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공동체에는 지도자가 될 가망이 전혀 없는 수십만 명의 좌절한 지도자 지망생이 있다.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충동이 좌절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에너지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물론 깨끗이 포기하고 떠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울한 상황이다. 사회적으로 이탈하는 식의 해결책의 결점은 그가 실제로는 전혀 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사회에 남아서, 주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비웃는다. 대다수의 초부족 구성원들은 단순한 장치를 이용하여 이런 불행한 사태를 피하고 있다. 그들은 초부족의 리더십을 다투는 대신, 초부족 내부에 있는 특수한 하위 집단의 리더십을 얻으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갖가지 별난 유행 - 카나리아 기르기, 자동차 모형 만들기, 보디빌딩 - 이 생겨나, 사람들은 여기에 열중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런 취미가 일찍이 계층구조 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에게 새로운 사회적 계층구조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지도자 지망생들은 초부족 내부에서 사다리 위로 올라가려고 바둥거릴 때 그의 머리 위에 떨어져 꼼짝 못하게 짓누른 무거운 사회적 담요에 이런 식으로 저항할 수 있다. 대부분의 스포츠와 오락, 취미, 그리고 '선행'은 명확하게 공언한 목적이 아니라 "지도자를 따르고 가능하면 그 지도자를 밀어낸다."는 기본적인 목적을 주요 기능으로 갖고 있다.
하위 집단은 사다리를 오르려다가 좌절한 사람들의 욕망이 배출되는 통로다.
초부족을 파괴하지 않고 하위 집단으로 나누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유형은 사회적 계습제도다.
집단이 팽창하면 계급이 더욱 분화되었고, 세부는 다양하지만 원칙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신의 계층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충분한 보상이 되기 때문에, 계급이라는 유사 부족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갖지 않는다. 계급과 부족의 이런 중복은 계급이 얼마나 부족적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전에는 인생에서 '분수를 알고' 위안을 얻었지만, 그 분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이 가능성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랜 계급 부족 제도는 계속 저항했고 지금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추격전의 표면적인 징후를 우리는 오늘날 대체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유행의 속도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낡은 주제가 사회 계급 전체에 너무 빨리 퍼지기 때문이다. 낡은 주제가 하층계급에 좀더 빨리 도달할수록, 상류층에서는 새롭고 배타적인 주제를 좀더 빨리 도입해야 한다.
옛날의 엄격한 계급제도가 제공했던 유사 부족의 일체감이 크게 상실된 것은 물론이다.
신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의 간격이 점점 넓어져서, 우리는 이제 신세대와 기성세대를 일종의 유사 부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의 유사 부족은 이 새로운 집단을 끌어들이려고 애썼지만, 그 노력은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신세대 지도자의 머리 위에 기성세대의 명예의 표지를 씌워주거나 극단적인 신세대 패션과 생활양식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더욱 난폭한 반항을 낳았을 뿐이다.(예를 들어 대마초 흡연이 합법화하여 널리 채택되면, 당장에 대마초를 대신할 새로운 대체품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배워야 할 엄숙한 교훈은 다른 부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부족적 동질감에 대한 인류의 욕구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이다. 이 오래된 생물학적 욕구는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힘이다.
이론적으로는 부족적 동질성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소집단들이 번영하는 초부족 내부에서 건설적인 상호관계를 갖고, 초부족들은 다시 건설적으로 상호작용을 하여 거대한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현재까지 거기에 실패한 것은 주로 여러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억누르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좀더 보람있고 평화로운 경쟁적 관계로 전화하여 차이의 특성을 활용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옷을 다림질하여 주름살을 없애듯 세계 전체를 다림질하여 하나의 밋밋한 평면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분열된 나라에서부터 여러 파벌로 갈라진 폭력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 적용된다.
사회적 동질성이 위협을 받으면, 그 사회는 저항한다. 자신의 존속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최소한 사회적 혼란을 의미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유혈 사태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지위 추구자는 정확히 어디에 서 있는가? 우선 그는 개인적 친구와 친지를 갖고 있다. 이들은 모여 그의 사회적 유사 부족을 이룬다. 둘째, 그는 지역 공동체 - 지역적 유사 부족 - 를 갖고 있다. 셋째, 그는 특수한 전문분야 - 직업,기술,기능,오락,취미,스포츠 - 를 갖고 있다. 이것들은 그의 전문적 유사 부족을 이룬다. 넷째, 그는 계급 부족의 흔적과 새로운 연령 부족을 갖고 있다.
이런 실력 사회 제도는 자극적인 체제를 제공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흥분은 긴장을 수반한다. 실력 사회는 재능의 낭비를 막아주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특징은 거대한 초부족 공동체의 밑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훤히 트인 통로가 뚫려 있다는 점이다.
성공하는 사람이 하나라면 실패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실패자들은 더 이상 이 실패를 계급제도라는 외부의 힘 탓으로 돌릴 수가 없다. 그들은 마땅히 그 실패를 책임져야 할 자신의 개인적 단점을 탓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활기차게 발전하는 초부족일수록 심하게 좌절한 지위 추구자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처럼 보인다.
