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시장을 바라보며 가장 자주 드는 감정은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속도는 단순히 변화가 빠르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뜨는 속도보다 질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떤 트렌드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 흐름을 즐기거나 음미하기도 전에, 이미 끝을 예상하고 다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다 아는 얘기잖아”라는 말이 유행의 초입에서부터 등장하는 시장, 이것이 지금 한국 시장의 가장 독특한 특징입니다.


과거의 트렌드는 비교적 단순한 경로를 거쳤습니다. 소수의 얼리어답터가 먼저 반응하고, 이후 입소문이 퍼지고, 미디어가 이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대중화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기업은 전략을 다듬고, 소비자는 직접 써보며 판단했고, 투자자는 숫자를 확인할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과정이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블로그, 커뮤니티, 숏폼 콘텐츠가 하나의 신호를 순식간에 증폭시키면서 “요즘 이게 뜬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미 포화 상태에 도달합니다. 트렌드는 성장 곡선을 그릴 틈도 없이 바로 과열 구간으로 진입합니다.


이 현상이 특히 한국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정보의 양보다 정보 소비 방식에 있습니다. 한국 시장은 정보를 천천히 축적하지 않습니다. 대신 요약된 결론을 매우 빠르게 소비합니다. “된다”, “끝났다”, “지금은 늦었다” 같은 단정적인 문장이 실제 경험보다 먼저 확산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충분히 써보기도 전에 이미 판단을 끝내버립니다. 질린다는 감정은 실패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결론에 도달했을 때 더 쉽게 생깁니다.


이 흐름은 소비 시장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납니다. 패션 플랫폼을 예로 들면 무신사는 매우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무신사는 한때 ‘요즘 감성’을 가장 빠르게 보여주는 플랫폼이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사느냐는 곧 취향의 표현이었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신사가 대중화되고, 누구나 사용하는 플랫폼이 되자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브랜드가 갑자기 나빠진 것도 아니고, 상품 퀄리티가 급락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들 쓰는 곳”이 되는 순간, 트렌드 플랫폼으로서의 긴장감이 사라졌을 뿐입니다. 한국 시장에서 트렌드는 대중화되는 순간 가장 빠르게 질립니다.


비슷한 현상은 뷰티 시장에서도 반복됩니다. 올리브영은 여전히 막강한 유통력을 가지고 있고, 오프라인 매장 방문자 수도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트렌디하다’는 이미지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신제품이 너무 많이, 너무 빠르게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주목받던 히트 상품은 이제 일주일 단위로 교체됩니다. 소비자는 제품을 써보고 평가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이번 주 유행템”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이미 다음 주 유행을 기다리게 됩니다. 트렌드는 늘어나지만, 기억에 남는 브랜드는 줄어듭니다.


반대로 같은 소비 시장에서도 거의 질리지 않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다이소는 트렌드를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언제 가도 일정 수준의 만족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유지합니다. 디자인이 세련됐다고 말하기 어렵고, 품질 논란도 반복되지만, “그래도 가면 뭐 하나는 산다”는 신뢰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이소는 유행의 중심에 서지 않기 때문에, 유행이 끝나도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트렌드를 타지 않는 전략이 오히려 장점이 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구조는 플랫폼과 서비스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한때 슈퍼앱 서사가 강력하게 소비되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 자체가 피로해졌습니다. 반면 쿠팡은 여전히 압도적인 사용 빈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쿠팡의 서비스는 새로울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빠르고, 실패 확률이 낮고, 복잡한 선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점점 강해지는 것은 ‘멋있어 보이는 서비스’가 아니라 ‘고민을 제거해주는 서비스’입니다. 그래서 쿠팡은 트렌드의 중심에 서지 않으면서도 질리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배달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달의민족은 이제 더 이상 신선한 서비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합니다. 그런데도 쉽게 대체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배달앱에서 새로운 경험을 원하지 않습니다. 빠르게 주문하고, 실수 없이 받고, 익숙한 화면을 원합니다. 이처럼 생활 깊숙이 들어간 서비스는 유행과 무관하게 유지됩니다. 트렌드가 아니라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투자 시장으로 옮겨보면, 트렌드 소모 속도는 훨씬 더 잔인해집니다. 특정 섹터가 주목받기 시작하면 관련 종목들이 동시에 움직이고, 스토리는 순식간에 과장됩니다. 문제는 이 기대가 너무 빨리 소진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카카오게임즈는 상장 당시 엄청난 관심을 받았습니다. 게임 산업의 성장성, IP 확장, 글로벌 진출 같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소비됐습니다. 하지만 실적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시장의 관심은 급격히 식었습니다. 회사가 갑자기 나빠진 것도 아니고, 산업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기대가 너무 빨리 앞서 나갔을 뿐입니다.


한국 시장에서는 이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생기는 순간, 회복이 매우 어렵습니다. 한 번 “다 아는 이야기”로 분류되면, 다시 주목받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전략을 실행하기도 전에 평가를 받아버리고, 투자자는 충분히 기다려보기도 전에 결론을 내립니다. 트렌드가 기업보다 빨리 달리는 구조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항상 중간 지대에 있는 선택지입니다. 가격도, 포지션도, 메시지도 애매한 기업과 브랜드입니다. 아주 싸지도 않고, 확실한 프리미엄도 아니며, 경험이 명확하게 다르지도 않은 경우입니다. 트렌드 초반에는 “괜찮아 보인다”는 평가를 받지만, 피로가 쌓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외면받습니다. 소비자와 투자자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 위해 극단으로 이동합니다. 싸거나, 비싸거나, 아주 편리하거나, 완전히 다른 경험을 주는 쪽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 시장에서는 트렌드를 맞히는 능력보다, 트렌드에 덜 흔들리는 구조가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유행이 오든 말든 일정한 사용 빈도가 유지되는지, 관심이 식어도 매출이 유지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구조인지가 핵심입니다. 이런 대상들은 트렌드 국면에서는 재미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급등도 없고, 화제성도 약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질릴 때 오히려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을 단순히 “한국 시장은 변덕스럽다”고만 해석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는 소비자와 투자자의 기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서사에는 쉽게 설득되지 않고, 실제로 남는 가치가 무엇인지 빠르게 가려냅니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기업과 아이디어는 기회를 얻기도 전에 소진됩니다.


결국 지금의 한국 시장은 트렌드의 게임이 아니라 지구력의 게임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뜰지를 맞히는 것보다, 무엇이 끝까지 남을지를 판단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트렌드가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쓰이고, 여전히 돈이 흐르는 구조인지, 관심이 사라져도 선택받을 이유가 남아 있는지,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많은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걸러집니다.


요즘 한국 시장에서 진짜 경쟁력은 가장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한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트렌드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것들, 질리지 않는 구조를 가진 것들, 설명하지 않아도 다시 선택되는 것들입니다. 이 변화는 화려하지 않지만, 이미 시장의 중심을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해하는 순간, 요즘 시장이 왜 이렇게 빨리 뜨고, 왜 이렇게 빨리 식는지에 대한 답도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