성을 변하지 않는 천성적인 특질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당신이 푸른 눈을 가졌듯이 IBM은 X라는 변동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머턴은 이러한 가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변동성이 너무나 안정적이어서 가격이 '시연속' 안에서 거래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자면, 급등락이란 없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그는 IBM 주식의 가격이 80에서 60으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79와 3/4, 79와 1/2, 79와 1/4 등등에서 한 번식 멈춘다고 가정했다.
각각의 무한의 짧은 순간에 트레이더는 IBM의 옵션에 대한 가격을 재조정하여 주식의 가격과 함께 움직이도록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트레이더는 재빠르게 사고팖으로써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에덴동산과 같이 리스크가 없는 균형을 이룬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머턴은 완벽하고 리스크가 없는 차익거래를 가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가정은 시장이 잠잠할 때는 통할지 모르지만, 요동치는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논리였다. 1987년에 이른바 포트폴리오 보험이라는 것이 '시장이 하락할 때 지속적인 매도를 통해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는 말도 안 되는 선전을 하며 기관 투자가들에게 판매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포트폴리오 보험들은 나중에 '블랙먼데이' 로 부르게 된 시장 몰락을 부추겼다. 그날 시장은 대단히 불연속적이었다. 재빠르게 그들의 손실을 줄이려던 포트폴리오 보함 가입자들은 월스트리트에서 터진 공황의 속도에 맞출 수 없었고, 결국 무일푼이 되었다.
영국의 에세이 작가 체스터틴의 말대로, 인생이란 '논리학자들의 함정' 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대체로 이성적이지만 반드시는 아니고, 일반적으로 상식적이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실제보다 좀더 수학적이고 규칙적으로 보인다. 그 정확성은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그 부정확성은 감추어져 있다. 인생의 거친 이성이 잠복해 있는 것이다.
머턴은 바로 이 함정의 희생자였다.
디스크자키와 명상 강사를 하던 케이퍼는 차세대의 물결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번째 사업을 계획하고, 로센펠드에게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케이퍼 역시 금융 분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주식이 얼마나 어떻게 분자의 운동과 유사한가에 관한 친구의 설명에 매료되어 MIT에 들어왔다. 그러나 케이퍼는 메턴의 금융학 강의를 들은 후 수리금융학이 과학이라기보다 믿음, 다시 말해서 '모델의 힘데 눈이 먼' 공상가들의 신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질서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에게는 매력적이더라도 시장이 모델과 다르게 움직이면 그들을 재앙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MIT에서 머턴의 스승이었던 폴 새뮤얼슨은 LTCM이 출범했을 때 의구심을 가졌다. 노벨 경제학상을 첫 번째로 수상한 새뮤얼슨은 '시연속' 이란 단지 이상적인 상태임을 알고 있었다.
"LTCM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블랙-숄스 공식의 핵심은 카드에 어떤 패가 나올 것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세계가 샘플링되었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그 정상분포 절차의 가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폴 새뮤얼슨. 근데 번역이 잘못되서 뭔말인지 알 수고 없다... 같은 말이 두줄 들어가기도 하고..
시장에서는 샘플이 완벽하지 어떤지를 결코 알 수 없다. 트레이딩의 세계는 1920년대와 대공황 이후가 전혀 달리 보인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패턴은 또 달라졌고, 1990년대 거품경제의 시기에 또다시 달라졌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시장은 '정상' 으로 보이지만, 다음의 새로운 시대가 상황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숄스의 논문 지도 교수였던 유진 파머 역시 자신의 옛 제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했다. 파머는 모델의 하나인 옵션 공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러한 모델을 믿고 사람들이 가진 돈을 투자하도록 만드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1960년대 초에 파머는 다우존스 공업 평균 종목 중 30개 주식의 가격 동향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모든 주식이 정상 분포 곡선에서 나타나는 것 이상의 극단적인 가격 동향을 보여주는 날들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다. 파머의 주식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키가 평균이지만 20번째 사람들마다 난쟁이 아니면 거인이 나오는 세계와도 같았다.
파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약 모든 주식의 가격이 그 평균에서 완벽하게 정상 곡선을 따라 변동한다면.... 평균에서 5 표준 편차 이상의 변동은 7000년에 한 번꼴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변동은 3~4년마다 나타나고 있다."
