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관련 서적이 아니어서 의아해 할 수 있지만 투자도 결국 인문학이다. 인간을 알고 인간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투자다. 그래서 주식에만 골몰해서는 투자에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천재가 적은 에세이다.

뭔가 교훈이나 지식으로서의 정보가 적힌 것은 아무것도 없음. 문체도 굉장히 편하게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시대의 천재의 머릿속은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같은 천재의 숨겨진 단면을 보고 싶은 마음에 책을 열었다. 천재들은 세상이라는 맵의 숨겨진 부분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시야를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면 몇번을 읽어도 부족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들을 배우고 보려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고르고 보고 느껴야 하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천재가 보는 세상과 사회.


p24 체벌에 대하여

평화로운 환경에서 어째서 그렇게도 빈번하게 선생님이 학생들을 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그야말로 전쟁통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물론 학생을 처벌하지 않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남자 선생님이 학생들을 체벌했다고 생각한다. 우익 사람들은 자주 "전후의 민주주의 교육이 일본을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전후의 민주주의 교육"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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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역시 불쾌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그때 '매를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로 매를 맞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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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같은 효고 현의 고등학교에서 여고생 교문 압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

그리고 해당 교사를 '불행한 사건이지만, 교육에는 열심이니 선생님이었다.'고 변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점점 더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 열심이라는 것이 문제를 한층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효고 현 여고생 압사사건은 유투브에 검색해보면 당시 뉴스가 나옴. 정시가 되면 교문을 선생들이 닫는데 시험날이었던 사건당일, 한 여고생이 정시보다 조금 일찍 닫히는 교문을 통과하려다 교문에 머리가 끼어 사망한 사건. 기계식으로 자동을 닫히는 문도 아니고 사람이 닫는 문인데 보지도 않고 강하게 닫았다는 얘기. 사건을 일으킨 교장이나 학교 선생들은 그저 '지각'과 '교칙'만 이야기 함.

체벌이 열성의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것은 세속적인 권위에 의해 지탱되는 단지 비굴한 폭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일은 비단 학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비굴한 폭력성을 지겨울 정도로 보아왔으며, 되도록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P.33 모래사장 속의 자동차 키

하지만 그때도 나는 특별히 화를 내진 않았다. 몹시 실망스럽긴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질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새 동전이 달린 키홀더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언젠가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하고 나는 문득 그 때 생각했다. 형태가 있는 것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언젠가 어디선가 홀연히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그것이 인간이든 물건이든 간에.

P.36 안자이 미즈마루의 비밀의 숲

한 아가씨가 내게 다가와 "춤추지 않을래도?"라고 하였다. "아뇨, 난 그런 건 좀..."하고 피하려는데, 미즈마루 씨가 엄숙한 얼굴로 "이보게, 하루키, 이럴 때 흔쾌히 응하는 것이 예의인 거요. 여자에게 창피를 줘서는 안 되지, 으흠."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나도 아직 젊었고 세상의 무서움이란 것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래? 그게 예의란 말이지?"하고 생각하고 잠시 함께 춤을 추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오야마 부근에, "하루키는 저래 봬도 여자하고 진한 치크 댄스를 추는 게 취미인가 보더라고. 어느 클럽에서 아주 진하게 추더라니까."하는 과장된 풍문이 퍼지게 되었다. "하루키 씨 그런 분이셨어요? 소문 듣고 실망했어요."라는 말까지 어느 여성 편집자로부터 들어야 했다. 나는 원래 일상다반사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기 때문에 아무렇든 상관없지만, 혹시나 해서 소문의 근원지를 파헤쳐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미즈마루 화백이 항간에 퍼뜨린 것이었다.

P.45 신문과 정보에 대한 몇 가지

정보라는 것은 참 묘해서, 들어오는 정보의 어디까지가 필요하고 어디서부터가 필요하지 않은지를 생각해보면, 점점 경계선이 불분명해진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전부 필요 없는 것 같고, 반대로 일단 정보가 부족하다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안해지게 된다. 그래서 정보산업이 이처럼 번성하는 것이리라.

