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이 단일 신약 후보물질 기준 국내 제약산업 역대 최대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상대는 로슈그룹 자회사인 미국 바이오기업 제넨텍. 계약 규모는 최대 23억달러, 우리 돈 약 3조2000억원이다.
무엇이 팔렸나
지난 24일 한미약품은 신약 후보물질 ‘HM17321’의 개발권을 제넨텍에 이전하는 계약을 공시했다. HM17321은 지방은 빼면서 근육은 지켜주는 비만 치료 후보물질로, 지난해 11월부터 미국에서 임상 1상이 진행 중이다.
이번 계약으로 제넨텍은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독점 개발·상업화 권리를 확보했다. 후속 임상 2상도 제넨텍 몫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선급금이다. 계약 직후 한미약품이 받는 금액은 1억9000만달러로 전체 거래 규모의 8.3%에 달한다. 통상 국산 신약 후보물질 기술수출 계약의 선급금 비중이 5%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선급금은 개발이 실패해도 돌려줄 의무가 없는 돈이어서, 물질 가치가 높고 경쟁이 치열할수록 비중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계약 소식에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한미약품 주가는 가격제한폭(29.96%)까지 오른 54만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주가도 25.7% 급등한 5만6500원을 기록했다.
근육을 지키는 비만약이라는 차별점
지금의 비만약 시장은 노보노디스크 ‘위고비’와 일라이릴리 ‘마운자로’가 열었다. 두 약 모두 음식을 먹을 때 소장에서 나오는 인크레틴 호르몬을 모방한 방식이다. 체중을 빠르게 줄여주지만, 이 과정에서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근육까지 함께 빠지는 게 한계로 꼽힌다. 기초대사량이 떨어지면서 약을 끊었을 때 체중이 다시 늘어나는 ‘요요 현상’도 풀어야 할 숙제다.
HM17321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 인크레틴 대신 근육 생성을 자극하는 호르몬인 UCN2를 흉내 낸 물질이다. 원래 이 호르몬은 심장병 치료제 개발에 주로 쓰이던 소재였는데, 한미약품이 ‘비만’이라는 새로운 적응증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방을 줄이는 기능과 근육을 재생하는 기능을 함께 강화해, 체중 감량과 근육 보존을 동시에 노리는 계열 내 최초 신약(퍼스트 인 클래스) 개발에 성공했다.
로슈 측 기업사업개발 총괄은 지방량을 선택적으로 줄이면서 근육량과 근기능은 개선하는 차별화된 치료 전략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로슈가 그리는 큰 그림
업계에서는 로슈가 이미 확보해둔 다른 비만 신약 후보물질과 HM17321을 결합해 시너지를 내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로슈는 2023년 카못테라퓨틱스를 인수하며 인크레틴 계열 비만 신약 ‘에니세파타이드’를 손에 넣었고, 인크레틴 계열보다 감량 효과가 크다고 알려진 ‘아밀린 유사체’ 계열의 ‘페트렐린타이드’도 질랜드파마로부터 도입한 바 있다. 이들 후보물질은 모두 HM17321과 같은 소재인 펩타이드 기반이다.
HM17321은 사실 한미약품이 개발명과 작용 기전을 공개하기 전인 2023년부터 글로벌 투자 시장에서 문의가 이어져 온 물질이다. 이번 인수 경쟁에는 비만약을 보유한 여러 글로벌 제약사가 뛰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HM17321을 가장 잘 키워줄 수 있고 미래 성장성이 가장 높은 기업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주목받는 ‘오너 리더십’
이번 계약은 한미약품의 오너 리더십을 재평가하는 계기도 되고 있다.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업계에서는 한미약품의 신약 개발 동력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R&D를 이끌던 핵심 인력이 잇달아 회사를 떠났고, 오랜 경영권 분쟁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HM17321은 창업주의 장녀인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이 설계하고 추진해온 비만·대사질환 신약 프로젝트(H.O.P)의 핵심 물질이다. 오는 10월 출시를 앞둔 첫 국산 GLP-1 계열 신약 ‘에페’, 3중 작용 비만약 ‘HM15275’ 역시 같은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회사 측은 새로운 시도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신약 개발 특성상 단기 성과에 쫓기는 전문 경영인 체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임 부회장이 이번 계약 과정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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