파머는 이것을 "인생에는 언제나 '팻테일'이 매달려 있다" 고 표현했다.
우리는 시장을 대충 살펴보기만 해도 주식(또는 채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변동성을 가지고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장에는 아무런 악재도 없는데 23%나 폭락했던 블랙먼데이를 들 수 있다. 후에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과거 변동성에 근거하여 태초 이래 시장이 존재하는 한 시장이 그만큼 떨어질 가능성도 상존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사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이 수백만 번씩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런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희박'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폭락은 일어나고 있다.
금융시장이 동전 던지기보다 더 자주, 또는 LTCM의 파트너들이 훗날 파국을 맞은 뒤에 피고석에서 토로했듯이 '100년에 한 번 있을 폭풍' 보다 더 자주 극단적인 경우로 치닫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핵심 조건은 각각의 새로운 사건이 그 전의 사건과는 '독립적' 이라는 점이다. 동전 자체는 세 번 연달아 뒷면이 보이게 떨어졌다는 것을 기억 못한다. 네 번째 던졌을 때, 앞면과 뒷면이 나올 가능성은 여전히 반반이다.
그러나 시장은 기억한다. 가끔씩은 시장이 트레이더들의 기대(혹은 공포) 대로 흐르기도 한다. 이 경우 투자가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막연히 추세를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타성적 트레이딩' 은 논리적인 주식 가격 산정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이성적인 투자가들과 효율적인 시장이라는 합리적인 조건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시장이 세 번의 나쁜 '던지기 뒤에 네 번째에는 더 이상 완전하게 무작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일부 트레이더들은 손실을 안고도 팔아야만 할 수도 있고,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목도한 다른 투자가들은 공포에 휩싸여 내다팔기에 급급할 수도 있다. LTCM이 출범하던 그해 봄, 재무부 채권을 내다팔았듯이 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심리가 개입되면, 파머가 주목한 작은 움직임이나 블랙 먼데이 같은 규모의 거대한 움직임도 가능한 것이다.
타협을 모르는 머턴은 투자가들이 계산하는 자동인형이 아닐 수 잇다는 가능성에 경멸을 보였고, 경솔하게도 그들의 감정이 폭발하는 때를 무시했다.
그는 타협이 불가능한 완벽한 믿음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실러가 시장은 너무나 변동성이 심해서 완벽한 시장이란 모델이 적용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은 머턴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런 결론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별로 없다.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실러의 반대를 받아들이면, 현대 금융 경제학 이론의 초석에 대한 신뢰성에 심각한 의심이 생길 것이다."
또한 그들은 '팻테일' 의 비판, 즉 예기치 않은 재난이 반드시 예상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알고 있어, 모델을 조정하여 그에 대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예기치 않은 사건을 프로그램 할 수 있겠는가?
"모니카 르윈스키가 피자를 들고 클린턴의 방에 들어갔다는 사실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LTCM에 투자하기를 거절한 콘세코의 맥스웰 부블리츠의 말이다. "만일 여기에 수학을 적용하면, 르윈스키가 그의 앞에서 무릎 꿇을 가능성이 38% 나올 수도 있어요. 얼핏 대단해 보이지만, 모두 상상일 뿐이지 않소이까?"
프로그램들의 정교한 겉면 밑에는 "시장이 과거처럼 움직인다면, 우리는 얼마나 잃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만약 시장이 다르게 움직인다면, 어떨 것인가? 작가 마크 트웨인이 지적했듯이, 역사는 운율을 맞출 뿐이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시장이 장기에 걸쳐 실수를 교정할 것이므로 그 말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가격이 잘못 매겨진 주식을 살 이유가 없다. 그러나 1970년대에 엡스테인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만약 가격들이 교정되기 전에 비정상적인 가격들이 더욱 극단으로 치닫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이 점은 서한에게 언급되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파트너들의 철학은 머턴이 그들에게 제시한 방향, 즉 시장이 꾸준히 효율적이고 더 유동적이며, 더 '연속적' 으로 변해간다는 아이디어를 근본으로 했다.
사실 그들은 엄청난 규모의 차입 투기를 수없이 되풀이 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1995년 멕시코의 대 실패로 전세계의 투자가들이 뜨거운 맛을 보았지만, LTCM은 영향받지 않고 계속해서 엄청난 성공을 이어나갔다.