정체되고 침체된 사회에서 멍청한 만족을 얻었다면, 활기차게 발전하는 역동적인 사회에서는 초조한 갈망과 불안을 느낀다. 기를 쓰고 바둥거리는 지위 추구자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들은 꼭대기에 이르지 못하면, 실제보다 지위가 높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세련된 비유는 아니지만, 이 곤충의 예를 이용하면 지위 추구자에게 일어난 일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말로 지배적인 개인은 눈에 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높은 지위를 과시할 것이다.
그들은 '지배클럽'회원임을 나타내는 사회적 배지를 보임으로써, 동료 회원이나 하급자에게 자신의 지위를 명백히 밝힌다.
그 결과, 하급자도 똑같은 깃발만 과시할 수 있다면 '지배 클럽'에 가입하여 그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지위 추구자들이 검은색과 노란색의 말벌을 흉내낼 수만 있다면, 적어도 그가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지위 상징은 실제로 획득한 사회적 지위 수준의 표면적 징후다. 우위 흉내는 얻고자 하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위 수준의 표면적 징후다. 물질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지위 상징>은 당신이 구입할 여유가 있는 물건이다. 그리고 <우위 흉내>는 당신이 여유가 전혀 없는대도 구입하는 물건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지위가 우세한 사람은 이런 우위 흉내로부터 옛날만큼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창의력으로 앙갚음을 했다.
높은 지위의 상징물을 흉내낸 싸구려 모조품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도록 대량 생산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의 아내는 진짜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가짜 다이아몬드로 만족한다. 덫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지위가 높은 사람은 진정한 우위 흉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의 아내가 현란한 가짜 목걸이를 과시하고 있으면 그녀보다 우세한 경쟁자를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환상이다. 문제는 그녀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에 견주어볼 때 그 목걸이가 진짜 다이아몬드라고 하기에는 너무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거기에 속지 않고, 결국 가짜 목걸이는 그녀의 지위를 전혀 높여주지 못한다.
이것은 모조품이 아니지만 낮은 지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예술과 공예를 파괴했다. 위대한 거장들의 싸구려 복제품이 소박한 민속 예술을 몰아냈다. 축음기 레코드가 민속 음악을 몰아냈다. 값비싼 상품을 흉내내어 대량 생산된 플라스틱 모조품이 농부의 소박한 수공예품을 몰아냈다.
사회가 이 '새로운 단조로움'의 지루한 획일성에 되풀이하여 저항한다 해도, 이미 죽어버린 옛날의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절대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싸구려 모조품도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못된다.
이런 사람이 우위 흉내를 내려면 모조품이 아니라 진품을 사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는 물건을 사지 말고, 능력보다 한 걸음씩만 앞서야 한다. 그래야만 실수하지 않고 무난히 우위 흉내를 낼 수 있다.
안전을 위해, 그는 싸구려 모조품이 만들어질 수 없는 분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소형차를 구입할 여유가 있으면 그는 조금 무리해서 중형차를 구입한다.
지위 상승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세계에는 가짜 다이아몬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단순한 예에 불과하지만,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높은 지위를 얻는 데 열심인 사람은 거기서 멈출 수 없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경쟁자들을 납득시킬만한 그림을 그리려면, 자신과 자신의 예금 잔고를 모든 방향으로 확대해야 한다. 할부구입, 저당, 당좌대월 제도는 우위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강력한 지위 상승 욕구를 이런 식으로 표현 하는 덕분에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황새를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늦추기 않는 지위 추구자들에게는 불행히도 사치스러운 장식이 너무 큰 중요성을 획득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런 장식은 어차피 우위 자체가 아니라 우위 흉내일 뿐이다. 진정한 우위, 진정한 사회적 지위는 두번째 컬러 텔레비전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초부족의 하위자들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과 같은 계층에 있는 경쟁자들은 모두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두번째 컬렂 텔레비전을 서둘러 장만하겠지만, 당신 계층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계층구조의 기본 법칙이다.
우위 흉내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엄청난 손해를 초래할수도 있다. 그것은 높은 지위를 얻는 데 실패한 사람들에게 우울한 환멸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초부족 구성원에게 너무 많은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나 정력을 고갈시킬 수도 있다.
더 나쁜 것은 열심히 일하느라 가족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는데 '그래도 역시' 높은 지위를 얻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초부족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우위 다툼에서 좌절하면 또 다른 폭력적인 방법으로 반응할 수 있다.
지위 경쟁에서는 하위자가 상위자에게 감히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너무 위험한 짓이다.
억눌린 분노는 애꿎은 자녀나 아내나 개한테 폭발할 수 있다.
이런 모든 배출구가 막혀도, 하나의 배출구는 항상 남는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경우, 그는 자신에 대한 공격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다. 자신을 죽여버리는 것이다.(동물원의 동물들은 우리의 철망 때문에 적을 공격할 수 없으면 제 살을 뼈가 드러나도록 물어뜯어 불구로 만드는 심각한 자해행위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살은 인간만의 독특한 행동인 것 같다.)\
시골보다 도회지의 자살률이 더 높다. 바꿔 말하면, 지위 경쟁이 치열한 곳일수록 자살률이 높다.
자살과 살인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어느정도가지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살인율이 높은 나라는 자살률이 낮은 경향이 있고, 반대로 살인율이 낮은 나라는 자살률이 높은 경향이 있다. 마치 터뜨려야 할 공격성의 양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살인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자살의 형태를 취하는 것 같다. 공격성이 어느쪽으로 폭발하는지는 특정한 공동체가 살인을 얼마나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거대한 초부족에서는 그 크기 때문에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허구적 폭력이 널리 퍼져있다.
