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패권 시대의 반도체 생태계 재편: 유리기판 패키징 혁신과 K-팹리스 도약을 위한 중장기 국가 전략

2026년 8월 현재,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과거 50년간 시장을 지배해 온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물리적 한계에 봉착함에 따라, 미세공정(Front-end) 중심의 초격차 경쟁에서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 중심의 후공정(Back-end) 및 응용처 특화형 시스템반도체 설계(Fabless)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최근 서울경제신문을 비롯한 주요 언론들이 심층 보도한 바와 같이,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누가 더 작게 깎느냐'를 넘어 '누가 더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설계하느냐'로 이동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13년 애플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위탁 생산을 삼성전자에서 대만 TSMC로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던 'CoWoS(Chip on Wafer on Substrate)' 패키징 기술은, 이제 차세대 소재인 '유리기판(Glass Substrate)'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생태계 재편의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공지능(AI) 연산 처리량과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감당하기 위해 기존 플라스틱 기반 유기 기판이 한계를 드러내자, 유리기판은 발열 제어와 대면적 설계의 유일한 대안이자 '게임체인저'로 급부상했다.

동시에 설계 영역에서는 엔비디아(Nvidia)의 GPU 생태계 독점에 대항하여 국가 및 기업 차원에서 독자적인 AI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소버린 AI(Sovereign AI)' 트렌드가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글로벌 시장 점유율 2%의 늪에 빠져 있던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산업, 특히 리벨리온(Rebellions)과 퓨리오사AI(FuriosaAI) 등 신경망처리장치(NPU) 중심의 K-팹리스 스타트업들에게 전례 없는 글로벌 진출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 변곡점은 필연적으로 치열한 국가 간 보조금 전쟁과 규제 혁신 경쟁을 동반한다. 미국은 '반도체 과학법(CHIPS Act)'에 기반한 국가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NAPMP)을 통해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있으며,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이비덴(Ibiden), 이노룩스(Innolux) 등 일본·대만 연합 전선을 구축하며 패널 레벨 패키징(PLP) 생태계를 선점하려 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한국 정부 역시 2026년 8월 11일 자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발효하고, 33조 원 규모로 확대된 반도체 지원 패키지와 10년간 1조 원이 투입되는 '함께성장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등 국가 총력전에 돌입했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기술적, 정책적 동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대한민국 반도체 생태계의 취약점을 진단하고, 차세대 패키징 패권 장악과 팹리스 산업 육성을 위한 2차, 3차원적 정책 과제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차세대 패키징의 게임체인저: 유리기판(Glass Substrate) 기술 심층 분석

[ 기존 플라스틱 유기 기판의 물리적·전기적 한계 노출]

  • 생성형 AI의 고도화는 칩 내부의 트랜지스터 수와 메모리 용량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초래했다. 2020년에 출시된 엔비디아의 A100(80GB) GPU가 약 542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탑재했던 반면, 2026년 전후로 전개되는 차세대 루빈(Rubin) 아키텍처는 무려 3,360억 개의 트랜지스터와 288GB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단일 패키지 내에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고성능 로직 다이(Logic Die)와 HBM 스택이 하나의 기판 위에 과도하게 집적됨에 따라, 칩의 절대적인 무게와 연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발열은 기판의 변형을 유발한다.

  • 현재 시장의 주력인 플라스틱 기반의 유기 기판(FC-BGA 등)은 이러한 극한의 환경에서 열수축과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기판 전체가 휘어지는 이른바 '워피지(Warpage)' 현상을 피할 수 없다. 휘어짐 현상은 칩과 기판 사이의 미세한 접점에 균열을 일으켜 수율을 급격히 저하시킨다. 더욱이, 늘어난 데이터 통신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칩 간 통신 배선을 정밀하고 촘촘하게 배열해야 하지만, 유기 기판의 거친 표면 특성상 일정 수준 이하의 초미세 선폭(Line/Space)을 구현하는 데에는 소재 공학적인 병목 현상이 존재한다.

