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랠리 속 이상한 숫자

올해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주가는 세 배 넘게 뛰었습니다. AI 열풍을 타고 반도체 종목들이 일제히 급등한 흐름 위에 있었죠. 그런데 CNBC가 31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을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오른 마이크론이 S&P500에서 가장 저평가된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겁니다.
주가가 세 배 뛰었는데 저평가라니, 언뜻 모순처럼 들립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이익이 주가보다 더 빠르게 늘었다는 뜻입니다.

12개월 선행 PER 6.66배, S&P500 세 번째로 낮은 수준

마이크론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6.66배입니다. S&P500 전체를 통틀어 차터커뮤니케이션스(3.96배), 제너럴모터스(6.25배)에 이어 세 번째로 낮은 수치입니다.
메모리 반도체가 원래 이렇게 낮은 밸류에이션을 받아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과 이익이 급등하지만, 제조사들이 증설에 나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는 순간 가격과 이익은 빠르게 무너집니다. 시장은 호황기의 이익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고, 그래서 높은 밸류에이션을 주지 않았습니다.

AI가 흔들고 있는 오래된 공식

이 공식이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AI 서버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해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면서 공급 부족이 구조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엔비디아의 콜렛 크레스 최고재무책임자(CFO)도 “메모리의 가격 상승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함께 HBM을 공급하는 3대 업체 중 하나입니다. 다만 중국 업체들의 시장 진입과 글로벌 메모리 업체들의 증설이 이어지면 과거처럼 가격이 다시 꺾일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진짜 변수는 ‘장기 계약’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마이크론이 최근 늘리고 있는 장기 공급계약입니다. 가격 상한과 하한을 설정하고, 일정 물량 구매를 의무화하는 방식입니다. 심지어 고객사가 물량을 실제로 가져가지 않더라도 대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조항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계약 기간은 대부분 2030년까지고, 마이크론은 계획된 계약이 모두 체결되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이 이 장기 계약에서 나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기 계약은 말 그대로 ‘양날의 검’입니다.
호황기: 가격이 아무리 급등해도 계약상 상한 때문에 상승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불황기: 반대로 가격이 급락해도 하한과 물량 약정 덕분에 실적 하락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론 경영진은 가격 범위가 설정된 계약에서 최저 가격을 적용하더라도, 매출총이익률이 과거 메모리 호황기의 분기 최고 수준을 크게 웃돌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결론: 밸류에이션은 ‘변동성’의 함수다

CNBC의 분석은 결국 이 지점으로 모입니다. 장기 계약으로 실적 변동성이 줄어든다면, 현재 6배 수준의 선행 PER은 지나치게 낮은 평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기순환주가 낮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실적 급락” 리스크 때문인데, 그 리스크가 계약 구조로 완화된다면 시장이 마이크론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변수는 남아 있습니다. 중국발 공급 증가 속도, 장기 계약의 실제 이행률 등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AI가 메모리 가격을 밀어올린다”는 단순한 서사보다, “장기 계약이 변동성을 줄여 재평가를 부른다”는 구조적 논리에 더 무게가 실린다는 점이 이번 보도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