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증권의 전신은 삼락증권으로
변호사 김윤도, 김당도 형제가 1962년에 설립하였습니다.
삼락증권 설립 당시 국내 증권회사는 60여개에 달했습니다.
1963년 초부터 시작된 책동전의 영향으로
(책동전이란 시세차익을 얻을 목적으로 시장에서 집중적으로 매매하여 인위적으로 시세를 급등, 급락시키는 행위 - 아마도 지금의 공매도, 공매수 행위인 것 같습니다..)
투자자들이 증권시장을 불신하면서 시황은 침체에 빠지고,
투매와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1966년에는 26개 증권사만 살아남았습니다.
삼락증권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1968년 사명을 중보증권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주식 또는 사채 발행에 의한 직접금융 조달과 건강한 자본 시장 육성을 위해
1968년 자본시장 육성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위축되었던 증권시장은 활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1973년 중동전쟁의 발발로
산유국들의 석유 금수조치가 세계적인 석유파동으로 번지면서 유가 급등으로 인한 외화 부담이 늘었고,
무역수지 적자폭도 증가, 상승곡선을 타던 경제 성장률이 절반수준으로 둔화되는 등,
주식시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중보증권은 1974년 3월 결산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1974년에는 영업용순자본의 법정금액 미달로 2일간 매매거래 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자본잠식 상태에 이르자 회사 매각을 결정 내리게 되었고,
1975년 양재봉 창업자가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해태제과 박병규 사장 등과 함께
중보증권을 인수하였습니다.
인수 후 중소 증권사였던 회사의 대형화를 위해 증자를 했고 영업점을 확장하였습니다.
또 고객들에게 증보증권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고 신뢰감을 주기 위해
사명을 "대신증권주식회사"로 변경하였습니다.
큰 대(大) 와 믿을 신(信)으로 이루어진 회사명은
크게 발전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진취적 시상과 고객에세 안심하고 투자자산을 맡길 수 있는 신뢰감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사명 변경후 영업기반을 확대한 대신증권은
1975년 10월에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였고
1977년 상반기까지 전국에 22개의 영업망을 가진 대형 증권사로 성장함으로써
상장사로서의 공신력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직원 수가 늘고 업무가 많아지면서 당시 매각 중이던 구 국립극장(현 명동 예술극장) 을 매입하여,
증권업계 최초로 자가 사옥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대신증권 영업부장이었던 박황이 고객돈을 횡령한 대형 금융사고였습니다.
박황의 비위사실을 인지한 대신 증권의 경영진은 이의 회수를 독촉하는 동시에 증권감독원에 사고발생 보고를 하고 검찰에 고발조치하였으며,
한편 양재봉 사장은 거액의 사재를 대위 변제금액으로 내 놓으면서
사건 발생 후 1개월여 만에 사건은 수습되었지만
1978년 2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양재봉 사장은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박황사건으로 인해 대신증권은
1978년 2월 27일부터 3월 26일까지 거의 모든 업무에 대한 영업정지처분을 받았습니다.
이후 대신증권의 경영난이 심화되고 적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1978년 하반기에 들면서 증권시장의 침체까지 지속되자 경영난 타개를 위해
명동사옥을 대한투자금융에 양도하고, 적자 점포를 중심으로 영업점 폐쇄를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을 하였습니다.
1980년에는 증권업계 최초로 전 지점에 온라인 거래를 실시하였고,
1984년에는 업계 최초로 일본에 지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위기를 맞이하는데요,
실물 경기가 위축되기 시작한 1989년 이후 증권 시장이 하락국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경기침체와 불안정한 정치, 사회적 요인으로 투자 심리가 위축된 데다가
하반기 들어 금융실명제 실시가 가시화되자
종합주가지수가 연중 최저치인 844.75포인트까지 폭락을 시작으로
3년 연속 하락하는 침체가 이어졌습니다.
대신 증권도 1989년부터 시작된 증권시장의 장기침체로 인해
거래 부진으로 인한 위탁 수수료가 대폭 감소하였고,
상품주식 운용에서도 이익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1990년 6월말에는 13억원의 누적적자를 기록하면서
구 명일동 지점을 시작으로 비업무용으로 판정된 부동산을 매각하였고,
신축사옥의 일부도 사용 초과분으로 매각했으며,
영업점이 없던 지역의 신축사옥은 준공과 동시에 처분하는 쓰라림을 겪기도 했습니다.
1993년에는 자본시장 및 주식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금융실명제" 와 "제2단계 금리자유화 조치"를 실시하면서
사상최대 하락폭을 거친 주식 시장은 안정세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11월에 시작된 IMF 외환위기로 국내 경제는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대형 증권사인 동서증권, 고려증권이 현금인출 사태에 따른 유동성 위기로 도산하던 시기였는데요,
대신 증권은 1995년부터 상품주식을 대거 처분해 5000억에 달하던 단기차입금을 상환하는 등
사전에 적극 대처한 덕분에 1998년 3월말 기준 단기차입금이 전혀 없는 무차입 경영을 할 수 있었고
건실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IMF 한파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위기를 잘 넘긴 대신증권은
2011년 중앙부산저축은행, 부산2저축은행, 도민저축은행 패키지를 인수해서 대신저축은행을 출범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우리 F&I 를 인수하여 대신 F&I 를 출범하였으며,
2018년에는 미국에 두번째 현지 법인을 세웠고
2019년 부동산 신탁업에 진출하여 대신자산신탁을 출범하였습니다.
증권 단일 업종에서 금융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모습니다.
9월 21일 대신증권의 종가는 14,570원이었습니다.
52주 최저가는 11,800원,
52주 최고가는 16,200원이었습니다.
배당은 거의 해마다 실시해 왔으며,
배당금액도 해마다 상승해 왔고, 배당률 또한 상당히 좋아 2022년 12월 28일 기준 배당 수익률은 8.36%입니다.
매출액은 해마다 상승해 왔고,
다만 2022년의 3/4분기의 영업이익이 많이 떨어져 있는 모양새입니다.
고금리 여파로 인해 주식 투자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면서 직격탄을 맞은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