[ 유리기판의 소재 공학적 우위와 광통신(CPO) 융합 가능성]

  • 유리기판은 기존 유기 소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유리는 근본적으로 플라스틱 대비 표면이 매우 평탄(Flat)하고 강성이 뛰어나며, 열팽창계수(CTE)가 실리콘(반도체 다이)과 유사하여 발열 시에도 기판이 휘어지거나 팽창하는 정도가 현저히 낮다.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유리기판은 기존 유기 기판 대비 패키징 휨 현상을 약 16% 개선하고, 유효 열팽창계수를 19% 감소시키며, 기계적 강도를 나타내는 유효 탄성 계수는 31% 증가시키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 전기적 성능 측면에서도 유리는 우수한 절연 특성을 지니고 있어 신호 손실과 전력 누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전력 무결성(Power Integrity) 측면에서 저항은 27%, 인덕턴스는 42% 감소하여 AI 연산의 전력 효율을 극대화한다. 이는 동일한 면적 내에 기존 대비 2~3배 더 많은 칩(인터커넥트 밀도 향상)을 집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더 나아가, 유리기판은 칩 간 데이터 병목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광자(Photon)를 이용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실리콘 포토닉스(Silicon Photonics) 기술 기반의 '광통신 패키징(CPO: Co-Packaged Optics)'을 구현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기판 자체가 빛을 투과시킬 수 있는 유리이므로, 기판 내부에 직접 광신호 경로(도파로)를 형성하여 데이터 이동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적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핵심 평가 지표

플라스틱 유기 기판 (Organic Substrate)

유리기판 (Glass Core Substrate)

성능 향상 및 시사점

물리적 안정성 (Warpage)

열/무게에 취약, 대면적화 시 심각한 휨 발생

열팽창계수(CTE) 실리콘과 유사, 강성 우수

패키징 휨 현상 16% 개선, 대면적 칩렛 설계 용이

미세회로 밀도 (Density)

거친 표면으로 초미세 배선 한계 도달

유리 특유의 평탄도로 초정밀 배선 구현 가능

인터커넥트 밀도 2~3배 향상, 공간 효율 극대화

전기적 효율성 (Power)

고주파수 대역에서 신호 손실 및 누설 전류

절연성 극대화, 저항(-27%) 및 인덕턴스(-42%) 감소

전력 손실 대폭 절감, 고성능 AI 칩 구동 최적화

차세대 광통신 (CPO)

전기적 신호 전송에 국한, CPO 통합 난해

투명성 기반 기판 내 광도파로 직접 형성 가능

광반도체 결합을 통한 초고속 데이터 통신 실현

유리기판 상용화를 둘러싼 글로벌 합종연횡과 패권 전쟁


[ TSMC의 충격적인 반격: 이비덴-이노룩스 연합과 패널 레벨 패키징(PLP)]

  • 그동안 실리콘 인터포저 기반의 CoWoS 공정에 집중하며 유리기판 상용화에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던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는 2026년 6월, 일본과 대만 중심의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하며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TSMC는 일본의 핵심 기판 공급업체인 이비덴(Ibiden) 및 대만의 대형 패널 제조업체 이노룩스(Innolux)와 협력하여, 차세대 패키징 기술인 'CoPoS(Chip-on-Panel-on-Substrate)'에 유리기판을 적용하는 공동 검증 데이터를 최초로 공개했다.

  • TSMC의 접근 방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전통적인 원형 웨이퍼 레벨(Wafer-Level) 공정에서 벗어나, 더 넓은 면적의 직사각형 패널 레벨 공정(Panel-Level Packaging)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했다는 점이다. 공개된 테스트 샘플은 85x110mm 크기의 0.8mm 두께 유리 코어 기판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대규모 AI GPU 패키징 등급에 해당한다. 원형 웨이퍼 대신 직사각형 패널을 사용할 경우 버려지는 테두리 면적이 줄어들어 재료 활용률을 기존 70% 미만에서 90% 이상으로 대폭 끌어올릴 수 있다. TSMC는 2028년까지 기존 레티클 크기의 14배에 달하는 대형 패키징 사양을 상용화하여 10개의 컴퓨팅 다이와 20개의 HBM 스택을 통합한다는 원대한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는 유리기판이라는 신소재의 표준 규격과 공정 주도권을 대만-일본 공급망 안에서 선점하려는 매우 전략적인 행보로 분석된다.