이탈리아와 IOs 주택담보증권 거래에 힘입어 1995년에 LTCM은 수수료 공제 전 59%, 수수료 공제 후 43%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올렸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서 LTCM 의 자문역으로 있던 윌리엄 샤프 는 수익이 비현실적인 정도로 잘 나오고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투자가들의 돈까지 포함하여 LTCM의 자본은 2년도 안 되어 3배 가까이 늘어 36억 달러가 되었다. 자산 역시 크게 늘어나, 102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되었다. 요컨대 1995년 말 기준 LTCM은 20배의 차입 투기를 한 것이다.
총자산 대비 수익률은 대략 2.45% 였다.
파생상품 거래를 계산에 넣으면, 현금 거래에서의 수익은 아마도 1% 이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정확한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59%라는 놀라운 수익률의 대부분이 엄청난 차입 투기의 힘이었다는 점이다.
LTCM은 스스로를 '금융 리스크에 대비한 보험 업자' 라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재해보험 업자는 폭풍이 불지 않은 해에는 돈을 벌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운 좋은 시기가 1년 내지 몇 년 지나고 나면, 보험 업자가 정말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지, 프리미엄이 적정한지, 또는 약관이 유리한 것은 아닌지 하는 점들을 물어야 할 것이다. LTCM의 각 채권들이 하나의 '보험증권' 이라면, 보험을 들은 증권의 수(그리고 언젠가 직면할 수 있는 손실의 수준) 는 차입 투기액 1달러가 늘 때 마다 증가할 것이다.
그들은 최고의 금융 이론과 최고의 금융 실무를 혼인시키려고 했다.
로버트 머턴
운이 나쁜 시기, 폭풍의 계절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LTCM은 경이적인 액수의 수익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비정상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LTCM에 대해서는 미국인들 가운데 99%가 아직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이 펀드는 가장 큰 뮤추얼펀드인 피델리티 마젤란 보다 2배 반이나 컸고, 두 번째로 큰 헤지펀드보다는 네 배가 컸다.
5년 동안의 활황 장세에서 은행들은 유동성을 만끽했고, 헤지펀드는 월스트리트가 잉여 자본을 굴리는 데 안성맞춤이 수단이었다. 은행들은 신용 등급이 낮은 헤지펀드들에 '대차대조표에 잡히지 않는 대출을 해주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은행들의 막강한 차용 능력을 100달러 당 몇 센트의 수수료를 받고 빌려주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가장 큰 고객 헤지펀드인 LTCM은 매년 1억 내지 2억 달러의 수수료를 월스트리트에 뿌리는 것으로 유명했고, 은행들은 그 돈 가운데 최대한의 몫을 챙기려고 했다.
"은행들은 보통 20bp를 받았습니다." 잠재된 리스크에 비해 실로 미미한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리보LIBOR(민간은행 간 거래 금리) 에다가 200bp는 더해야 할 것을 50bp 만 더한 이율로 대출해 주었습니다."
LTCM은 거래 은행들의 여력을 한도까지 짜내었다.
"그는 성실했어요." 라고 메릴린치의 한 간부는 말했다. "단지 그는 세계를 승자와 패자로만 보았던 겁니다."
-메리웨더에 대해-
플러지는 1996년에 '금리 스왑' 조건으로 LTCM에 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합의했다.(금리 스왑이란 기본적으로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지급할 때는 고정 금리를, 받을 때는 변동 금리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은행단은 말하자면 LTCM이 필요할 때마다 끌어다 쓸 수 있는 예비 기관이었다. 은행단은 LTCM이 어떤 담보도 내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리볼빙론을 제공해 주기로 함으로써 이 헤지펀드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증명해 보였다.
"당신들은 이렇게 그리스 문자를 써 놓고 너무 똑똑해서 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들어가야할 그리스 문자는 빠져 있구료. 바로 '오만' 이란 단어요."
1996년대 LTCM은 100명을 훨씬 넘는 직원을 거느렸고, 파트너들은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더불어 그들은 수수료로 받은 외부 투자가들의 이익 25%를 펀드에 남겨두어 세금을 내지 않고 더 빨리 불려나갔다. 3년째의 해가 저물어가던 무렵에 그들은 초기 투자액 1억 5000만 달러에서 14억 달러로 9배나 커진 펀드를 운용했다.