P.57 매,죽 클래스. 러너스 클럽1

도대체 이 친구의 연습은 가히 경이롭다고나 할지,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냅색을 등에 메고 스기나미의 사무실에서 도쿄역까지 달리고, 거기에서 그대로 후추에 있는 집까지 달려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돈을 갖고 있으면 도중에 포기하고 전철을 탈지도 모른다며 무일푼으로 달린다.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달리는 것이다.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그런 연습은 못 한다. 여름철에는 아침 일찍 가볍게 달리고, 그 다음에는 풀장에 가서 수영을 하는 정도다.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그런 연습은 못한다. 여름철에는 아침 일찍 가볍게 달리고, 그 다음에는 풀장에 가서 수영을 하는 정도다. 그래서 '에이조 군, 여름철엔 연습을 적당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실력이 늘기는 고사하고 몸만 버리게 될 걸세."하고 나는 항상 충고한다. 그러면 그는 "네, 그렇죠,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방심하게 해놓고 그동안 자기는 몰래 맹연습을 하고 있는 거 아냐?" 하고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항상 더 맹렬하게 연습에 매진한다. 이 친구는 달리기에 관한 한 의심이 많고, 집요하며, 극단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져 기어서 병원까지 가서는, "앞으로 1개월쯤 달리기는 하지 마세요."라고 의사에게 주의를 받곤 한다. 하지만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금세 또 좀비처럼 일어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세상에는 "운동은 몸에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에이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P.70 취미로서의 번역

스피커를 예를 들어 말하면, 듣는 사람에게 '아아, 훌륭한 소리구나.'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2급품이고, 우선 '아아, 훌륭한 음악이구나.'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진짜 1급품이다.

P.84 테네시 윌리엄스는 어떻게 버려졌는가?

뭔가를 비난한다는 것, 엄격하게 비평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텍스트를 온갖 비평에 열려 있는 것이고, 또 열려 있어야 한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뭔가에 대한 네거티브한 방향의 계몽은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사물을, 때로는 자기 자신까지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켜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런 부정에는 보다 크고 따뜻한 포지티브한 '보상'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뒷받침이 없는 네거티브한 연속적인 언동은, 즉효성이 있는 주사에 중독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일단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내게도 작가나 작품에 대한 기호라는 것이 있다. 사람에 대한 기호도 있다. 하지만 ---

'역시 남에 대한 험담은 쓰지 말자'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건 좋습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라고 말하고, 그와 똑같이 생각하고, 재미있다고 기뻐해주는 사람을 비록 소수라도 괜찮으니 발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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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목청을 높여서 통렬하게 누군가를 매도하는 쪽이 훨씬 더 스마트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작가보다는 비평가 쪽이 똑똑한 것 처럼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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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타인의 험담을 잘 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내 소설이 좋아지게 된답면, 나 역시 48시간 정도는 쉬지 않고 죽 온갖 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으리라, 내게 그런 재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기에 나는 될 수 있는 한 입을 다물고, 손을 움직이려고 하고 있다.

P.100 장수 고양이의 비밀

내가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소설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8년 가까이나 외국에 나가서 생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내내 일본에서 가게를 하면서 뮤즈와 함께 한가로이 살지 않았을까? 그런 가정을 이제는 잘 하지 않지만, 아마 그 나름대로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마이 페이스로 적당히 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위의 여러 가지 일들일랑 어찌 되었든 간데, 나 자신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이 먹은 뮤즈를 끌어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P.115 매, 죽 클래스 러너스 클럽 통신2

오르막길을 달리는 나의 기본 방침은 '내리막길에서 다섯 명을 앞서게 하고, 오르막길에서 열 명 앞지른다.'는 것이어서, 내리막길에서는 페이스를 의식적으로 떨어뜨리고, 오르막길에서는 기어를 내리고 엑셀을 세게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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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격이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거잖아요.

P.128 상처받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벌써 오래전 이야기인데, 나이를 먹으면 성욕이 점차 감퇴하지만, 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기사를 미국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남성이 "나이를 먹어 성욕이라는 불합리한 감옥에서 겨우 해방된 것을 알고, 나는 무척 기뻤다."고 고백한 기사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아직 30대 초반이어서, '아니, 정말 그런걸까?'하고 내심 감탄했다.

사람마다 다속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차 감퇴하는 것이 비단 성적인 능력만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는 능력'도 감퇴한다. 이는 확실하다. 예컨대 젊었을 적에는 나도 제법 빈번히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사소한 일로 좌절해서 눈앞이 깜깜해지거나, 누군가가 던진 한 마디에 가슴을 찔려 발밑의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꽤 심각했던 나날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젊은이들 중에는 젊었을 적의 나처럼 괴로운 마음을 껴안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래 가지고 내가 앞으로의 인생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하고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그렇게 고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일반적으로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처참하게 상처를 받지는 않게 되니까요.