[ 한국 진영의 선제적 대응: SKC(앱솔릭스)와 삼성전기의 맹추격]

  • TSMC 연합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상용화 시점 면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SKC의 반도체 기판 자회사인 앱솔릭스(Absolics)는 세계 최초로 미국 조지아주 코빙턴에 12만 제곱피트 규모의 유리기판 전용 공장을 짓고 양산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특히 미국 상무부로부터 반도체법(CHIPS Act)에 근거하여 7,500만 달러의 보조금을 수령하며 미국 중심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인정받았고, AMD 등 글로벌 대형 팹리스들과 시제품 테스트를 진행하며 2026년~2027년 양산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삼성전기 역시 세종 사업장에 파일럿 라인을 선제적으로 구축하고, 엔비디아, 브로드컴,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시제품 성능 검증을 진행하며 추격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삼성전기의 강점은 단순한 기판 제조를 넘어, 그룹 내 삼성전자(파운드리/메모리)와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칩 구동에 필요한 최적의 연산 환경을 턴키(Turn-key) 솔루션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일본 스미토모 화학 등과의 합작을 통해 핵심 소재인 '글라스 코어'의 내재화를 추진하며 원가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LG이노텍 또한 구미 사업장에 파일럿 라인을 마련하고 2027~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 인텔의 외주화 전환 검토와 국내 소부장 생태계의 기회]

  • 반면, 10년 이상 유리기판 연구개발에 1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며 시장 선점을 노렸던 인텔(Intel)은 최근 사업 전략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사내 핵심 기술(EMIB 결합 등)로 내재화하려던 유리기판 개발을 중단하고 외부 전문업체로의 아웃소싱(외주화)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텔이 파운드리와 중앙처리장치(CPU) 본연의 경쟁력 회복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되지만, 이는 역으로 유리기판 양산 인프라를 이미 갖춘 SKC나 삼성전기 등 한국 기업들에게 대형 수주의 기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 또한, 기판 생태계의 기반이 되는 국내 소부장 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제이앤티씨(JNTC)와 켐트로닉스는 유리에 미세한 구멍을 뚫고 금속을 채워 전기를 연결하는 가장 고난도 공정인 TGV(Through Glass Via) 가공 기술을 선제적으로 개발하여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필옵틱스는 TGV 장비 및 유리기판 절단(Singulation), 검사 장비 라인업을 상용화하며 국산화 생태계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주가는 유리기판 시장 개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강력한 상승 모멘텀을 형성하고 있다.

'소버린 AI' 시대와 K-팹리스(반도체 설계) 생태계의 질적 도약

[ 시스템반도체 불모지의 구조적 한계와 골든타임]

  •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고질적인 약점은 이익 창출이 용이한 범용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포트폴리오에 과도하게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과거 파운드리 부문을 소외시켰던 전략적 오판은 TSMC와의 격차를 벌리는 원인이 되었으며, 다양한 혁신이 필수적인 팹리스 부문 역시 생태계 조성이 극도로 미흡했다. 현재 글로벌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약 2% 남짓에 불과하며, 매출 1,000억 원 이상의 팹리스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산업의 허리가 취약하다.

  • 그러나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 시장 구조가 급변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전력을 소모하는 범용 GPU가 아닌, 특정 산업 및 기기의 추론(Inference) 연산에 특화된 저전력·고효율의 신경망처리장치(NPU) 및 맞춤형 칩(ASIC)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지금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초기 시장에 진입한다면, 글로벌 팹리스 지형도를 뒤흔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 'K-엔비디아'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의 글로벌 영토 확장]

  •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 심화와 데이터 보안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자국의 데이터와 인프라로 독립적인 AI 모델을 구축하려는 '소버린 AI' 흐름이 유럽, 중동 지역을 강타하고 있다4. 이들은 엔비디아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체 칩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이는 K-팹리스에게 결정적인 도약대가 되고 있다.

