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반도체는 오랫동안 “사이클 산업”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곤 했습니다. 수요가 좋을 때는 가격이 오르고, 공급이 조금만 과해지면 가격이 무너지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자자들도 “바닥이 언제냐, 고점이 언제냐” 같은 질문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런데 AI가 등장한 이후, 특히 데이터센터가 GPU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그 질문의 중심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는 업황의 방향보다 “어떤 메모리가, 어떤 고객의 설계 안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여기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은 단순한 점유율 싸움이 아니라 생태계 지배력 싸움으로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생산량과 원가, 미세공정 전환 속도가 왕좌를 정했다면, 지금은 패키징 기술, 발열 제어 능력, 고객 맞춤 최적화 역량이 승부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말이 아니라 실적과 주가로 이미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번 D램 전쟁은 “누가 1위인가”가 아니라 “누가 프리미엄을 오래 가져가느냐”의 싸움입니다.


과거 삼성전자의 D램 왕좌는 사실상 독주에 가까웠습니다. 2022년 삼성전자는 매출 약 302조 원, 영업이익 43조 원을 기록했고, 그중 반도체 부문은 약 23조 원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글로벌 D램 점유율도 40% 초반대로 1위를 유지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같은 해 매출 약 44조 원, 영업이익 약 7조 원을 기록하며 2위를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면 삼성의 우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조는 범용 D램 중심이었고, 가격 사이클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였습니다.


2023년은 두 기업 모두에게 충격의 해였습니다. 글로벌 IT 수요 둔화와 재고 조정으로 D램 가격이 급락했고, 삼성전자의 연결 영업이익은 6조 원대로 급감했습니다. 반도체 부문은 연간 수조 원대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매출이 약 32조 원으로 줄어들고, 영업손실이 약 7조 원에 달했습니다. 이는 메모리 산업의 전형적인 다운사이클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이 시점까지는 “역시 메모리는 사이클 산업”이라는 인식이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부터 흐름이 달라졌습니다. AI 서버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고성능 메모리인 HBM이 핵심 부품으로 떠올랐습니다. GPU 기반 AI 연산은 데이터 이동 속도가 병목이 되기 때문에, 고대역폭 메모리가 필수적입니다. 이 구조는 단순히 메모리 수요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메모리의 ‘질’을 바꾸는 변화였습니다. HBM은 일반 D램보다 단가가 3~5배 높고, 기술 장벽이 높아 공급이 제한적입니다. 따라서 수익성도 크게 다릅니다.


이 지점에서 SK하이닉스가 먼저 기회를 잡았습니다. HBM3와 HBM3E 제품을 빠르게 양산하며 주요 AI GPU 고객사에 공급을 확대했습니다. 2024년 SK하이닉스는 매출 약 66조 원, 영업이익 약 23조 원을 기록하며 대규모 흑자 전환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업황 회복이 아니라 제품 믹스 변화에 따른 이익 구조 개선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HBM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며 영업이익률이 크게 개선됐습니다. 주가 역시 2022년 저점 대비 2~3배 상승하며 AI 메모리 프리미엄을 반영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2024년 반도체 부문은 흑자로 전환했고, 연결 영업이익은 30조 원 안팎으로 회복됐습니다. 삼성은 HBM3E 12단 제품을 공개하며 추격에 나섰습니다. 다만 삼성은 메모리 외에도 모바일, 가전, 파운드리 등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어 메모리 호황이 주가에 그대로 레버리지로 반영되지는 않습니다. 대신 다운사이클에서는 방어력이 높습니다.


시장 점유율 측면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적인 D램 점유율은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구조로 변했습니다. 일부 분기에서는 SK하이닉스가 매출 기준 점유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다른 분기에서는 삼성이 다시 선두를 회복했습니다. 이는 단순 생산량 경쟁이 아니라 HBM 등 고부가 제품 출하 타이밍과 믹스 변화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점유율은 정적인 숫자가 아니라 동적인 결과가 됐습니다.


HBM 시장은 2023년 약 40~50억 달러 규모에서 2026년 20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연평균 40% 이상의 성장입니다. 이 시장에서 점유율 50% 이상을 확보한 기업은 단순한 메모리 업체가 아니라 AI 인프라의 핵심 파트너가 됩니다. SK하이닉스는 이 영역에서 선두 이미지를 구축했고, 삼성전자는 대규모 CAPEX와 공정 기술력을 바탕으로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습니다.


CAPEX는 또 다른 변수입니다. 메모리는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설비투자가 곧 경쟁력입니다. 하지만 과도한 증설은 다음 사이클에서 공급 과잉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현재 AI 수요가 강하다고 해서 영원히 타이트한 시장이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결국 승부는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제품에, 어떤 타이밍에 투자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고객 집중도 역시 중요합니다. 현재 AI 메모리 수요는 특정 GPU 생태계에 집중돼 있습니다. 이는 기회이자 리스크입니다. 생태계가 유지되면 안정적인 수요가 이어지지만, 구조가 바뀌면 공급사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객 다변화와 차세대 기술 대응이 장기 경쟁력을 좌우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삼성전자는 여전히 글로벌 D램 1위 기업입니다. SK하이닉스는 HBM을 중심으로 AI 메모리에서 강한 존재감을 확보했습니다. 2023년 대규모 적자에서 2024년 사상급 이익 반등까지 이어진 숫자는 메모리 산업이 단순 사이클을 넘어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번 D램 왕좌 전쟁은 과거와 다릅니다. 생산량 경쟁이 아니라 프리미엄 경쟁입니다. 점유율 경쟁이 아니라 생태계 경쟁입니다. 그리고 그 생태계의 중심에는 AI가 있습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입니다. AI 인프라가 5년, 10년 지속될 때 누가 더 높은 마진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이 D램 왕좌의 향방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