왜 나이를 먹으면 상처받는 능력이 떨어지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또 그것이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마음이 편안한가 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처받는 일이 적은 쪽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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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것은 '어쩔 수 없지, 뭐. 다, 그런 거야.'하고 생각할 수 있으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다시 말해, 몇 번이나 그런 비슷한 일을 경험해왔고, 그 결과 무슨 일이 생겨도 '뭐야, 또 지난번과 똑같은 일이잖아?' 하고 생각하게 되어서, 이젠 매사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강인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순진한 감수성이 닳아버렸다는 의미이다. 즉 뻔뻔스러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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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나이 먹어서 젊은 애들처럼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고 인식했고, 나는 그 이후 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훈련을 쌓아왔던 것이다. -------------

하지만 나는 그때 절실히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고유한 권리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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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상처받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면 제일 좋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보지 못한 체, 듣지 못한 체 하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군요.

P.139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나는 회사에 대해서나 경제에 대해서 전문적으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없는 편이 아니어서, 사람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제법 있는 것 같다.

P.145 문학전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글을 쓴다는 것, 무에서 뭔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어차피 치고받는 난투극의 세계와도 같다. 모든 사람들에게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할 수도 없고, 본의 아니게 피를 흘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책임은 내가 양어깨에 지고 살아가는 수 밖에.

P.166 문과형과 이과형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극단적인 문과형이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 집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이과 계통의 사항'을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붠가 기구나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결하지 못하면 "그래가지고 남자라고 할 수 있어요!"하고 핀잔을 주었다.

얼마 전에 미국 소설을 읽는데, "어쩌다 남성용 생식기를 한 세트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왜 자동차의 변속장치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하고 투덜대는 남편이 등장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세상살이는 어딜 가나 다 비슷하구나 하고 절실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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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글은 앞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점차 전산화되어갈 것이다. 원리는 잘 몰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인터넷의 장점이자, 무서운 점이기도 하다. 다만 나는 앞으로 세계는 1)타인이 프로그램한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일을 하거나 놀거나 하는 사람과, 2)그 프로그램을 열심히 만드는 사람의 두 종류로 분류되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암울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상이지만.

P.171 좀 더 인간미 넘치는 사전이 있으면 좋으련만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 홀>에서 주인공 올비 싱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은 말이지, 아주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 말하자면, 인생은 호러블(끔찍한)한 것과 미저러블(불행한)한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호러블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랄 수 있지. 에를 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장애라든가... 그리고, 음... 미저러블한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미저러블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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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는 그 밖에도 특이한 대사가 여럿 나온다. 또 내가 좋아하는 대사는 "나는 그때 혼란스러워서 머리부터 바지를 벗어버렸어."라는 것.

P.186 아래를 보며 걷자

그 3만엔을 주웠을 때, 우리 부부은 손을 맞잡고 울었다....는 것은 과장이더라도, 솔직히 말해 그땐 정말 너무너무 기뻤다. 그 돈을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고 빚을 갚는 데 썼다. 위태로운 때에 아슬아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P.195 역시 한가로운 모양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매,죽 클래스 러너스 클럽 통신 3

당일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 100킬로미터 레이스를 달리기 위해, 그에 앞서 3개월 동안 매우 착실히 연습을 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리고, 그러고 나서 풀장에 가고, 일주일에 한 번은 30킬로미터를 달렸다. 거기에 쏟아 부은 시간만 해도 상당하다. 아내한테 일전에 "어째서 요즘 우리 사이에는 부부간의 대화라는 게 없는 걸까?"하고 지탄을 받았는데, '어재서 그럴까?'하고 생각해보니, 의심할 여지없이 이 레이스에 대비한 연습훈련 탓이었다. 바빠서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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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생활을 희생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머리 없고, 무리한 고통을 견뎌내면서, 왜 굳이 100킬로 레이스를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물으면(실제로 여러 사람이 물어보지만), 솔직히 말해서 대답할 말이 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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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은 레이스를 한 이틀 후인 화요일인데,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지만(달리면서 이따금 스트레칭을 한 덕분이다.) 팔 안쪽이 벌게지고 심하게 부어올랐다. 나는 팔을 비교적 크게 흔들기 때문에 팔목 주위가 건초염에 걸린 것처럼 되는 것이다. 풀마라톤 거리 정도만 해도 별 문제가 아닌데, 이 정도의 거리가 되면 손목의 근력 부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다행히 발은 부르트지 않았지만, 오른발 넷째 발톱이 떨어져 나가다시피 했다. 이런 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