  • 2026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글로벌 AI 콘퍼런스 '레이즈 서밋(RAISE Summit) 2026'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NPU 스타트업 리벨리온(Rebellions)과 퓨리오사AI(FuriosaAI)가 연사로 초청되어 소버린 AI 인프라 전략을 발표하며 유럽 공략의 포문을 열었다.

  • 리벨리온 (Rebellions): 데이터센터용 1세대 NPU '아톰(ATOM)'을 통해 글로벌 추론 시장에 안착한 리벨리온은, 2024년 말 SK텔레콤의 AI 반도체 자회사인 사피온(SAPEON)과의 합병을 통해 통신 및 데이터센터 고객망을 흡수하며 단숨에 거대 팹리스로 도약했다. 2026년 3월에는 정부의 'K-엔비디아 육성 프로젝트' 일환으로 국민성장펀드를 포함한 6,400억 원 규모의 프리IPO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3.4조 원을 인정받았다. 리벨리온의 최신 아키텍처 'REBEL100'은 4개의 연산 칩렛을 'UCIe-Advanced' 패키징 방식으로 연결하여 초대형 가속기 성능을 구현하는 전략으로 정면승부를 펼치고 있으며, 사우디아람코 등 중동 자본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최근에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와 직접 회동하며 협력 및 인수 가능성까지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 퓨리오사AI (FuriosaAI): 외부 대규모 자본이나 기업 간 합병보다는 창업자 중심의 독자 생존과 기술력 검증에 사활을 걸고 있다. 과거 메타(Meta)로부터 8억 달러 규모의 인수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독자 노선을 택했다. 2026년 레이즈 서밋에서 2세대 AI 추론 가속기 'RNGD(레니게이드)'와 최적화된 소프트웨어 스택을 공개하며, 저전력으로 대형언어모델(LLM) 및 에이전틱 AI 서비스를 구현하는 실사용 중심의 영업을 전개하고 있다.

[ 팹리스 육성을 위한 정책 제언: 조달 정책과 집중 투자]

  • K-팹리스 스타트업들이 기술적 성취를 상업적 성공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마중물이 필수적이다. 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은 인터뷰를 통해 "어떤 훌륭한 반도체라도 글로벌 시장에서 팔리기 위해서는 제품이 실제로 사용된 이력(Track Record)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과거의 단순한 연구개발(R&D) 지원이나 세제 혜택을 넘어, 미국이나 중국처럼 정부 공공 부문이 초기 생산 물량을 대규모로 구매해주는 강력한 '조달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 데이터센터 구축 시 국산 NPU 탑재를 일정 비율 의무화하거나, 국방·모빌리티 산업에 자국 설계 반도체를 우선 채택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 또한, 자원 배분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10억 원씩 100곳에 쪼개주는" 파편화된 지원 방식으로는 칩 설계부터 테이프아웃(Tape-out)까지 수백억 원이 소요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 차라리 성공 가능성이 높은 소수의 유망 기업에 건당 수천억 원을 집중 투자하는 '메가스케일업 펀드' 운용과 직접 보조금 병행 지급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업계와 정책 입안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글로벌 첨단 패키징 정책 지형과 'CHIPS Act'의 파급력

  • 한국의 유리기판 및 팹리스 정책을 논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주요국, 특히 미국의 거대한 자본 투입 현황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 각국은 첨단 패키징을 반도체 공급망 안보의 핵심 뇌관으로 인식하고 있다.

  • 미국은 2022년 발효된 '반도체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따라 총 527억 달러의 예산을 편성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을 첨단 패키징 생태계 복원에 할당하고 있다. 핵심은 상무부 주도로 운영되는 '국가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NAPMP: National Advanced Packaging Manufacturing Program)'이다. 미국 상무부는 2025년 1월 NAPMP의 일환으로 첨단 패키징 역량 강화를 위해 약 14억 달러 규모의 자금 지원을 확정했으며, 2024년 2월에는 첨단 패키징 소재 및 기판(Substrates) 기술 개발에 특화하여 3억 달러 규모의 R&D 펀딩(NOFO)을 발표한 바 있8.