사람은 남들이 극단적인 지배를 받는 것을 구경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폭력을 구경하는 것이 억눌린 공격성을 발산하는 귀중하고 무해한 배출구 구실을 하는지 어떤지는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폭력을 구경하는 것은 우위 흉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원인은 분명하지만 가치는 의심스럽다.
인간 동물원에서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심심풀이로 땅콩을 씹을 수도 있고 곤두선 신경을 달래기 위해 사탕을 입에 넣고 빨 수도 있다.
곧이어 악순환이 시작된다. 신체적 배지를 단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적대적 하위 집단으로 취급되면, 그들은 정말로 적대적인 집단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저절로 실현되는 예언'이라고 불렀다.
파랑 머리를 가진 남자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오랫동안 매를 맞았다면, 그들이 정말로 난폭해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의 그릇된 예언이 실현되어 진짜의 예언이 되어버린다.
파랑 머리를 그토록 강력한 신호로 만든 특징은 그것의 가시성이었다. 파랑 머리는 그 사람의 진짜 성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비본질적인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들리지만, 우리가 흔히 '인종차별'이라고 부르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불합리한 증오심은 모두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은 단순한 평등 정책이 아니라 흑인에 의한 지배정책으로 치달았다. 제 2의 '남부전쟁'이 임박한 것 같다.
사려깊은 미국 백인들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가르침은 좀처럼 잊기 어렵다. 그러면 흑인에 대한 과잉 보상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편견이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잠입해 들어온다. 흑인에 대한 죄책감은 지나친 호의를 낳는다. 지나친 호의는 차별하는 것 못지않게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만든다. 과잉 친절도 흑인을 한 개인으로 대하지 않는 태도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전히 흑인을 외집단 구성원으로 여기고 있다.
다른 아종을 대할 때 마치 신체적 차이가 정신적 차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대하는 한, 그리고 마치 그들이 적대적인 외집단의 표지로 일부러 다른 피부색을 갖고 있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한, 무의미하고 낭비적인 유혈사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인종과는 관계없는) 내집단과 외집단은 공격의 두 가지 차원 - 독단적인 차원과 폭력적인 차원 - 에서 자신의 주장에 따라 서로 맞설 것이다. 거기에 관련된 각 개인이 우연히 내집단이나 외집단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부색 때문에 뜻하지 않게 영원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특정 집단 속에 갇혀버린 사람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그는 아종 집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할 수도 없고, 그 집단을 떠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집단의 구성원이 된 것처럼, 또는 군대에 입대한 것처럼 취급된다.
다른 집단의 구성원은 그 집단 특유의 '유전적' 특징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잘못인데도, 이런 중대한 잘못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외집단을 배척하려는 내집단의 충동은 '놈들'과 '우리'를 좀더 영구적으로 갈라놓을 기본적인 차별성을 원한다. 우리는 창의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차별성을 찾아내지 못하면 서슴없이 만들어낸다.
인류같은 새로운 종이 진화하여 기본적인 생물학적 특징을 형성하는데에는 수십만 년이 걸린다. 문명의 나이는 1만 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사냥꾼이었던 조상들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동물이다.
나는 인간이 현재 놓여있는 상태를 인간 동물원으로 묘사했다. 동물원 우리 속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연 서식지에 사는 야생동물은 같은 종류의 동물을 대량으로 죽이는 습성이 없다. 하지만 우리에 갇힌 동물은 어떨까? 원숭이 우리에는 대량학살이 있을까? 사자우리에서도 한 마리를 집단으로 공격하여 죽이는 일이 있을까? 새장에서는 막상막하의 결전이 벌어질까?
대답은 긍정이지만, 여기에는 명백한 유보 조건이 붇는다. 동물이 너무 붐비는 우리 속에서는 이미 거기에 자리를 잡은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심한 지위 경쟁이 벌어지지만, 그런 집단에 새식구를 넣으려고 하면 상황은 훨씬 나빠진다.
객관적인 동물행동학자의 눈으로 보면, 지나치게 과밀한 동물의 폭력행동은 그 종의 개체수를 스스로 제한하는 적응 매커니즘이다. 이것은 종 전체의 생존을 위해 각 개체한테 잔인하게 구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은 나름대로 특정한 개체수 '상한선'을 갖고 있다. 개체수가 상한선을 넘으면, 일종의 치명적인 활동이 개입하여 다시 개체수를 줄인다. 이런 관점에서 잠시 인간의 폭력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냉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인류는 하나의 조으로서 과밀해지기 시작한 이후, 우리의 개체수를 생물학적 적정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 수단을 미친 듯이 모색해온 것처럼 보인다. 이 수단은 전쟁과 폭동, 혁명, 반란의 형태로 대량 상상을 저지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개개인의 생명은 더욱 강력한 보호를 받게 되었고, 옛날의 이런 관습을 차츰 폐지되었다. 그와 동시에 질병과 가뭄과 기아는 맹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하자, 새로운 자기 규제 장치가 등장했다. 낡은 성적 금기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집단의 다산성을 줄이는 효과를 가진 성철학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이 만연하여 성공적인 번식을 방해했다. 피임, 자위행위, 오럴섹스와 항문 섹스, 동성애, 페티시즘, 수간 같은 임신할 염려 없이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성행위도 늘어났다. 노예제도, 구금, 거세, 자발적인 금욕도 여기에 가담했다.