P.202 탈모문제

인생이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함정으로 가득한 장치이다. 두번의 일시적 탈모 경험을 통하여 절감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총체적인 균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간단히 말하면 '인생이란 좋은 일이 하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하는 일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대신에 한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심하게 깨지거나 한다. 사랑이 하나 생겨나면, 미움도 하나 생겨난다. 바이스 버서(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머리카락이 때로 늘었다 줄었다 한 것은 그런 인과관계의 통절함을 내게 가르쳐주기 위한 일종의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그런 이유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을 때마다 나는 좀 더 어깨의 힘을 빼고 마음 편히 살아가자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깨의 힘을 너무 빼면 바보 같겠지만

P.210 말보로맨의 고독

그 말보로맨 간판을 좋아한 것은 비단 나 혼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와다 마코토씨도 그 간판의 뒷면을 <주간 분슌>의 표지화로 그렸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런 별 대수롭지 않은 사물에서 공감대를 발견하는 것은 꽤 기쁜 일이다. 인생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 하나이다.

P.245 이루지 못한 자들

몇 달 후, 다니구치와 가네이 선수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다니구치의 그때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연습했는데, 그가 했던 고생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물론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마추어, 그것도 매화 클래스 러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좀 염치 없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느꼈을 고통과 환희를 나도 어느 정도는 실감할 수 있다. 레이스나 인생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도중에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으니 그 얼마나 허무한 일이란 말인가? 달리다가 괴로워지면 지금도 자주 그 생각을 한다. 그리고 '힘들어도 적어도 나는 이렇게 달릴수 있고, 이렇게 쓸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올해도 올림픽 남녀 마라톤 대회 때문에 온 일본이 들끓었다. 나도 역시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물론 일본 선수가 이기면 기쁘고, 지면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무슨 메달을 땄느냐에는 솔직히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결과로서의 모양도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뭔가 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계속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250 동시상영이 좋아요

도저히 명작이랄 수 없는 두 편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거리로 나왔을 때의,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온몸에 스며들어 질퍽거리는 무료함이 좋았다.

그리고 그런 영화관에서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것을 마지막까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 내게는 꽤 피곤한 일이다. 나는 본 영화가 끝나고 엔딩 자막이 흐르기 시작하면 재깍 일어나 나와버리는데, 그러면 때론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P.253 여행의 동반자, 인생의 길동무

'언제 어떤 여행길에도 오케이'인 만능적인 책을 한 권 갖고 있다면, 인생은 상당히 편안해질 것이다.

내게 그런 책은 중앙공론사에서 출간된 <채홉 전집>이다. 왜 <채홉 전집>이 여행길에 가지고 가는 데 가장 적합한 책이냐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게는 상당히 명확하다.

1.단편 소설 중심이어서 단락을 짓기 쉽다.

2.어느 작품이나 질이 높아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다.

3.문장이 읽기 쉽고 소탈하면서도,

4.더욱이 내용은 풍부하고, 문학적 향기가 가득 차 있다.

5.사이즈도 손에 쥐기에 알맞고 무겁지 않으며, 표지가 두꺼워서 구겨지지 않는다.

6.만약 누군가에게 제목을 보여주더라도, '채홉을 읽고 있는 걸 보니 별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군'하고 여겨질 확률이 높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지만.

7.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어도 싫증나지 않고, 오히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조그만 발견을 할 수 있다.

내가 옛날에 <뉴요커>지의 어느 편집자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책상 뒤에 있는 책꽃이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의 영역본이 반 다스쯤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어째서 똑같은 책을 이렇게 몇 권씩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를 방문한 모든 분들께 그 질문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그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책인지 설명할 수 있고, 그리고 흥미를 가진 사람에게는 한 권 선물할 수도 있지요.

P.261 불평을 털어놓는 편지 쓰는 법

컴플레인 편지를 잘 슨느 방법에는 그 나름의 요령이 있다. 첫째 요령은 70퍼센트 정도 칭찬하고, 30퍼센트 정도 비방하는 것이다. 비방만 해서는 이쪽의 진의가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힘들다. "귀하의 가게에는 이러한 훌륭한 점이 있지만, 이런 점은 자못 섭섭했다."는 내용의 메시지로 작성해야 한다. 둘째 요령은 세부적인 것을 시시콜콜 쓰지 않는 것이다. "누가 어쨋다느니, 그래서 이렇게 됐다느니."하는 시어머니의 잔소리 같은 자세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자신이 가장 말하고 싶은 것, 즉 불만의 요점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쓰도록 한다.