  • NAPMP와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가 연합하여 그리는 인프라 로드맵은 매우 공격적이다. 미국은 2025년 NSTC 행정/설계 시설 가동을 시작으로, 2026년까지 EUV(극자외선) 노광 공정을 연구할 수 있는 센터를 설립하고, 2028년까지 300mm 웨이퍼 기반의 연구, 프로토타이핑 및 첨단 패키징 파일럿 라인이 통합된 단일 시설(NSTC Prototyping and NAPMP Advanced Packaging Piloting Facility)을 완성한다는 구체적인 타임라인을 제시했다. 이는 인텔, 글로벌파운드리뿐만 아니라 미국에 투자하는 SK하이닉스, 앱솔릭스 등 한국 기업들의 재무적 리스크를 경감시키고 미국 내에 강력한 후공정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국가 주도의 블랙홀 전략이다.

  • 이러한 막대한 재정 투입은 민간 투자를 강력하게 유인(Crowding in)하고 있다. SIA(미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CHIPS Act 발효 이후 기업들은 향후 10년간 미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을 3배 이상 키울 5,400억 달러 이상의 민간 투자를 발표했다. 이처럼 미국과 EU(Chips Act), 일본 등이 천문학적인 보조금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대응 전략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2026년 한국 정부의 정책 기조: 반도체특별법과 상생 생태계 조성


[ '반도체특별법 시행령' 발효(2026. 8.)의 입법적 의의와 성과]

  • 글로벌 보조금 전쟁에 대응하여, 한국 국회와 정부는 2026년 초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마침내 2026년 8월 11일을 기해 그 세부 지침을 담은 '시행령'을 정식 발효하였다. 이는 과거 개별 사업과 예산 단위로 쪼개져 임기응변식으로 집행되던 반도체 지원 정책을 법률에 근거한 범국가적 상시 지원 체계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 시행령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는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켜 정책 집행의 최상위 거버넌스를 구축했다. 둘째, 가장 큰 진통을 겪었던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 요건'을 유연하게 조정했다. 당초 입법 예고안에서는 국토 균형 발전을 이유로 클러스터 대상을 '수도권 외 지역'으로 한정하려 했으나, 팹리스가 밀집한 판교와 거대 파운드리·메모리 라인이 구축되는 용인, 평택, 화성 등을 배제하는 것은 산업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경기도 및 산업계의 반발을 수용하였다. 최종 시행령에서는 수도권 배제 조건을 삭제하고 "비수도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문구로 완화함으로써, 경기도 남부의 메가 클러스터 역시 국가 지원의 제도권 내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 셋째, 파격적인 인프라 재정 지원 근거를 마련했다.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도로, 전력, 용수 등 필수 기반 시설 구축 비용을 총사업비의 50%에서 최대 100%까지 국가와 지자체가 분담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용인 메가 클러스터의 성공 여부는 하루 31만 톤의 용수와 대규모 송전선로를 얼마나 적기에 확보하느냐에 달려있으므로, 이러한 인프라 전액 지원 가능성은 기업의 막대한 초기 자본 부담(CapEx)을 덜어주는 실질적인 보조금 효과를 낸다.

주요 정책 쟁점

기존 입법 예고안 (한계점)

2026년 8월 최종 시행령 내용

기대 효과 및 시사점

클러스터 지정 범위

수도권 외의 지역으로 한정

수도권 배제 조항 삭제, 비수도권 우선 고려

판교/용인/평택 등 수도권 메가 클러스터 국비 지원 가능성 확보

인프라 비용 지원

지자체 및 기업 분담률 높음

국가 및 지자체가 50% ~ 100% 비용 부담 명시

기업의 인프라 투자 불확실성 해소 및 공기 단축

재원 운용 투명성

산발적 각 부처 예산 집행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회계' 신설

중장기적 관점의 팹리스 및 소부장 예산 안정적 확보

근로 시간 유연화

-

반영 실패 (특별법 제정 시 누락)