어떤 상황에 잠시 노출되었을 뿐인데도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쉽게 잊을 수 있는 가벼운 인상만 받는 경우도 있다. 첫번째 경우는 외상성 학습이라고 부를 수 있고, 두번째 경우는 정상적인 학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정신적 외상은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각인은 긍정적인 과정이다. 동물이 각인을 경험하면, 무언가에 대해 절대적인 애착을 갖게 된다. 외상성 경험과 마찬가지로 이 과정은 순식간에 끝나고, 거의 수정할 수 없으며, 반복을 통해 강화해줄 필요도 없다. 인간의 경우, 이 과정은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일어난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서 사랑에 빠질 때도 이 과정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낱말은 사실 각인 과정에 수반되는 감정적 느낌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새끼들은 지나치게 활동적이기 때문에, 각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어미가 새끼들을 모두 가까이에 두고 보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각인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각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은 잘못된 성적 각인을 불쾌하게 여기고, 페티시즘 도착자가 물건에 애착하거나 동성애자가 동성과 성관계를 가진다는 생각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인간 어른이 애완견을 귀여워하거나 원숭이 새끼한테 젖병으로 젖을 먹이는 또 다른 종류의 잘못된 각인은 즐겁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어째서 이 두가지를 차별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 활동은 사실상 전혀 차이가 없다.
은퇴할 나이가 가까워지면, 양지바른 곳에 조용히 앉아 있는 꿈을 자주 꾼다. 그는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쉼으로써 즐거운 노년이 오래 연장되기를 바란다. 그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는 꿈을 어떻게든 실현하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수명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줄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극 투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간 동물원에 사는 우리는 누구나 평생 동안 자극 투쟁에 참여하고, 자극 투쟁을 포기하거나 서투르게 대응하면 김각한 곤경에 빠진다.
투쟁 목표는 주위 환경으로부터 가장 적당한 양의 자극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많은 양의 자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극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자극이 지나치게 많을 수도 있다.
자극 투쟁의 목표는 우리의 존재 전체에 가장 적당한 수준의 자극을 얻는 것이다.
부족 생호라자였던 우리 먼 조상한테는 이것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 때문에 늘 바빴다. 목숨을 건사하고, 먹거리를 구하고, 세력권을 지키고, 적을 피하거나 물리치고,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집을 짓고 유지하려면, 시간과 정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했다. 유난히 어려운 시절에도, 최소한 외부 세계의 도전은 비교적 솔직하고 직접적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초부족 생활은 복잡한 좌절과 갈등만이 아니라 자극 부족으로 인한 권태도 강요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환경에 사는 야생동물이나 '야생'인간한테서는 자극 투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특별한 종류의 도시 동물 - 동물원 식구 - 한테서는 자극 투쟁을 찾아볼 수 있다.
동물원은 인간 동물원과 마찬가지로 거주자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다. 음식의 규칙적인 공급을 보장해주고, 악천후로부터 보호해주고, 자연의 육식동물한테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동물원은 또한 거주자의 위생과 건강을 돌보아준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주자에게 심한 압박을 줄 수도 있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환경에서는 동물원의 동물도 생존 투쟁에서 자극 투쟁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주위 환경에서 들어오는 자극이 너무 적으면, 그들은 자극을 늘리는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이따금 자극이 너무 많아지면(새로 붙잡힌 동물이 느끼는 공포처럼), 그 자극을 줄이려고 애서야 한다.
일부 동물한테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이런 관점에서 동물을 두 가지 기본적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문가이고, 또 하나는 기회주의자다. 전문가는 하나의 생존 장치를 최고 수준으로 발달시켜 여기에 존재 자체를 의존하고 있는 동물이다. 이 생존 장치는 그들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개미핥기, 코알라, 판다, 뱀과 독수리가 그런 동물이다.
기회주의자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다. 그들은 하나의 생존 장치를 전문화 수준까지 발달시키기 못한 동물이다. 개와 늑대, 미국너구리와 긴코너구리, 원숭이와 유인원이 그런 동물들이다. 이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팔방미인 같아서 주위 환경이 제공해주는 이익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얻으려고 애쓴다. 야생 상태에서는 주위 환경을 탐험하고 조사하는 일을 결코 멈축지 않는다. 생존이라는 활에 또 하나의 시위를 추가해줄만한 거라면 무엇이든 다 조사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평안히 쉴겨를이 없다. 진화가 이들을 오랫동안 편히 쉬지 못하게 해놓았다. 이들은 게으름을 혐오하고 항상 쉴새없이 활동하게 만드는 신경계를 진화시켰다. 모든 동물 가운데 최고의 기회주의자는 바로 인간이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탐험을 무척 좋아한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위 환경에서 많은 자극을 얻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본래부터 갖고 있는 욕구다.
자극 투쟁은 여섯 가지 기본 원칙에 따라 작용한다.
1.자극이 너무 약하면,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쓸데없는 문제를 의도적으로 일으킴으로써' 행동을 늘릴 수 있다.