파트너들이 배짱 좋게 거래 규모를 계속 두 배로 베팅한 것이 그들을 하룻밤 사이에 갑부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파트너들은 돈을 버는 데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모든 공헌은 무시하고, 돈을 번 사실만을 가치 있게 생각했다. 아마도 이 점이 훗날 사정이 절박해진 다음에야 뒤늦게 자신들의 개인적인 친분을 찾아나서게 된 이유일 것이다.
LTCM이 가져다주는 매력적인 수익에 현혹되어 UBS는 더 빨리 투자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진작 투자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최대 실수야!" 과거에 LTCM과의 거래를 거절했던 한스-페터 바우에르는 그렇게 탄식했다.
블랙-숄스 공식에 기초한 거래의 아킬레스건은 변동성이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전제였다. 만약 LTCM이 7년 간의 보증 기간 동안 한번이라도 변동을 보이면, UBS는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었다.
1996년, LTCM은 단 한 달도 1% 이상의 손실을 입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파트너들에 비해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경험해 본 메리웨더만은 의아했다.
과학적인 척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아직 과학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로버트 커트너
그리니치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수익에 현혹되어 다른 은행들도 LTCM 이 찾던 그 잔돈들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은행들의 개입으로 그들을 시장에 끌어들인 매력이던 스프레드는 자연히 줄었고, 성공의 기회도 제한되었다.
늘 그랬듯이 메리웨더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라고 독려했다.
파트너들의 경험으로 볼 때, 적어도 그들에게는 잘 모르는 분야로 옮겨 성공을 도모하는 일은 위험하다는 격언은 사실이 아니었다. 모델을 신뢰하는 그들로서는 단순히 자신들의 컴퓨터에 새로운 분야에 대해 재입력만 하면 되었다.
증권시장의 문제는 개방성에 있다는 것이 LTCM의 시각이었다. 누구라도 채권을 살 수 있고 남의 거래를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금융 사업 중에서도 꼴보기 싫은 모방꾼들이 따라할 수 없는, 덜 유동적이고 더 영속적인 투자에 관한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 거대한 모험이 서서히 진행되는 한편으로 LTCM은 자신들의 자산을 어딘가에 즉각 투자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렸다.
경제학자 버턴 몰키엘 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보통주의 적절한 '가격-수익 배수' 는 알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나 LTCM은 알았다. 또는 최소한 그들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의 모델을 주식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가정하기에) 한 가지 매력은 보통주 차익거래는 채권 차익거래와 전혀 무관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저당권 간의 스프레드나 유럽 채권들 간의 스프레드가 벌어질 때 동시에 주식들 간의 스프레드 역시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주식시장은 다른 세계로 보였다.
하가니와 모디스트는 약 15개의 연계 주식에 대한 거래가 가능하겠다고 보았고, 하가니는 그것들에 엄청나게 걸었다. 그가 가장 선호한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석유 컨소시엄인 로열더치셸 이었다. 로열더치셸은 두 상장 회사, 네덜란드의 로열더치석유와 영국의 셸 통운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열더치와 셸이 같은 곳, 즉 로열더치셸의 이익 배당에서 수입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계 회사는 줄곧 네덜란드계 회사에 비해 8% 정도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어왔다. 주식은 여러 투자가들이 보유하고 있었고, 대개 네덜란드계 주식이 좀더 유동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격 차이에 대한 합당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유럽 경제가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하가니는 나라들 간의 차이가 점점 적어질 것이고, 로열더치와 셸 간의 가격 차이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시각이기도 햇다. 그러나 하가니가 건 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LTCM은 가격 차가 줄어들 것이라는데 대한 어떤 보장도 없이 무려 23억 달러를(절반은 셸에 매수 포지션으로, 나머지 절반은 로열더치에 매도 포지션으로) 걸었다.
하기니는 자주 입증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빌린 돈으로 엄청난 규모의 거래에 나섰다. 그는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채권 차익거래 시장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데 따른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 투자하며 항상 베스트 컨디션일수는 당연히 없다. 최악의 컨디션에서도 할 수 있는 또는 그 시기를 큰 손해 없이 넘길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함.
미국에서는 힐리브랜드가 주식 거래에 바빳다.