R&D 인력 주 52시간 제한 유지로 글로벌 속도전 대응력 저하

  • 다만, 업계가 법 제정 초기부터 강력히 요구해 온 핵심 규제 완화 조치인 '반도체 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로시간 예외 적용' 조항은 노동계의 반발 등으로 인해 국회 논의 과정에서 누락되었고, 이번 시행령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24시간 연속된 테스트와 설계 수립이 생명인 팹리스 및 첨단 패키징 R&D 현장에서 노동 유연성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더라도 미국과 대만의 혁신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되었다.

[ 33조 원 규모의 자금 수혈과 '함께성장 프로젝트' 착수]

  • 정부의 재정 투입 규모 역시 대폭 상향되었다. 2024년 중반 발표되었던 26조 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종합지원 방안'은 글로벌 경쟁의 격화와 미국의 대중국 관세 부과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25~2026년을 거치며 총 33조 원 규모로 파격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자금의 핵심은 산업은행 출자를 통한 17조 원 이상의 저리 우대 대출 신설이며, 펀드 투자의 70% 이상을 중소·중견기업에 집중 배정하여 자금력이 취약한 팹리스와 소부장 기업들의 돈 가뭄을 해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 더욱 구체적인 생태계 상생을 위해 2026년 8월 10일, 정부는 대통령 주재 회의를 통해 향후 10년간 총 1조 원 규모의 '산업생태계 함께성장 프로젝트'를 공식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앵커기업)과 중소 협력사가 반도체 기술의 '초기 개발' 단계부터 '양산 및 실증' 단계까지 전 과정을 공동으로 수행하도록 묶어주는 것이다.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민·관이 공동으로 2030년까지 총 10조 원 규모의 '산업성장펀드'를 단계적으로 조성하며, 그 첫 단추로 5조 원 규모의 반도체 신규 펀드를 출범시킨다. 앵커기업이 핵심 출자자(LP)로 참여하여 유망 소부장과 팹리스에 투자하고, 이들의 제품을 실증(Test-bed)한 뒤 최종 구매 확약까지 연계하는 프레임워크가 가동된다. 소부장 업체들의 가장 큰 장벽이었던 '고객사 양산 라인에서의 성능 검증 데이터 부재'를 대기업과의 공동 투자를 통해 허물어버리겠다는 실질적인 해법이다.

[ 첨단 패키징 실증 센터 인프라 구축]

  • 국가 연구 인프라 확충 역시 본궤도에 올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광주광역시 등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전남대학교 첨단캠퍼스 등에 총 420억 원(향후 신규 예타 기획을 통해 5,000억 원 규모로 확대 추진)을 투입하여 'AI 반도체 첨단 패키징 실증센터'를 건립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미국 NAPMP의 '첨단 패키징 파일럿 라인' 구축 전략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산·학·연이 공동으로 유리기판 가공 기술, TGV 장비, 이종 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 구조 등을 실제 공정에 적용해 성능 변화를 검증할 수 있는 공용 인프라를 제공한다.

K-반도체 초격차 장악을 위한 4대 핵심 정책 과제(업계 관점)

  • 이상의 기술 패러다임 변화와 최근 정책 성과들을 종합할 때, 한국 반도체 산업이 TSMC-엔비디아 연합의 헤게모니를 타파하고 시스템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2차, 3차원적 정책 과제를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이상 4가지 과제는 업계 관점으로 정부의 공식 정책방향은 아님).

