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소비 시장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중간 가격대의 붕괴’입니다. 이 표현이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유통·패션·외식·가전 등 거의 모든 소비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과거에는 소비자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중간 가격대로 모였습니다. 너무 싸면 품질이 불안하고, 너무 비싸면 부담스럽기 때문에 ‘적당한 가격, 적당한 품질’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공식이 거의 작동하지 않습니다.
소비자의 사고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소비자는 가격 그 자체보다 ‘이 가격을 지불할 이유’를 먼저 따집니다. 단순히 싸다거나 무난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선택받기 어렵습니다. 싸다면 왜 이렇게 쌀 수 있는지, 비싸다면 왜 이 정도 가격이 정당한지에 대한 설명이 명확해야 합니다. 이 기준에서 중간 가격대는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입니다. 싸지도 않고, 특별히 비싸지도 않으며, 명확한 서사를 만들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패션 시장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현상은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 중간 가격대 브랜드들은 품질과 디자인, 브랜드 이미지를 적절히 섞어 안정적인 고객층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SPA, 중국 기반 초저가 플랫폼, 그리고 명확한 콘셉트를 가진 프리미엄 브랜드 사이에 끼어버렸습니다. 초저가 브랜드는 ‘가격’ 하나로 소비자의 판단을 끝내버리고, 프리미엄 브랜드는 ‘정체성과 상징성’으로 선택을 유도합니다. 반면 중간 가격대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 가격이 왜 합리적인지, 이 브랜드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 경쟁 브랜드와 무엇이 다른지를 계속 설득해야 합니다.
외식 시장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전에는 만 원대 중후반 가격대 식당이 가장 안정적인 선택지였습니다. 너무 싸지도 않고, 적당히 분위기도 있고, 실패 확률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소비자는 아예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가성비 프랜차이즈를 선택하거나, 가격이 비싸더라도 확실한 경험을 제공하는 식당을 찾습니다. 중간 가격대 식당은 “이 가격이면 차라리 조금 더 보태서 좋은 데를 가겠다” 혹은 “이 정도면 그냥 싸게 먹자”라는 판단에 밀리기 쉽습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정보의 비대칭이 사라졌다는 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소비자가 가격과 품질을 정확히 비교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리뷰, 평점, 비교 콘텐츠, SNS 후기까지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노출됩니다. 소비자는 같은 가격대의 다른 선택지를 즉시 확인하고, 심지어 해외 가격과도 비교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중간 가격대의 ‘적당함’이 더 이상 강점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장 비교당하기 쉬운 위치가 됩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중간 가격대가 무너지는 이유는 비용 구조에서도 설명됩니다. 인건비, 임대료, 물류비, 원자재 가격이 오를수록 기업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가격을 올리거나, 마진을 줄이거나, 품질을 낮추거나. 프리미엄 브랜드는 가격 인상을 통해 이를 전가할 수 있고, 저가 브랜드는 규모와 효율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간 가격대 브랜드는 어느 쪽도 쉽지 않습니다. 가격을 올리면 수요가 빠져나가고, 가격을 유지하면 수익성이 무너집니다.
가전과 전자제품 시장에서도 이 흐름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소비자는 초저가 제품을 ‘서브 용도’로 구매하거나, 아예 프리미엄 제품을 ‘메인 용도’로 선택합니다. 중간 가격대 제품은 기능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 대비 아쉬움이 부각되고 저가 대비 가성비가 떨어져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브랜드 충성도가 약한 기업부터 타격을 받습니다.
이 현상은 단순한 경기 불황의 결과로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불황 속에서 소비자의 판단 기준이 더 정교해진 결과입니다. 소비자는 모든 지출을 ‘선택’으로 인식하고, 선택에 명확한 이유가 필요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중간 가격대는 가장 먼저 정리되는 영역이 됩니다. 애매한 만족은 가장 먼저 줄일 수 있는 소비이기 때문입니다.
투자 관점에서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중간 가격대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은 외형 성장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내부에서는 구조적 압박이 누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관비 비중이 높아지고, 할인과 프로모션 의존도가 커지며, 브랜드 희석이 진행됩니다. 반면 가격 포지션이 명확한 기업은 경기 변동에도 상대적으로 방향성이 분명합니다. 저가 기업은 거래량으로, 프리미엄 기업은 마진으로 방어합니다.
그래서 요즘 잘 버티는 기업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가격에 대한 태도가 분명합니다. 가격을 자주 흔들지 않고, 할인에 의존하지 않으며, 고객에게 “왜 이 가격이 맞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구조와 철학 문제에 가깝습니다. 중간 가격대에서 살아남으려면 과거처럼 ‘무난함’을 내세워서는 어렵고, 저가 또는 프리미엄 중 하나로 스스로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앞으로 한국 소비 시장은 더 양극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중간 가격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살아남는 기업의 수는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조용히, 그러나 매우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소비 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위치는 ‘적당히 괜찮은 기업’입니다. 소비자도, 투자자도 이제는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소비 시장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단순해졌습니다. 이 회사는 싸서 선택받는가, 아니면 비싸도 선택받는가.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기업은 중간 가격대 붕괴의 다음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 소비 시장은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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