집에서 기르는 개는 먹이에 굶주리지는 않겠지만, 자극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현대의 초부족 구성원에게 일은 동물의 먹이 사냥에 해당한다. 동물원에 사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는 필요 이상의 복잡한 방법으로 먹이를 사냥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극빈'이라고 할 만한 것을 견디고 있는 초부족의 일부만이 전적으로 생존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잠시나마 짬을 낼 수 있으면 역시 자극 투쟁에 가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사냥을 하며 살았던 원시 부족은 '생존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일은 다채롭고 흥미진진했다. 초부족에서 낮은 지위에 있는 불운한 구성원도 '생존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만, 원시인만큼 행복하지 못하다. 노동의 분화와 산업화 덕분에, 그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복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판에 박힌 똑같은 일을 날마다 해마다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거대한 두뇌를 업신여기는 짓이다.
자극이 지나치게 모자란 주부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이다. 근대적인 노동 절약 장치에 둘러쌓인 주부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 노동 낭비 장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겉보기만큼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주부는 적어도 자신의 활동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구를 다시 배치하거나 우표를 수집하거나 개를 애완견 전람회에 참가시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잇는가? 그것이 무엇을 입증해주는가? 그래봤자 얻는 게 무엇인가? 이것은 자극 투쟁의 위험 가운데 하나다. 자극 투쟁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생존 활동의 대용품일 뿐이고,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든 대용품은 여전히 대용품으로 남아 있다. 환멸은 쉽게 생겨날 수 있고, 일단 생겨난 뒤에는 그 환멸을 처리해야 한다.
몇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하나는 다소 과감한 방법이다. '위험한 생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방법은 자극 투쟁의 변형이다. 환멸에 빠진 10대 청소년은 놀이터에서 공을 던지는 대신, 유리를 끼운 창분에 공을 던질 수 있다. 환멸에 빠진 주부는 개를 쓰다듬는 대신, 우유 배달부를 어루만질 수 있다. 환멸이 빠진 사업가는 자동차 엔진을 떼어내는 대신, 여비서의 옷을 벗길 수 있다.
이보다 덜 과감한 변형을 '대리인을 내세운 위험한 생존'이다. 이 방법이 취하는 한 가지 형태는 남의 감정 생활에 끼여들어, 당신 자신이 겪어야 할 혼란을 대리인 대신 일부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심술궂은 뜬소문의 원리다. 뒤에서 남을 헐뜯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그토록 인기있는 이유는 직접적인 행동보다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대리인을 내세운 위험한 생존'의 두번째 형태는 그렇게 해롭지는 않다. 이것은 책이나 영화,연극,텔레비전에 나오는 허구적인 등장인물의 생존 드라마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2.자극이 너무 약하면, '정상적인 자극에 과잉 반응을 보임으로써' 행동을 늘릴 수 있다.
이것은 자극 투쟁의 과잉 탐닉 원리다. 첫번째 경우처럼 곧바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문제를 일으키는 대신, 이미 수중에 있는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 자극이 원래의 역할에서는 더이상 당신을 자극하지 못해도, 계속 거기에 반응을 보인다. 그 자극은 단순한 심심풀이 장치가 되어버린다.
관람객이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허용된 동물원에서는 할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따분한 동물들이 계속 먹어대는 바람에 지나치게 비대해질 수 있다.
동물원에서 뱃속에 들어간 음식의 엄청난 압력때문에 질식해서 죽은 곰들의 사례도 있다. 이런 동물들은 자극 투쟁에 바쳐진 제물들이다.
먹는 행동에 과잉 탐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되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 동물은 지나칠 정도로 제 몸을 손질하게 될 수 있다.
포유류는 살갗이 헐어서 심한 염증을 일으킬 만큼 맨살을 긁어대고 핥을 수 있다.
자극 투쟁을 하는 인간의 경우, 이 원리가 취할 수 있는 불쾌한 형태는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에 오랫동안 엄지손가락을 빠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어머니와의 접촉과 상호작용이 지나치게 적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에는, 깃털을 잡아뽑는 대신 손톱을 물어뜯거나 상처의 딱지를 잡아떼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심심풀이로 음료를 마실 경우, 그 음료가 연하고 달콤하면 역시 비만증을 일으킬 수 있다. 독한 술을 마시면 알코올 중독에 걸릴 수 있고, 간이 손상될 수도 있다. 흠연을 또 하나의 소일거리가 될 수 있지만, 이것도 역시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3.자극이 너무 약하면, '새로운 활동을 궁리해냄으로써' 행동을 늘릴 수 있다.
이것은 창조성의 원리다. 익숙한 행동양식이 너무 따분해지면, 동물원의 영리한 동물은 새로운 행동양식을 궁리해낼 게 분명하다.
동물원의 많은 동물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관람객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관람객을 자극하면, 관람객도 그들을 자극할 것이다. 당신이 창의적인 동물이라면 동물원 관람객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다.
이 동물원 체조와 일상적인 구걸 행동의 중요한 요점은 자연계에서는 여기에 수반되는 근육 운동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행동양식은 우리에 갇혀 있다는 특수한 조건에 적응하여 생겨난 발명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심심풀이를 위한 시시한 일의 영역에서 예술과 철학과 순수과학의 자극적인 세계로 옮아간다.