[ (1) 디스플레이-반도체 이종 융합을 통한 유리기판(PLP) 주도권 확보]

  • TSMC가 이비덴-이노룩스 연합을 통해 웨이퍼 레벨을 넘어선 패널 레벨 패키징(PLP)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은 한국 기업들에게 강력한 경고이자 기회다. 대만이 디스플레이 패널 기술을 차용하여 반도체 패키징 원가를 절감하려 한다면, 한국은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 세계 압도적 1위의 대형 패널 양산 기술과 그에 특화된 장비 생태계(필옵틱스, 켐트로닉스 등)를 유리기판 반도체 공정에 적극적으로 융합해야 한다. 산업부는 단순히 반도체 부서에 국한하지 말고 '디스플레이-반도체 융합 패키징 특별 테스크포스'를 구성하여, 대형 유리기판의 이송, 식각, 검사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유리기판 컨소시엄(K-Glass Consortium)'을 주도적으로 결성해야 한다. 420억 원 규모로 시작한 패키징 실증센터를 조속히 5,000억 원 규모의 대형 테스트베드로 스케일업하여 국내 소부장 기업들이 TSMC 공급망에 의존하지 않고도 실증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 (2) '소버린 AI' 선도를 위한 K-팹리스 공공 조달 의무화 및 트랙 레코드 보장]

  • 팹리스 산업 육성은 '자금 지원' 단계에서 '수요 창출'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칩을 설계하더라도, 구동 이력(Track Record)이 없으면 글로벌 시장 진출은 불가능하다. 정부는 국가 보안과 밀접한 공공 데이터센터, 국방 무기 체계, 지자체의 스마트 모빌리티 인프라 구축 사업에 '국산 NPU 탑재 의무 비율'을 법제화해야 한다. 더불어, 산업부가 추진하는 '제조업 AI 전환(M.AX)' 정책 등과 연계하여 민간 대기업(자동차, 가전, 통신 등)이 자사 제품에 국산 맞춤형 반도체(ASIC)를 도입할 경우 파격적인 법인세 감면 혜택을 제공하는 세제 인센티브를 신설해야 한다. 이는 국내 팹리스가 글로벌 진출 이전에 단단한 내수 기반의 캐시카우와 실증 데이터를 확보하게 하는 핵심 고리가 될 것이다.

[ 글로벌 플레이어 육성을 위한 메가 스케일업 펀드와 전략적 M&A 지원]

  • 파편화된 소규모 예산 배분 관행을 철폐하고 엄격한 '선택과 집중'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 33조 원의 종합 지원 방안과 새롭게 조성되는 5조 원 규모의 반도체 펀드는 유망한 팹리스나 소부장 기업 1~2곳이 글로벌 유니콘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건당 수천억 원을 밀어주는 '메가스케일업 펀드' 형태로 운용되어야 한다. 특히,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합병으로 탄생한 3.4조 원 가치의 통합 법인 사례처럼, 파편화된 중소 팹리스들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결합하거나 해외 원천 기술 기업을 인수할 때 정부가 파격적인 인수금융(M&A Fund)을 제공하는 생태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엔비디아가 '그록(Groq)' 등의 인수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듯, K-팹리스 역시 풀스택(Full-stack) 소프트웨어 역량 확보를 위한 M&A가 필수적이다.

[ (4) 반도체특별법의 입법적 보완: 노동 유연성 확보 및 특별회계 재원 보호]

  •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이 발효되었으나, 법안 처리 과정에서 누락된 '연구개발(R&D) 인력 주 52시간 근로시간 특례' 조항은 차기 국회에서 반드시 보완 입법으로 통과되어야 한다. 국가 대항전 성격을 띠는 첨단 패키징 R&D 현장에서 노사 합의 하에 탄력적인 집중 근로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막대한 자금력과 대만의 속도전을 절대 극복할 수 없다. 또한, 새로 신설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회계'가 거시 경제의 세수 부족 상황에서도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거대 제조 기업의 인프라 지원에 예산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전체 기금의 일정 비율(예: 30% 이상)을 중소 소부장 및 팹리스 기업의 R&D와 실증 지원에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쿼터제'를 내부 지침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시사점>

반도체 패권 경쟁의 전장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동안 누가 더 작은 선폭의 반도체를 만드느냐의 승부였다면 이제는 수많은 칩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연결하느냐, 그리고 AI 연산에 특화된 칩을 누가 설계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첨단 패키징과 팹리스가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전선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리기판 경쟁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AI용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기존 유기 기판은 열과 무게에 따른 휨, 미세 배선의 한계라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유리기판은 높은 평탄도와 강성을 바탕으로 대면적·고집적 패키징에 유리할 뿐 아니라, 향후 광통신을 패키지 안에 결합하는 기술로까지 발전하면 단순한 소재 교체를 넘어 반도체 패키징의 판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습니다.

