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일본은 세계 경제의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분위기를 지금 세대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본 증시는 사상 최고치인 38,915포인트를 기록했고, 도쿄 긴자와 롯폰기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였습니다. 자동차는 도요타와 혼다가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었고, 전자제품은 소니와 파나소닉, 샤프가 대표하는 일본 브랜드가 곧 프리미엄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도체 시장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세계 시가총액 상위 기업 대부분이 일본 기업이던 시절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일본 경제는 긴 침체에 빠져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지만, 10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고 2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증시는 수십 년 동안 과거 고점을 회복하지 못했고,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경제 성장률은 선진국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일본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국가의 대표 사례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변화를 감지한 인물은 다름 아닌 워런 버핏이었습니다. 워런 버핏은 2020년 일본 5대 종합상사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시장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AI 혁명으로 미국 기술주가 폭등하는 시기에 왜 하필 일본이었을까. 그것도 성장주가 아닌 전통 산업 기업들에 투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버핏은 늘 그랬듯 시장이 관심을 두지 않는 곳에서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가 투자한 미쓰비시상사, 미쓰이물산, 이토추상사, 마루베니, 스미토모상사는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닙니다. 에너지, 광물, 식량, 금융, 물류, 인프라까지 사실상 일본 경제 전체에 투자하는 것과 비슷한 기업들입니다. 버핏은 이 기업들이 막대한 현금을 벌어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일본 상사들의 주가는 크게 상승했고 버핏은 투자 비중을 계속 확대했습니다. 사실 일본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버핏 때문만은 아닙니다. 일본 내부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업 지배구조 개혁입니다. 과거 일본 기업들은 주주보다 회사를 우선시했습니다.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면서도 배당을 늘리지 않았고, 주가가 낮아도 자사주 매입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일본 기업을 '돈은 잘 벌지만 주주에게 돌려주지 않는 기업'으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본 정부와 일본 증권거래소는 기업들에게 자본 효율성을 높이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PBR 1배 이하 기업들에게는 개선 계획 제출을 압박하고 있으며, 주주환원 정책 확대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일본 기업들의 배당 성향은 높아지고 있고 자사주 매입 규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변화입니다. 월가가 일본을 다시 보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이 단순히 싸기만 한 시장이 아니라 실제로 변하고 있는 시장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도 다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도요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기차 시대가 오면 도요타가 뒤처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예상보다 둔화되면서 하이브리드 전략을 유지해온 도요타가 오히려 강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요타는 최근에도 세계 자동차 판매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막대한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때 시대에 뒤처진다고 평가받던 전략이 오히려 강점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은 역시 닌텐도입니다. 과거 닌텐도는 단순히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로 인식됐지만 지금의 닌텐도는 완전히 다른 기업이 됐습니다. 마리오, 젤다, 포켓몬이라는 세계 최강 수준의 IP를 보유한 콘텐츠 기업으로 변신했습니다. 특히 최근 출시된 Nintendo Switch 2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다시 한 번 닌텐도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닌텐도의 성공이 단순히 게임 판매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 테마파크, 굿즈, 라이선스 사업까지 확대되면서 디즈니와 유사한 IP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일본 증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가 닌텐도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기업이 단순 제조업을 넘어 콘텐츠 산업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AI 시대에도 일본은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AI 산업이라고 하면 곧바로 엔비디아를 떠올립니다. 물론 엔비디아는 AI 혁명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AI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소재와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강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실리콘 웨이퍼, 정밀 측정 장비, 노광 공정 관련 소재 등은 일본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이 매우 높습니다. AI 서버 수요가 증가할수록 엔비디아만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소재·장비 기업들도 함께 수혜를 받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글로벌 투자자들은 일본을 단순히 자동차와 게임의 나라가 아니라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지정학적 변화까지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제조 파트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TSMC가 일본 구마모토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 것은 단순한 투자가 아닙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일본의 중요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일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인구 감소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부채도 부담입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장기 성장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절대적인 상황보다 변화의 방향을 중요하게 봅니다. 과거 일본은 계속 나빠지는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느리지만 분명히 좋아지고 있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글로벌 자본은 미국 AI 기업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일본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워런 버핏이 일본 비중을 늘리고, 글로벌 펀드들이 일본 주식을 다시 편입하며, 일본 증시가 수십 년 만에 역사적 고점을 돌파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직 미국처럼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투자에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보다 가장 크게 변하는 국가가 더 큰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30년 동안 외면받았던 일본. 그리고 이제 다시 일본을 공부하기 시작한 월가. 과연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최근 글로벌 자본의 움직임을 보면, 세계 최고의 투자자들은 그 가능성에 조금씩 베팅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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