내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활동 형태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초부족 상태가 가져다주는 커다란 이익이다. 또한 인간의 두뇌가 이처럼 아름다운 소일거리를 궁리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는 생존 투쟁자가 아니라 자극을 얻으려고 애쓰는 자극 투장재들 틈에 끼게 된 것을 마땅히 행운으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4.자극이 너무 약하면, '정상 이하의 자극에 정상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행동을 늘릴 수 있다.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 내면의 충동이 너무 커지면, 정상적으로 반응을 일으킬 외부 자극이 전혀 없는데도 저절로 '넘쳐흐를' 수 있다.
순찰할 세력권이 없으면 비좁은 우리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사례들은 페티시즘을 연상시키지만, 페티시즘과 혼동하면 안된다. '범람 활동'의 경우, 동물은 자연스러운 자극이 주위 환경에 도입되면 당장 정상으로 돌아온다. 내가 언급한 사례에서 수컷들은 자기와 같은 종의 암컷이 우리에 들어오자 즉시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5.자극이 너무 약하면, '선택된 자극을 인위적으로 확대함으로써' 행동을 늘릴 수 있다.
당신은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초정상 자극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을 좋아하기 때문에, 꽃의 품종을 개량하여 좀더 크고 화려한 꽃을 만든다. 우리는 인간의 율동적인 동작을 좋아하기 때문에 체조를 개발한다. 우리는 음식의 풍미를 좋아하기 때문에 음식을 좀더 향기롭고 맛있게 만든다. 우리는 특정한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강한 향수를 만든다. 우리는 안락한 바닥에 누워서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스프링과 매트리스를 갖춘 초정상 잠자리를 만든다.
우선 우리 자신의 겉모습 - 옷과 화장품 - 부터 살펴보자. 남성복은 대부분 어깨에 심이 들어가 있다. 사춘기에는 남성과 여성의 어깨 성장률이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서, 남자의 어깨가 여자보다 넓어진다. 이것은 어른 남자가 남성다움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신호다. 어깨에 심을 넣는 것은 이 남성다움에 초정상적인 성질을 추가해준다. 이런 경향이 가장 심하게 과장되는 것은 가장 남성다운 영역인 군대다. 군복은 어깨에 심이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딱딱한 견장을 덧붙인다. 키가 큰 것도 역시 어른의 특징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격적인 의상에서는 높은 모자를 써서 키가 초정상이라는 인상을 준다. 죽마가 그토록 거추장스럽지만 않다면, 우리는 죽마도 타고 다닐 게 분명하다.
상업 광고의 세계는 초정상 자극의 집단이다. 여기에서는 저마다 서로를 능가하려고 기쓰는 초정상 자극들이 거품을 일으키며 들끓고 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사람의 모습을 그릴 때, 아이들한테 중요한 특징들은 커지고 중요하지 않은 특징은 줄어들거나 생략된다. 대개는 머리와 눈과 입이 가장 불균형하게 확대된다. 이것들은 아이한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신체 부위다.
이런 종류의 시각적 극단주의는 원시 예술에도 널리 퍼져 있다.
선사시대의 입상이 다산을 상징할 경우에는 생식과 관계가 있는 특징들만 초정상적으로 강조되고, 나머지 특징은 모조리 배제될 수 있다. 그런 인물상은 임신하여 크게 부풀어오른 배, 불룩 튀어나온 거대한 엉덩이, 펑퍼짐한 둔부와 풍만한 젖가슴을 자랑하지만, 다리,팔,목이나 머리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시각 예술의 역사에는 거의 처음부터끝 까지 이 자극 극단주의 장치가 퍼져 있었다. 본질적인 요소는 초정상적으로 확대하고 비본질적인 요소는 저정상적으로 축소하는 수정은 고대 예술의 거의 모든 형태에서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주의가 점점 유럽 예술을 지배하게 되었다. 화가와 조각가는 외부 세계를 되도록 정확히 기록하는 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화가와 조각가는 외부 세계를 되도록 정확히 기록하는 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미 사슬이 끊어졌는데도, 예술가들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사슬을 완전히 놔버렸다. 지난 60년 동안 자극 극단주의가 점점 강력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자, 반란의 물결이 잇따라 일어났다. 선택된 요소는 확대하고 나머지는 제거한다는 것이 또다시 규칙이 되었다.
근대 예술가들이 이런 식으로 사람의 얼굴을 조작하여 그리기 시작하자, 격렬한 항의가 일어났다. 좀더 기본적인 예술의 임무는 자극 투쟁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런 그림은 그 기본적인 임무로 되돌아 온 것뿐인데도, 마치 20세기 생활의 새로운 병폐를 반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퇴폐적인 광기로 매도당했다.
나는 초정상 자극을 자연스러운 정상 자극의 인위적인 과장으로 정의했지만, 이 개념은 창조된 자극에도 특별한 방법으로 적용될 수 있다. 두 가지 분명한 예를 들어보겠다.
아름다운 여성의 붉은 입술은 분명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자극이다. 그녀가 좀더 선명한 붉은색을 입술에 칠해서 붉은 입술을 과장하면, 이것은 분명 초정상 자극으로 입술을 변형시킨 것이다.
하지만 번쩍거리는 자동차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것도 매우 자극적일 수 있지만 전적으로 인위적이고 만들어진 자극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다양한 자동차를 둘러보면, 초정상 자극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동차를 쉽게 골라낼 수 있다.