벌써 세계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만 TSMC는 일본 기판업체와 대만 패널업체 등을 잇는 연합을 통해 유리기판과 패널레벨 패키징의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미국도 막대한 보조금을 앞세워 첨단 패키징 생태계 재건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소재·장비 경쟁력을 바탕으로 공급망의 한 축을 차지하려 합니다. 유리기판을 둘러싼 경쟁은 특정 기업 간 기술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 산업전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기회이자 위기인 상황입니다. SKC의 앱솔릭스, 삼성전기, LG이노텍 등은 일찌감치 유리기판에 투자하며 양산 기술 확보에 나섰습니다. 여기에 TGV(유리 관통 전극), 식각·절단·검사 등 관련 장비와 소재를 개발하는 국내 소부장 기업도 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세계적인 디스플레이 산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형 유리 패널을 다루는 공정기술과 장비 생태계는 다른 나라가 단기간에 따라오기 어려운 자산입니다.

그런데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은 경쟁 상대가 개별 기업이 아니라 ‘연합군’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대만의 반도체·패널 기술과 일본의 소재·기판 기술이 결합하면 한국의 강점을 단숨에 추월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패키징이 웨이퍼 단위에서 패널 단위로 확대되면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축적한 한국의 기술이 반도체 경쟁력으로 전환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그 기회를 대만-일본 연합군이 먼저 가져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 정책은 이 같은 산업 지형 변화에 맞춰야 합니다. 반도체 지원금을 늘리는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며,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를 따로 지원하는 칸막이부터 걷어내야 합니다. 대형 유리 패널 제조, 미세회로 형성, TGV, 검사·절단, 패키징을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묶어야 합니다. 국내에서 실제 제품을 만들고 성능과 수율을 검증할 수 있는 대형 실증라인도 서둘러 구축해야 합니다. 기술개발비 몇 푼을 나눠주는 방식으로는 글로벌 표준을 선점할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팹리스입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세계 정상권이지만 시스템반도체와 팹리스 경쟁력은 여전히 취약합니다. AI 시대에는 범용 GPU뿐 아니라 특정 용도에 최적화된 NPU·ASIC 수요가 커지고, ‘소버린 AI’ 확산으로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리벨리온·퓨리오사AI 같은 국내 팹리스에는 분명 기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칩을 만드는 것과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칩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설계부터 파운드리, 패키징, 소프트웨어, 고객 확보까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부 지원도 연구개발비를 여러 기업에 나눠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대규모 자금을 집중하고, 공공 데이터센터·국방 등에서 국산 AI 반도체가 실제 사용될 수 있도록 초기 시장과 ‘트랙 레코드’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기업 간 인수합병(M&A)에도 과감한 금융 지원을 해야 합니다.

유리기판과 팹리스 경쟁의 공통분모는 속도와 규모입니다. 미국과 대만, 일본이 국가 차원의 지원과 기업 간 연합으로 치고 나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를 연계해 유리기판의 소재·장비·공정·실증 생태계를 구축하고, 팹리스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

반도체특별법 역시 현장의 R&D 특성을 반영하는 유연한 제도와 안정적인 장기 재원을 갖춰야 합니다. 무엇보다 대기업 생산시설에 지원이 쏠리지 않도록 팹리스와 소부장 기업의 연구개발·실증에 충분한 재원을 배분해야 합니다.

총성은 이미 울렸습니다. 유리기판에서 세계 표준을 선점하고, 팹리스에서 글로벌 플레이어를 키우는 것은 단순한 산업정책이 아니라 한국 반도체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국가전략입니다. 메모리에 안주하지 않고 패키징과 설계까지 장악할 때 비로소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