그러한 원칙에 따라 오전 중에 2시간을 들여 컴플레인 편지를 완성했다. 그러나 결국 이 편지도 부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쓰고 나니 기분이 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P.267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

한마디 더 한다면, 교통 표어 말고 일반 표어도 이 세상에서 추방해준다면 대단히 기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7-5조풍의 거리의 폭력적 언어 드라이브에 때로는 참기 어려운 때가 많다. 얼마 전에 "쓰레기 하나 줍는 마음에 사라지는 쓰레기 하나"라는 표어를 보았다. 쩝, 확실히 말하고 있는 것은 옳지만,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가루이지와에서 "들어온 후에 후회 말고, 들어오기 전에 지키자!"라는 표어를 보았다. 무슨 소린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폭력단 이야기더군요, 으음.

P.269 "소도 알고 있는..."

묘하게도 내 머리 구석에 낚싯바늘처럼 걸려 있어서, 어떻게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일도 아닌데 왠지 잊혀지지 않는다.

아주 옛날에 카우실스라는 미국의 팝 밴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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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소를 보면 "소고 알고 있는 카우실스"하고 중얼거리다가 자기혐오에 빠진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 밴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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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삿포로인지 어딘지의 스트립쇼 극장의 뇌쇄적인 간판에 "벨렝코 중위도 여기서 데렝코"

*'데렝코'라는 것은 '데레루(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다)' + 코(벨렝코에서 '코'의 각운)의 조어

라고 쓰여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보았을 때도 '아, 정말 한심하다!'라고 생각했다. 너무 무의미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도 웬일인지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책 <내 심장을 향해 쏴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책이다. 길모어 가문에는 틀림없이 일종의 원한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기구한 역사를 거쳐서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의 혈통에서 흘러 내려온 '나쁜 피'였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인간이다. 유령이라는 것은 모습과 형태는 무섭지만, 그것은 결국 살아 있는 인간의 트라우마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게리는 결국 자신을 폭력적으로 말살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그 트라우마, 즉 유령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저자 마이클은 자녀를 낳지 않음으로써, 그 원한에 찬 혈통의 존속을 자기 대에서 단절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 책에는 여러가지 놀라운 역전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P.279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계속된다.

그런데 <화이트> 앨범 하면, 그 옛날 어딘가에서 본 번역 가사 중에, <오블라디, 오블라다>의 가사가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고 쓰여 있던 기억이 난다. '와, 초현실적인 가사구나 역시 존 레논(아니면 폴 매카트니)이야!'하고 생각하고, 가사를 귀 기울여 들어보니,

Obladi,Oblada,

Life goes on, blah!

였다.아마 그럴 것이다. 문장상으로 보면 이 블라는 브래지어의 '브라'가 아니라, 역시 소리를 지를 때 스는 '블라'일 것이다. 틀림없이, 울림이 같은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는 이미지는 그 나름대로 아주 재미있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하긴, 내 마음에 들어봤자 아무 소용 없지만.

P.284 안내문의 이면에 있는 것

그런데 엘리베이터 입구에 "휠체어를 사용하시는 분은 되도록이면 보호자 분과 동승해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안내문을 읽고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휠쳉를 타는 사람을 위한 전용 스위치를 일부러 엘리베이터에 설치해놓고서도, "되도록이면 누군가와 함께 오시라. 혼자서는 타지 마시라."라는 말을 하다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아예 그런 전용 스위치를 설치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을.

구태여 강조할 것까지도 없지만,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니고 잘못된 일도 상당히 많이 해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문제 삼아서 이러니저러니 거만스레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한심스럽다고 느낀 것은, 결국 이 백화점이 휠체어 사용자 전용의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일종의 '유행 액세서리'정도로밖에 간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 가관인 것은 이 백화점의 엘리베이터 안에는 또 다른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거기에는 "휠체어를 사용하시는 분은 바닥의 높낮이가 차기가 크므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십시오."라는 취지의 글이 쓰여 있었다.