그러므로 초정상 자극의 원칙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고, 우리의 거의 모든 노력에 어떤 식으로든 스며들어 있다. 자연적 생존 욕구에서 해방된 우리는 최대한의 자극을 얻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자극을 쥐어짜낸다. 그 결과, 때로는 자극 소화불량에 걸리기도 한다. 자극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에서 한 가지 결점이 있다. 자극이 강력해지면 반응도 그만큼 강력해져서, 우리가 기진맥진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쳐버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셰익스피어의 촌평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순금에 금도금을 하는 것,
백합에 물감을 칠하는 것,
오랑캐꽃에 향수를 뿌리는 것....
참으로 쓸데없고 어리석은 지나침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떤 것도 지나침처럼 성공할수는 없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충격은 금방 사라진다. 새로운 유행은 순식간에 흡수되고, 그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자극을 제공할 또 다른 유행이 필요해진다. 우리가 항상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오늘날 패션계에서 가장 대담한 혁신도 내일이면 단정하고 고상한 차림으로 존경받게 될 테고, 곧이어 새로운 반역들이 그것을 대신하기 위해 떼진어 몰려오면 오늘의 혁신은 순식간에 시대에 뒤떨어진체 과정을 통해서만 극단적인 패션 - 초정상 자극을 주는 첨단 디자인 - 은 강력한 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일지 모르지만, 패션의 초정상 자극에 관한 한, 새로움은 필요의 어머니라는 말도 사실이다.
6.자극이 너무 강하면, '들어오는 감각에 반응하는 것을 멈춤으로써'행동을 줄일 수 있다.
비정상적인 과잉 자극이 동물에게 심한 고통을 줄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달아나거나 숨을 수 없으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어떻게든 차단해버려야 한다.
하지만 영원히 웅크리고 있거나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활동할 때는 '판박이 행동'을 하여 긴장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tic현상)
또 다른 변형은 '명상적 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명산은 엄청난 양의 상충되는 정보가 두뇌에 입력되는 것을 줄여서, 과잉 자극에 시달리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자신이 유난히 과잉 자극을 받기 쉽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히 조기 경보를 신호를 발달시킨다. 이런 사람들은 과잉 자극을 받으면 오래된 상처가 도지기 시작할 수도 있고, 편도선이 부을 수도 있고, 충치가 욱신거릴수도 있고, 뾰루지가 날 수도 있고, 경련이 일어날 수도 있고, 두통이 날 수도 있다.
의학계에서는 이것을 '전이 증상'아라고 부른다.
우리의 사냥꾼 조상들이 맡아야 했던 어려운 역할이 사실상 그것을 강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주위 환경을 광범위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먼 옛날과 마찬가지로 활동력이 왕성한 신체와 호기심이 왕성한 정신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는 좀더 자주 벌렁 드러누워서 좀더 오랫동안 쉴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는데도, 그러지를 못한다. 쉬는 대신, 우리는 자극 투쟁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이기 때문에 아직은 별로 능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정도를 지나치거나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실수를 끊임없이 저지른다. 그리하여 과잉 자극을 받고 지나치게 활동적이 되거나 자극이 모자라 활동 부족이 되었다고 느끼자마자, 우리는 고통스러운극단에서 홱 방향을 바꾸어, 우리를 다시 적당한 자극과 적당한 활동이라는 유쾌한 중용으로 데려다줄 행동에 몰두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꾸준히 중앙 코스를 유지한다. 나머지는 양극단을 오락가락 한다.
우리가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제정신을 잃고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따르면 탐험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혁신자는 비교적 불행하고, 심지어는 정신병을 앓는 경향마저 보인다. 우리가 자극 투쟁의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남녀는 설령 다른 사람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더라도 틀림없이 불안하고 불만스럽게 사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예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는 이 예언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우리는 흔히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그들의 행동에 대해 특별한 인내심을 보여주고, 때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진 신세를 그런 포용력으로 조금이나마 갚기도 한다. 그들은 불균형한 방법으로 자극 투쟁을 추구하고, 그들의 모난 행동은 바로 그런 불균형한 방법의 불가피한 소산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다음 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항상 그렇게 이해심이 많은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많은 점에서 어른의 자극 투쟁과 비슷하다. 아이들은 부모가 생존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남아돈다.
어린이는 독창성이 풍부하고, 어른은 생산력이 뛰어나다. 어린애 같은 어른은 독창적인 생산력이 뛰어나다. 어린애 같은 어른은 독창적인 생산력이 뛰어나다. 어린이는 주위 환경을 탐험하고, 어른은 주위 환경을 체계화한다. 어린애 같은 어른은 자신의 탐험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여 탐험을 더욱 강화한다. 어린애 같은 어른은 창조적인 일을 한다.
