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5일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주식을 하면서 처음으로 시장이 정말 무섭다고 느꼈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주가가 몇 퍼센트만 빠져도 꽤 크게 느껴지는데 그날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습니다.
삼성전자는 하루 만에 10.30% 하락했고 SK하이닉스도 9.87% 떨어졌습니다.
코스피는 무려 8.77% 급락했습니다.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될 정도였습니다.
며칠 동안 나눠서 나올 것 같은 하락이 하루에 한꺼번에 쏟아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이후 더 큰 변동을 경험했다면 지금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 시장에 있던 투자자라면 그날의 분위기를 쉽게 잊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갑자기 무너졌을까요?
시작은 미국 경기침체 우려였다
당시 첫 번째 충격은 미국 경기 둔화 우려였습니다.
미국 7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가 46.8까지 내려갔고 고용지표도 예상보다 약하게 나왔습니다.
취업자 증가폭은 11만4,000명에 그쳤고 실업률은 4.3%까지 올라갔습니다.
시장은 곧바로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식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침체 가능성이 커지면 기업 이익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특히 높은 성장 기대를 주가에 먼저 반영하고 있던 기술주와 반도체주는 충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시장에서 기술주가 먼저 흔들렸고 이 분위기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까지 빠르게 번졌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하루에 코스피가 8% 넘게 빠진 상황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변수가 겹쳤습니다.
바로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입니다.
엔캐리 청산이 하락을 더 키웠다
엔캐리 트레이드를 쉽게 설명하면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엔화를 빌린 뒤 그 돈으로 금리가 더 높거나 수익률이 높은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린 뒤 미국 주식이나 채권을 사는 방식입니다.
엔화 조달비용이 낮고 해외 자산 수익률이 높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행이 예상보다 강한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엔화를 빌리는 비용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고 동시에 엔화 가치까지 강해졌습니다.
엔화를 빌려 미국 주식을 샀던 투자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두 배로 커집니다.
해외 자산 가격은 떨어지고 갚아야 할 엔화 가치는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투자자는 가지고 있던 주식과 채권을 팔고 달러를 엔화로 바꿔 빌린 돈을 갚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엔캐리 청산입니다.
문제는 이런 거래가 한꺼번에 몰리면 매도가 또 다른 매도를 부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경기침체 우려가 시장 하락의 시작이었다면 엔캐리 청산은 그 충격을 크게 증폭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시장 예상보다 강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충격도 컸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엔캐리 청산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2024년 8월 5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엔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빠르게 청산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는 계속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엔캐리 거래의 매력이 떨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일본에서 엔화를 빌리는 비용이 올라가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미국 같은 투자 대상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줄어드는 경우입니다.
두 나라의 금리 차이가 충분히 크다면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해외에 투자하는 전략이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차이가 빠르게 좁혀진다면 거래를 유지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2026년 9월에는 일본과 미국이 모두 정책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렸습니다.
정책금리 차이만 놓고 보면 갑자기 엔캐리 청산 압력이 크게 높아진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최근 눈여겨볼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의 장기 국채금리입니다.
9월 25일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약 3.075%까지 올라왔습니다.
30년물 국채금리도 4.151% 수준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국채에서 받을 수 있는 수익률 자체가 크게 높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는 굳이 환율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해외 채권을 보유해야 할 이유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미국 채권을 팔고 일본 국채로 돌아오는 자금이 늘어난다면 해외 자산 매도와 엔화 매수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커지면 엔캐리 포지션 청산을 자극할 가능성도 생깁니다.
하지만 미국 금리도 같이 올라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국채금리만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최근 한 달 동안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도 상당히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엔캐리 트레이드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금리의 절대 수준만이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 사이의 금리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일본 금리가 오르더라도 미국 금리가 더 크게 오른다면 양국 간 금리 차이는 오히려 유지되거나 확대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실제로 미국 국채금리도 빠르게 상승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장기금리 차이가 여전히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채 금리 급등으로 금리 차이는 다시 벌어진 상황, 출처: Trading Economics
그래서 일본 금리가 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엔캐리 청산이 바로 시작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직접적인 신호는 환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엔캐리 청산에서 가장 먼저 볼 것은 달러·엔 환율
엔캐리 청산 위험을 볼 때 중요한 숫자 가운데 하나가 달러·엔 환율입니다.
