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시장을 보면 묘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AI, 2차전지, 혁신 기술처럼 화려한 단어가 붙은 종목들은 작은 뉴스에도 크게 흔들리는데, 정작 조용하고 지루하다고 여겨지던 기업들의 주가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지수가 크게 빠지는데도 특정 종목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거나 오히려 오르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 흐름을 단순히 ‘가치주 강세’나 ‘배당주 선호’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지금 시장이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업은 정말로 돈을 벌고 있는가, 그리고 그 돈은 얼마나 예측 가능한가라는 질문입니다.
금리가 높은 상태가 길어지고, 유동성이 예전처럼 무차별적으로 풀리지 않는 환경에서는 성장 기대보다 현재의 현금흐름이 훨씬 중요해집니다. 미래의 이익을 할인해서 평가하는 과정에서 할인율이 높아지면, 먼 미래의 숫자는 급격히 작아집니다. 반대로 지금 당장 벌어들이는 현금은 거의 그대로 가치로 인정받습니다. 이 차이가 시장에서 기업 간 격차를 다시 벌려놓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이 마이크로소프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금 시장에서 AI 투자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 중 하나입니다. 연간 설비투자와 연구개발비를 합치면 웬만한 국가 예산 규모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공격적인 투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회사는 이미 충분한 현금을 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근 연간 영업현금흐름은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잉여현금흐름도 700억 달러 안팎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피스, 윈도우, 서버, 클라우드 구독 매출이 만들어내는 반복 수익 구조 덕분에 매출 가시성이 매우 높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현금이 특정 사이클이나 유행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I가 기대만큼 빠르게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장은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는 ‘AI를 잘할 것 같은 기업’이기 이전에 ‘AI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투자자들이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기업이 아니라,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기업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기술의 방향성이 흔들려도, 규제가 생겨도, 경쟁이 치열해져도 현금흐름이라는 방패가 있습니다. 이런 기업은 시장이 불안해질수록 오히려 프리미엄을 받습니다.
브로드컴은 이 흐름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기업입니다. 겉으로 보면 브로드컴은 변동성이 큰 반도체 기업처럼 보이지만, 실제 구조는 상당히 다릅니다. 브로드컴의 핵심 사업은 단기 수요에 따라 흔들리는 범용 반도체가 아니라, 특정 고객과 장기 계약을 맺고 공급하는 맞춤형 칩과 네트워크 솔루션입니다. 여기에 최근 몇 년간 소프트웨어 사업 비중이 크게 늘면서, 전체 사업 구조가 점점 더 안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브로드컴은 매년 꾸준히 200억 달러 안팎의 EBITDA를 창출하고 있고, 잉여현금흐름 역시 매우 강합니다. 이 현금은 대부분 배당과 자사주 매입으로 돌아갑니다. 시장이 브로드컴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은 성장 기대가 높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성장 스토리가 흔들릴 때입니다. AI 반도체에 대한 기대가 과열될 때는 엔비디아가 주목받지만, 시장이 한 발 물러나 구조를 보기 시작하면 브로드컴 같은 기업이 다시 평가받습니다.
최근 주가 변동성만 보고 브로드컴을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실상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브로드컴은 반도체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현금흐름 기업’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몇 안 되는 사례입니다. 기술 트렌드가 바뀌어도, 고객이 쉽게 바뀌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면, 이 흐름은 한국 시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기업이 KT&G입니다. KT&G는 성장주와는 거리가 먼 기업처럼 보이지만, 현금흐름이라는 관점에서는 한국 시장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입니다. 매년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창출하고 있고, 설비투자 부담이 크지 않아 잉여현금흐름이 꾸준히 쌓입니다.
KT&G의 매출 성장률은 높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변동성이 낮다는 점입니다. 글로벌 담배 사업과 국내 사업이 결합된 구조 덕분에 특정 지역 리스크에 대한 완충 장치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배당 정책이 시장에서 신뢰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배당이 ‘잘 되면 주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시장이 불안할 때 한국에서 선택하는 종목들을 보면, 이런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장 서사가 화려한 기업보다는, 당장 현금이 나오고 그 흐름이 예측 가능한 기업을 선호합니다. KT&G는 그 기준에 매우 충실한 기업입니다. 한국 시장에서 보기 드문 글로벌 소비재형 현금흐름 기업이라는 점에서, 지금 같은 국면에서 다시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삼성화재는 금융주 중에서도 이 흐름을 가장 잘 반영하는 기업입니다. 보험사는 금리와 규제, 회계 기준 변화 등으로 평가가 자주 흔들리는 업종이지만, 삼성화재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자본 여력이 충분하고, 손해율 관리 능력도 업계 상위권에 속합니다. 여기에 최근 몇 년간 주주환원 정책이 점점 더 명확해지면서 시장의 인식도 바뀌고 있습니다.
삼성화재의 매력은 성장 스토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 기업은 급격히 커지지도, 화려한 기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대신 ROE, 배당, 현금흐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지표에서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시장이 불안해질수록 이런 기업의 가치가 다시 부각됩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삼성화재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종목이라기보다는, 포트폴리오의 변동성을 낮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네 개 기업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모두 ‘이야기’보다 ‘구조’가 먼저 완성된 기업들입니다. 성장 기대가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는 현금흐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현금흐름은 특정 유행이나 단기 이벤트에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시장은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AI, 기술 혁신, 새로운 산업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것은 결국 현금입니다. 현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가 없는 기업의 성장 스토리는, 금리가 높고 자본이 비싼 환경에서는 쉽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지금 시장에서는 성장주와 가치주라는 구분보다, ‘버틸 수 있는 기업’과 ‘버티기 어려운 기업’의 구분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브로드컴, KT&G, 삼성화재는 각기 다른 산업에 속해 있지만, 이 기준에서는 같은 편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시장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무너질 기업들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합니다. 이 기업은 1년 뒤에 더 커질 것인가가 아니라, 3년 뒤에도 지금과 같은 현금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기업들은, 시장이 아무리 요동쳐도 결국 다시 평가받게 됩니다. 지금 시장이 조용히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여러 지표와 종목 흐름이 이미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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