본질적인 요소이지만, 창조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새로운 것을 탐험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이다. 이 충동은 새로운 장난감을 조사하고,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것을 시험해보도록 우리를 몰아댄다. 일단 탐험을 끝내면, 익숙하지 않았던 장난감은 익숙해질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의 창의성이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장난감을 활용하거나 새로운 장난감에서 배운 것을 활용하는 창의성을 발휘한다. 여러가지 장난감에서 얻은 경험을 재결합하여 그것으로 처음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객체지향성, 호라이즌의 겹쳐짐
탐험에는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이 따르고, 불확실한 것은 두렵다.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그 두가지는 서로 정반대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재난이고, 또 하나는 안전의 증가다. 예컨대 키워야 할 새끼가 많은 어미 쥐는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어미 쥐는 새끼들을 먹이고 몸을 건사해주고 위험에서 보호하려고 쉬지 않고 일한다. 따라서 어미 쥐는 탐험할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난이 닥치면, 어미 쥐는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제정신을 잃고 비상탐험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새끼들이 잘 자랐고 식량도 충분히 저장해놓았다면, 어미 쥐를 짓누르던 압력은 약해진다. 그러면 어미 쥐는 전보다 훨씬 안전해진 입장에서, 주위 환경을 탐험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칠 수 있다.
따라서 탐험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공포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뛰어드는 비상 탐험과 안전한 입장에서 즐기는 보장 탐험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도 전쟁의 혼란과 격변이 계속되는 동안, 재난에 직면한 인간 공동체는 그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성공적이고 번영하는 공동체도 안전이 보장된 유리한 입장에서 탐험을 즐기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대처할 능력도 없으면서 너무 많은 것을 풀어놓았기 때문에, 사회의 엄청난 발전과 복잡성은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함부로 남용된 적도 많았다. 초부족 상태는 우리에게 초지위와 초정상적인 힘을 떠맡겼지만, 우리는 이것을 합리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무능력은 우리가 이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난을 낳았다. 이 새로운 재난의 과거의 어떤 재난보다도 갑작스럽고 도발적이었다. 어떤 초부족의 격렬한 보장 탐험 활동이 눈부신 효과를 거두고 새로운 형태의 경이로운 창조성이 꽃을 피우면, 그 초부족은 번영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번영의 단게에 자리잡자마자 재난이 일어나곤 했다. 침략자와 폭군들이 이제 갓 세워진 복잡한 사회구조에서 가장 허략한 기구를 박살내고, 그러면 비상 탐험이 대규모로 되돌아왔다. 새로운 건조물이 만들어질 때마다 같은 비율로 파괴가 이루어졌다. 건설과 파괴는 지난 1만 년 동안 시게추처럼 오락가락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들 중에는 이따금 원시 공동체의 소박한 생활을 부러운 눈으로 뒤돌아보고, 원시시대의 에덴 동산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진지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런 계획에 크게 공감할지 모르지만, 그런 계획이 사실은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근래에 북아메리카를 비롯한 여러 곳에는 문명 사회에서 이탈한 유사 원시 공동체가 등장했는데, 이런 공동체의 주요 약점은 생겨날 떄부터 인위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공동체는 어차피 초부족 생활의 공포만이 아니라 그 흥분까지 맛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평생 동안 높은 수준의 정신 활동에 적합하도록 조절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사회적 순결을 잃어버렸고, 순결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모두 새로운 원시시대에 잘 적을할지 모르지만, 여기에 속아서는 안된다. 소박한 생황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인간 동물원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제기한다. 그의 새로운 역할은 이론적으로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매혹적일 만큼 새로운 문제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 거주자들이 유사 원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중대한 탐험 활동이 된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내세운 목표는 순수하고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 계획이 그토록 만족스러운 까닭은 순수하고 소박한 생활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중대한 탐험 활동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활동이 성공적이면, 공동체는 곧 조직되고 팽창할 것이다. 그러면 순식간에 초부족의 격렬한 경쟁장 안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20세기에는 유사 원시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고 에스키모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처럼 진짜 원시 공동체도 그대로 남아 있기가 어렵다. 전통적으로 저항정신이 강한 유럽의 집시들조차 인간 동물원 상태의 무자비한 확산에 차츰 굴복하고 있다.
우리가 자극 투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면, 가장 보람있는 접근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부족 구성원 전체가 어느 쪽으로 자극 투쟁을 추구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독창적인 해결책을 왜 좀더 자주 선택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두뇌 속에 엄청난 탐험 능력이 누워서 빈둥거리는 상태로 잠재해 있고, 이론적으로는 어느 무엇보다도 이 해결책을 선호해야 마땅하다. 번영하는 초부족 도시에서는 '모든'시민이 마땅히 잠재적인 '발명가'여야 한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좋은가?
초부족은 거대한 부모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돌봐준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어린애같은 호기심을 좀더 개발하지 않는가?
그 대답의 일부는 어린이가 어른보다 지위가 낮다는 것이다. 우위에 있는 동물은 필연적으로 하급자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애쓴다.
초부족에는 젊은 구성원의 창의성을 억누르려고 하는 강력한 경향이 존재한다.
교육 실험의 분위기가 차츰 고조되었을 때, 기성세대의 첫 반응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너그럽게 즐기는 것이었다. 젊은 세대가 예술과 문학, 음악, 오락과 사회 관습처럼 널리 받아들여진 전통을 점점 더 대담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신중하게 지켜보는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경향이 좀더 위협적인 정치와 국제 문제의 영역까지 확산되자, 그들의 인내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몇몇 예외적인 괴짜 사상가가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거대한 군중으로 커지자, 기성세대는 서둘러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반응 - 공격 - 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기성세대는 젊은 지식인들의 머리를 너그럽게 쓰다듬어주는 대신, 경찰봉으로 두개골을 내리쳤다. 사회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키운 활기찬 두뇌는 곧 과로 때문이 아니라 얻어맞은 충격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