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기관차가 줄어들면 정유사는 망할까. 적어도 에쓰오일의 답은 “아니오”다. 이 회사가 올해 말 세상에 내놓을 물건은 휘발유도, 경유도 아니다. 전기차 배터리를 액체 속에 담가 식히는 냉각유, 이름하여 ‘e 쿨링 솔루션’이다.
배 실어 나르는 로봇 차량이 첫 시험대
무대는 전남 광양항이다. 여수광양항만공사가 발주하고 현대로템이 만드는 항만용 무인이송차량, AGV(Automated Guided Vehicle)에 이 냉각유가 처음 들어간다. 현대로템은 2029년까지 이런 AGV 44대를 광양항에 납품할 계획이고, 에쓰오일은 다음 달 배터리팩 최종 성능 평가를 거쳐 이르면 12월부터 냉각유를 납품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AGV 한 대에 들어가는 배터리 용량은 300㎾h. 웬만한 승용 전기차 배터리(약 65㎾h)의 다섯 배에 달하는 힘이다. 항만에서 쉼 없이 물자를 실어 날라야 하니, 냉각 성능과 화재 안전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차량이다.

액침냉각이 뭐길래

액침냉각은 말 그대로 배터리셀을 액체에 담가서 열을 식히는 기술이다. 팬으로 바람을 불어 식히는 기존 공랭식보다 냉각 효율이 훨씬 뛰어나고, 화재 위험도 줄일 수 있다. 그동안 에너지저장장치(ESS)나 데이터센터처럼 한자리에 고정된 설비에서만 쓰였던 이유는 간단하다. 냉각유의 무게 때문에 차량에 실으면 그만큼 전비(연료 효율)가 떨어진다. 게다가 액체 속에서 배터리 소재가 변형되거나 예상치 못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안전성부터 확인해야 하는 숙제도 있었다.
에쓰오일이 승용차 대신 산업용 특수차량인 AGV를 첫 타깃으로 고른 것도 이 때문이다. 무게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은 곳에서 먼저 검증하고, 이후 단계적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겠다는 계산이다.

다음 목표는 버스, 그다음은 승용 전기차

에쓰오일의 그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범한자동차의 전기버스에 액침냉각 기술을 적용하는 성능 테스트도 진행 중이다. CTNS, 범한유니솔루션 등 국내 배터리업체들이 컨소시엄을 꾸려 에쓰오일의 냉각유를 공급받아 배터리팩을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형 특수차량과 버스에서 기술을 다지고 나면, 궁극적으로는 현대차그룹의 승용 전기차까지 공급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왜 정유사들이 너도나도 뛰어들까

답은 위기의식에 있다. 내연기관차가 줄어들면 정유사의 오랜 캐시카우였던 엔진오일 사업도 함께 저물 수밖에 없다. 반면 전기차는 배터리와 모터, 감속기에서 나는 열을 식힐 열관리 유체가 대량으로 필요하다. 배터리가 고밀도·고출력으로 진화할수록 이 수요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그래서 국내 정유 4사가 모두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계열사 SK엔무브가 2022년 국내 최초로 액침냉각유 시장에 진출했고, GS칼텍스는 자체 개발한 제품을 LG유플러스의 평촌2센터에 공급하며 성능을 입증했다. HD현대오일뱅크도 네이버클라우드에 냉각유를 공급하며 실증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에쓰오일까지 가세하면서, 정유업계의 ‘탈석유’ 경쟁은 액침냉각을 비롯해 바이오디젤, 반도체 화학소재 등으로 빠르게 번지는 모양새다.

기름 정제 기술이 배터리를 만난다는 것

돌아보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원유를 정제해 연료를 뽑아내던 기술이, 이제는 전기차 배터리의 안전과 성능을 좌우하는 소재 기술로 옮겨가고 있다. 항만의 무인 로봇 차량에서 시작된 실험이 승용 전기차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그 첫 단추가 올해 말 광양항에서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