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졌던 숫자가 돌아왔다
2014년, 국내 조선 빅3(HD한국조선해양·한화오션·삼성중공업)의 수주잔액은 약 210조원이었다. 그리고 그해를 정점으로 내리막이 시작됐다. 2008년 금융위기의 여진, 줄줄이 취소된 심해 유전 개발 프로젝트… 2017년에는 수주잔액이 반 토막 났고, 2020년까지도 200조원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그로부터 12년, 조선 빅3의 수주잔액이 다시 200조원 선을 넘었다. 올해 2분기 기준 약 224조원. 단순히 옛 기록을 회복한 숫자가 아니다. 이번엔 사업의 ‘체질’이 다르다.
컨테이너선 호황과는 다른 이유
과거의 조선 호황이 컨테이너선 발주 러시에 기댄 것이었다면, 지금의 슈퍼사이클은 다르다. LNG 운반선을 축으로 부유식 LNG 생산설비(FLNG), 초대형 가스운반선(VLGC), 원유 생산·저장·하역 설비(FPSO) 같은 고부가가치 선종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미국 군함 유지·보수·정비(MRO), 함정 수출, 부유식 데이터센터(FDC)까지 완전히 새로운 사업 축이 더해졌다.
숫자로도 확인된다. 조선 빅3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약 9조7000억원으로, 석 달 전보다 6.4% 상향 조정됐다. 사상 첫 연간 영업이익 10조원 돌파 가능성이 거론되는 이유다. 2분기 영업이익률은 세 회사 모두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단순히 배를 많이 수주해서가 아니라, 선가 상승과 고부가가치 선종 중심의 수익 다변화가 만든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배 만드는 회사에서 종합 해양 제조기업으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신사업이다.
부유식 데이터센터(FDC) — AI 붐으로 데이터센터의 전력·냉각 수요가 폭증하면서, 바다 위에 데이터센터를 짓는 방식이 차세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선박에 주로 쓰이던 중속 엔진도 데이터센터 비상 전원으로 쓰임새를 넓히는 중이다.
군함 시장 — 그동안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머물렀던 군함 수주는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를 계기로 미국 시장까지 넓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해양플랜트 — FPSO·FLNG 프로젝트는 계약 규모가 3조~4조원에 달하는 초고부가가치 사업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에너지 안보의 무게가 커지면서, 글로벌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다시 심해 개발에 나서는 흐름도 우호적이다.
안심할 수만은 없는 이유
낙관적인 지표 뒤에는 두 가지 그림자가 있다.
첫째, 중국의 추격이다. 중국은 이미 LNG 운반선 수주에서 한국을 앞서기 시작했고, 친환경 선박 엔진 기술 격차도 빠르게 *히고 있다.
둘째, 물리적 한계다. 국내 조선소는 이미 3~4년 치 일감을 확보한 상태라, 정작 새로 수주를 받고 싶어도 배를 지을 독(dock)이 부족하다. 그래서 업계의 시선은 ‘얼마나 더 수주할 것인가’보다 ‘확보한 슬롯에서 얼마나 더 벌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단위 슬롯당 최고 매출과 수익성을 뽑아낼 수 있는 고부가가치선 중심의 영업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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