이것을 다시 알기 쉽게 풀이하면, 요컨대 "백화점 안에는 도처에 높낮이의 차이가 있으니까 되도록 이면 혼자서는 오지 마시오."라는 뜻이 될 것이다. 너무 가혹한 이야기다. 애초에 바닥의 높낮이가 없도록 설계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P.294 학교는 아무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트 키티라는 여성이 쓴 <아우슈비츠의 소녀>라는 자서전이 있다. 나치 강제수용소의 강압적인 폭력과 광기 속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태인 모녀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특정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다른 그룹에 속하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철저히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헤치고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실로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런데 당시 10대 소녀였던 키티 부인은 전쟁이 끝난 뒤에 수용소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곳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다른 어떤 학대나 모욕보다도, 6년 동안 '그들이 나한테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한' 것에 대하여 그녀는 가장 극심한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 인생에서 중. 고등학교 6년간의 교육이 돌연 삭제돼버린다면, 결과적으로 지금의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소년이나 소녀들이 그런 밀폐된 장소에서 배우는 것은 남을 밀어젖히고서라도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남는 기지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의 존엄을 왜곡해버리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다.

학교교육에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학교교육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점차 재미있어진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였다.

더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 내킬 때 마음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날의 인생살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귀중한 학교였다.

사회에 나와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을 나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운동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내가 얼마나 몸을 움직이는 것을 원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느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노력'이라고 한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나라면 망설임 없이 '자유'를 선택할 텐데.

P.300 탈의실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마세요.

내가 옛날에 경영했던 술집에는 어찌 된 일인지 문학 관련 손님들이 많았다.

그때 내게 제일 처음 생각했던 것이 '이 업계의 사람들은 정말 잘도 남의 험담을 하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문단 바'라고 하는 곳은 밤이 깊어도 '돌아가려도 돌아갈 수 없는'사람들로 가득 찬다.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 다음에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거 참 무서운 세계로구나!'하고 그때 나는 절실하게 느꼈다.

나는 거기에서 여러가지 교훈을 단순히 머리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다. '어중간하게 칭찬받기보다는 험담을 듣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것도 그때 얻은 교훈 중 하나이다. 비판받거나 험담을 듣는 것은 물론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속아 넘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요즈음 책의 권말에 '자기편끼리 칭찬하는 듯한' 작품해설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P.306 '나'의 번역문제

결과적으로는 '보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 대해서 몇몇 분들로부터 "좀 다른것 같지 않아? 카버의 작품은 미국의 지방 소도시의 블루칼라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데, 그런 사람들이 '보쿠'라는 인칭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하는 지적을 받았다. 그 의견은 와타시가 아닌, 보쿠로서의 나에게도 일리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카버는 결코 일면적으로 '이쪽이다,저쪽이다'하고 딱 잘라 결론지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미국 블루칼라의 실생활을 그려, 미국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그이지만, 카버 자신은 결코 그렇게 단순한 블루칼라의 대변자는 아니었다.

분명히 노동자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젊었을 적에는 여러가지 가혹한 육체노동을 경험했지만, 그 후 인생은 대부분을 대학가에서 문학 동료들과 함께 보냈으며, 그의 온 정열을 사색과 창작에 쏟아 부었다. 그는 짐짓 젠체하는 '문단'에 친숙해 질 수 없다고 느꼈고, 주위의 노동자들의 생호라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은 이제 거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냉철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앰비벌런트(어느쪽에도 진정으로는 속할 수 없는)한 괴로움 같은 것이, 그의 인품이나 작품에 떨쳐낼 수 없을만큼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P.310 구타와 말투, 그리고 편의점 말투

나는 근 몇 년 동안 일본을 떠나 있었고, NHK 라디오도 그렇게 오래도록 차분히 들은 적이 없으므로, 언제부터 그런 변화의 조짐이 보였는지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어쨌든 일본어에는 원래 혀끝을 마는 듯한 라행 발음은 없다.

일본인이 R와 L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런데 일본인이 일부러 혀끝을 마는 식으로 발음을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계산대에서 "1만 엔 맡았습니다."라는 말도 귀에 거슬린다. 문법적으로 엉터리이고, 불쾌하니까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투서도 여러 통 받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적지 않은 것 같다. 확실히 귀에 거슬린다.

P.314 우리 세대도 그렇게 나쁜 세대는 아니었다.

그보다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각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 대하여 무의식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단느 잔혹하고 냉엄한 사실이었다. 나는 지금도 한 사람의 작가로서 그 사실을 깊이깊이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 모두 결속해서 나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우리 반 여자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조금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