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식 이야기를 하다 보면 대부분은 화려한 기업으로 흘러갑니다. AI, 반도체, 클라우드, 전기차.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시장은 매번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진짜 오래가는 기업은 어디에 있을까?” 화려하지 않아도, 시스템 한가운데 박혀 있어서 쉽게 대체되지 않는 기업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Fair Isaac Corporation, 우리가 흔히 FICO라고 부르는 회사입니다.


많은 분들이 FICO를 단순히 “신용점수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이 기업의 힘을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합니다. 미국에서 신용카드를 만들거나, 자동차 할부를 하거나, 집을 사기 위해 모기지 대출을 신청하는 순간,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숫자가 있습니다. 바로 FICO 점수입니다.


미국은 소비 중심 경제입니다. 소비의 상당 부분은 신용을 기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신용의 시작점은 신용평가입니다. 즉, FICO는 미국 경제의 ‘입구’를 쥐고 있는 회사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 구조 안에서는 빠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첫 번째 투자 포인트입니다. 구조적 위치입니다.


사업 구조를 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FICO의 비즈니스는 크게 두 축입니다.


첫 번째는 스코어 비즈니스입니다. 금융기관이 대출 심사 과정에서 FICO 점수를 사용할 때마다 라이선스 수익이 발생합니다. 신용카드, 자동차 대출, 모기지 등 미국 소비 금융 대부분에 관여합니다.


두 번째는 의사결정 소프트웨어입니다. 단순히 점수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점수를 어떻게 활용해 승인·거절을 판단할지,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 자동화하는 시스템을 제공합니다. 은행의 리스크 관리 부서, 카드사의 승인 시스템, 보험사의 평가 모델에 FICO의 소프트웨어가 들어갑니다.


이 두 번째 영역이 특히 중요합니다. 단순 점수 회사라면 대체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지만, 의사결정 워크플로우 전체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금융기관 내부 시스템이 FICO 기준으로 설계되고, 규제 대응 체계까지 맞물려 있으면 쉽게 바꾸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제도적 락인입니다.


은행은 단순히 “더 싼 모델”이 있다고 해서 갈아타지 못합니다. 내부 검증, 모델 리스크 관리, 규제기관 승인, 시스템 재설계까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비용과 시간이 막대하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FICO는 단순한 데이터 공급자가 아니라, 사실상 금융 프로세스의 표준에 가깝습니다.


이 표준 지위는 가격 결정력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몇 년간 FICO는 신용점수 사용 단가를 인상해왔습니다. 모기지 시장에서 점수당 비용이 올라가면서 업계 불만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독점적 지위와 제도적 표준의 힘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가격 인상은 역풍을 동반합니다. 업계의 반발, 정치적 압박, 규제기관의 관심이 함께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주택금융을 관할하는 기관들은 단일 모델 체계에서 복수 모델 체계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실상 FICO 중심 체계였다면, 이제는 다른 신용평가 모델도 병행하도록 허용·요구하는 방향으로 정책 환경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장기적으로 FICO의 점유율과 가격 전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입니다. 투자자는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표준이 둘 이상이 되면 FICO의 영향력은 얼마나 줄어들 것인가.

둘째, 복수 모델 환경에서도 FICO가 여전히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경쟁 모델이 들어온다고 해서 기존 표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병행 사용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시스템 설계 경험과 데이터 축적 면에서 앞선 기업이 유리한 위치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유통 구조입니다. 신용점수는 신용평가사(크레딧 뷰로)를 통해 공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FICO가 직접 판매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기존 유통 채널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잡음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마진 구조 재편과 연결될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유통 권력과 모델 권력이 충돌하는 구간은 언제나 변동성이 큽니다.


이제 경기 사이클 측면을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금융 관련 기업은 경기에 민감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출이 줄면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FICO도 완전히 예외는 아닙니다. 모기지 시장이 얼어붙으면 점수 사용량이 감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양면성이 있습니다.


경기가 좋아 대출이 늘면 점수 사용량이 증가합니다. 반대로 경기가 나빠 연체율이 올라가면, 금융기관은 더 정교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필요로 합니다. 이때 소프트웨어 매출이 방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무풍지대는 아니지만, 사이클을 완충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기업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데이터입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미국 소비자 신용 데이터는 단순 점수 산출을 넘어, AI 기반 의사결정 모델 고도화의 토대가 됩니다. AI 시대일수록 데이터가 많은 기업이 유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FICO는 전통 금융기업이면서 동시에 데이터 기업입니다.


그렇다면 리스크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규제 리스크입니다. 복수 모델 체계 확산은 점유율 희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가격 정책에 대한 정치적 압박입니다. 가격 인상이 반복될수록 규제 리스크는 커질 수 있습니다.

셋째, 유통 채널과의 갈등입니다. 중간 사업자와의 힘겨루기는 단기 변동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넷째, 밸류에이션입니다. 이런 구조적 지위 기업은 항상 프리미엄을 받습니다. 시장이 과열되면 조정 폭도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업이 매력적인 이유는 “없으면 불편한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투자를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기업이 사라지면 시스템이 흔들릴까?” FICO의 경우, 미국 금융 시스템은 상당한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단순한 경기 테마주가 아니라 구조적 인프라 기업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업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뉴스 헤드라인에 매일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금융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관문을 쥐고 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없어지면 바로 체감되는 기업입니다.


결국 FICO는 ‘보이지 않는 독점’의 전형입니다.


AI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라고 하지만, 세상을 실제로 굴리는 건 알고리즘과 프로세스입니다. 신용점수는 그 알고리즘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알고리즘이 수십 년간 미국 경제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장기 투자 관점에서 보면, 이런 기업은 단기 테마보다 구조적 지위와 현금 창출력을 중심으로 봐야 합니다. 규제 변화가 오면 변동성은 커질 수 있습니다. 경쟁 모델이 들어오면 주가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깊숙이 들어간 기업은 생각보다 오래갑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강한 기업.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시스템을 지배하는 기업.

미국에서 돈을 빌리려는 순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기업.


이게 바로 FICO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