합병 차익거래에 손대고 있었다.
합병은 정말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틀어질 수 있다. 그래서 합병 차익거래자는 빈틈없는 '만물박사' 가 되어야 한다.
LTCM의 접근법은 완전히 달랐다. 교수들은 개별 주식에는 전혀 문외한이었기 때문에(사실 그들은 주식의 미래 동향은 무작위적일 것이라고 간주했다.) LTCM은 승자를 가려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회사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합병 계약에 관계된 주식만을 샀다.
메리웨더는 전혀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높은 수익을 올린 파트너들과의 오랜 관계 때문에 메리웨더는 제멋대로인 두 트레이더, 힐리브랜드와 하가니를 절대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메리웨더의 개인적인 의리는 포트폴리오를 한쪽으로 기울게 했고, 이것은 리스크 관리 측면에 심각한 약점이 되었다.
하루는 메리웨더와 힐리브랜드, 그리고 뮬린스가 리스크 차익거래 분야의 유명한 트레이더인 대니얼 티시와 저녁을 함께 했다.
대니얼 티시는 LTCM이 단지 수학적인 관점에서만 사업을 생각한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리스크 차익거래의 경우 스프레드는 대략 4%에서 10% 정도로 채권 스프레드보다 훨씬 높았다.
합병 거래의 스프레드는 채권 스프레드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자칫 엄청난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티시는 LTCM 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경험이 없고 차입금은 많아 잠재적으로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LTCM은 합병 계약 가격보다 63센트 이하만 되면 무조건 계속 사들였다. 합병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 거래에서 LTCM의 차입 비율은 20대 1이나 되었다. "당신은 지금 불도저 앞에서 푼돈을 줍고 있는 거요." 한 우호적인 자산 관리자가 로센펠드에게 한 쪽 아니면 다른 한쪽의 합병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며 그렇게 충고 했다.
결국 CBS의 합병은 성사되었지만, 이것은 LTCM이 그런 거래를 더 하게 되는 무모함만 키우고 말았다. LTCM의 포트폴리오에서 합병 거래는 30개로 늘었다.
지난 25년 동안 연준은 마진 대출금의 한도를 전체 투자액의 50%로 규정하고 있다. LTCM이 주식을 사들였을 때, 그것은 물론 T 조항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LTCM은 실제로 주식을 사지는 않고 주식 포지션 계약을 맺었다. 주식의 등락에 대한 파생상품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파생상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은행은 고정 금리를 변동 금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이 착상의 비범함은 모든 고객에게는 항상 정반대의 필요를 가진 상대가 있다는 점을 파악한 데 있다. 한 회사가 수년에 걸쳐 매년 돈을 빌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예측 가능한 고정 금리를 선호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고정 금리를 지급하고 있는 어떤 가정이 있다면, 서로 다른 대출 비용에 직면한 그 회사와 가정이 자신들의 대출을 맞바꾸는 것이다! 파생상품에 힘입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급작스럽게 성장했다. 은행들은 곧 통화 표시 채권, 이자율 지급, 보통주, 그리고 현금의 미래 흐름 등을 스왑거래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0년에는 2조 달러에 상당하는 금리 스왑이 이루어졌다. 1997년에는 그 합계가 22조 달러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성장의 예기치 못한 부작용은 은행의 유가증권 신고서가 점차 모호해지게 된 것이었다. 파생상품은 외부 사람들에게 의미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공개하지 않았다. 거래 규모가 커지자,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총부채를 알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은행가들은 돈을 벌기에 너무 바빠서 빠르게 성장하는 이 사업의 위험이나 허울만의 공개에 신경 쓰지 않았다.
1995년 그룹의 전체 파생상품 장부에는 6,500억 달러 상당이 기재되어 있었다. 2년 뒤에는 두 배로 늘어 1조 2500억 달러에 달했다. LTCM의(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의)불명확한 공개로 미루어볼 때, 특정한 거래에 따르는 펀드의 파생상푼 리스크를 정확하게 집어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래들이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상쇄하도록 헤지되기 때문에, LTCM이 정확히 얼마의 금액을 거래했는지 계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금융 감독관들은 점차 걱정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들어 월스트리트는 1년에 한두 번씩 일어나는 파생상품 '사고'에 익숙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