엔화를 빌려 해외에 투자한 사람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상황은 엔화가 갑자기 크게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달러에 160엔이던 환율이 갑자기 145엔으로 떨어진다면 엔화 가치가 상당히 강해진 것입니다.
엔화를 빌린 투자자는 같은 금액의 엔화를 갚기 위해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해외 주식을 팔고 달러를 엔화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면 엔캐리 청산이 시장 변동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달러·엔이 급락하지 않으면 청산 위험은 상대적으로 낮음, 출처: investing.com
그런데 최근 환율 움직임을 보면 아직 2024년 8월과 같은 신호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달러·엔 환율은 9월 10일 약 154.43엔에서 9월 25일 약 157.29엔으로 오히려 상승했습니다.
달러·엔이 올라갔다는 것은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약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엔캐리 투자자 입장에서 엔화 상환 부담이 갑자기 커지는 상황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엔캐리 청산이 본격화되려면 일반적으로 엔화가 빠르게 강해지고 달러·엔 환율이 크게 내려오는 움직임을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는 오히려 엔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환율만 놓고 보면 연쇄적인 엔캐리 청산 신호가 뚜렷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봐야 할까?
현재 일본 장기금리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충분히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2024년 8월 5일 같은 폭락을 걱정하기에는 아직 확인해야 할 조건이 더 많습니다.
먼저 일본은행이 추가 금리 인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오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일본의 기준금리와 장기금리가 계속 빠르게 오르면 엔화를 낮은 비용으로 빌리는 장점이 점점 줄어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미국 금리입니다.
미국 금리가 내려가는데 일본 금리는 계속 올라간다면 양국 간 금리 차이가 빠르게 좁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엔캐리 거래의 매력을 낮추는 요인이 됩니다.
반대로 지금처럼 미국 금리도 같이 오른다면 금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달러·엔 환율입니다.
개인적으로 엔캐리 청산 여부를 볼 때 가장 직관적인 지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달러·엔 환율이 단기간에 빠르게 떨어지고 엔화가 급격하게 강해진다면 그때는 조금 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은 주식시장의 움직임입니다.
엔화 강세와 함께 미국 기술주와 일본 주식, 한국 반도체주까지 동시에 급락하기 시작한다면 레버리지 포지션 축소가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2024년 8월 5일과 지금은 무엇이 다를까?
2024년 8월 당시에는 여러 악재가 한꺼번에 겹쳤습니다.
미국 경기침체 우려가 갑자기 커졌고 일본은행의 예상 밖 긴축까지 나오면서 엔화가 빠르게 강해졌습니다.
시장 참여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미국 기술주 하락과 엔캐리 청산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아시아 증시까지 충격이 빠르게 번졌습니다.
현재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일본 장기금리가 많이 올라왔지만 미국 장기금리 역시 높은 수준입니다.
양국 금리 차이가 갑자기 사라진 상황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달러·엔 환율에서 엔화 급등 신호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장기금리 상승은 경계할 만한 변화지만 현재 단계에서 2024년 8월 5일과 같은 엔캐리 청산 충격이 임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여러 조건이 동시에 바뀔 때입니다.
미국 경기 지표가 갑자기 나빠지고, 미국 금리는 내려가는데 일본 금리는 계속 오르고, 동시에 엔화까지 빠르게 강해진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엔캐리 청산 가능성을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게 봐야 합니다.
결국 엔캐리 청산을 걱정할 때 일본 금리 하나만 보는 것은 부족합니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 달러·엔 환율, 미국 경기, 위험자산 가격을 함께 봐야 합니다.
2024년 8월 5일의 기억이 워낙 강하다 보니 일본 금리가 오르는 것만 봐도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확인되는 숫자만 놓고 보면 당시와 같은 연쇄 청산이 이미 시작됐다고 볼 만한 신호는 아직 제한적입니다.
일본 장기금리는 분명 경계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공포부터 가질 단계라기보다 어떤 조건이 바뀌는지를 차분하게 확인할 시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가 당분간 가장 먼저 볼 것은 일본 국채금리보다 달러·엔 환율입니다.
엔화가 갑자기 강해지고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까지 빠르게 줄어든다면 그때는 다시 2024년 8월 5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컨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