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다시 반도체 강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실감이 거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1980~90년대 세계 메모리를 지배하던 일본 반도체는 2000년대 들어 구조조정과 연이은 합종연횡 실패로 경쟁력을 잃었고, 첨단 로직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TSMC와 삼성, 인텔조차 경쟁자로 꼽히지만 일본의 존재감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22년 일본 정부 주도로 설립된 라피더스가 2나노, 나아가 1.4나노와 1나노 공정까지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일본 산업정책의 상징이자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핵심 변수가 되는 과감한 실험이 시작된 셈입니다.


라피더스는 도요타, 소니, 키옥시아, 미쓰비시 UFJ 은행, NTT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공동 출자한 ‘국가 파운드리’에 가깝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국가 핵심 전략사업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보조금과 정책적 지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미 2나노 공정 개발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고, 여기에 추가적인 정부 재정이 더해지면서 최소 1조 엔 이상, 향후 2조 엔 규모로 확장될 거라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일본이 2나노에 이어 1.4나노 공정까지 추진하는 이유는 단순한 기술적 도전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에서 다시 한 번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현재 라피더스가 추진하는 기술 로드맵은 상당히 공격적입니다. 홋카이도 지토세 IIM-1 공장에서 2027년 하반기 2나노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미 장비 반입과 초기 공정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2026년에는 고객용 PDK를 공개해 실제 팹리스 고객들이 2나노 공정을 기반으로 설계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도 밝힌 상태입니다. 일정만 놓고 보면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뒤처진다고 말하기 어렵고, 오히려 ‘한 세대 뒤에서 추격하는 구도’에 가깝습니다. 인텔 역시 20A(2나노급) 공정의 양산을 2025~2026년으로 잡고 있고, TSMC는 2나노 양산을 2025년으로 예정해 놓은 상황입니다. 이런 비교를 놓고 보면 일본의 2027년 2나노 목표는 숫자상으로 충분히 범위 내에 있습니다.


최근 더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라피더스의 ‘1.4나노 공장’ 계획입니다. 라피더스는 지토세 제1공장의 2나노 라인과 별개로 같은 지역에 제2공장을 건설해 1.4나노와 1나노급 공정까지 생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2027년 공장 착공, 2029~2030년 전후 1.4나노 양산이라는 대담한 로드맵이 제시됐는데, 이 제2공장에만 2조 엔 이상이 투입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첨단 파운드리 시장은 수십조 원의 투자가 필요한 극도로 자본집약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규모 설비투자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를 단순한 제조 시설이 아니라 ‘국가 기술 독립’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미국과의 기술 동맹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고, 미국 역시 첨단 공정의 지나친 TSMC·삼성 쏠림을 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이 1.4나노 공정을 확보할 경우, 미국의 대형 팹리스와 시스템 기업들이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일본을 선택할 여지가 생기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지금보다 훨씬 다극적인 구조로 가게 됩니다.


지역적 관점에서도 홋카이도라는 선택은 전략적입니다.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필요로 합니다. 홋카이도는 땅이 넓고 냉각이 유리한 기후 조건, 그리고 향후 원전 재가동 등을 활용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보장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원전 재가동 논의가 다시 급부상한 것도 단순히 전력난 때문만은 아닙니다. 첨단 제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전력망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일본은 이를 국가적 전략 과제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라피더스의 전략에는 흥미로운 특징들이 많습니다. 우선 이 회사는 전 공정을 싱글 웨이퍼 기반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공정 제어 정밀도를 높이고 개별 웨이퍼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AI 기반의 품질·수율 개선 속도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입니다. 단점은 설비 당 처리량이 낮고 장비 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후발 주자로서 단기간에 수율을 끌어올리려면 공정 변동성을 최대한 빠르게 통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대량 배치 방식보다는 개별 웨이퍼 기반의 데이터 피드백이 수율 최적화 속도에서는 유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 접근만으로 TSMC·삼성·인텔과의 경쟁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파운드리는 기술 경쟁이자 완전한 생태계 경쟁입니다. TSMC는 30년 넘게 축적된 방대한 IP 라이브러리, 고객 신뢰도, EDA·설계 생태계, 패키징 생태계, 그리고 약속한 일정대로 공급하는 ‘예측 가능한 품질’까지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삼성 역시 시스템 LSI, 메모리, 패키징, 디스플레이 등 그룹 단위의 생태계가 공정 경쟁력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 없이 단순히 공정 숫자만 따라잡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경쟁력을 시장에서 증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라피더스에도 약점은 분명합니다. 첫째, EUV 기반 첨단 공정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라피더스에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IBM 역시 첨단 공정의 체계적 양산 경험은 제한돼 있습니다. 둘째, 고객 생태계가 없습니다. 대형 팹리스가 TSMC에서 설계·검증을 마친 공정을 일본의 새로운 파운드리로 옮길 이유가 충분할까요? 안정성, 수율, 테스트 경험이 부족한 신규 팹에 대해 보수적인 고객들은 대규모 물량을 맡기기 어렵습니다. 셋째, 인력 부족입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시스템 반도체 인력이 크게 줄었고, 글로벌 인재 경쟁에서 대만·한국·미국에 비해 급여 경쟁력이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최근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해외 엔지니어를 영입하고 있지만, 팀 전체의 학습 속도를 생각하면 여전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규모 투자와 라피더스의 로드맵이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첫째, 지금 세계 각국은 ‘반도체 기술 독립’을 국가 단위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CHIPS Act, 유럽의 EU Chips Act, 한국의 K-반도체 전략, 대만의 TSMC 글로벌 확장, 중국의 막대한 보조금 프로젝트까지, 전 세계가 반도체를 국가 안보 자산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1.4나노 투자는 단순한 기업 프로젝트가 아니라, 글로벌 정책 경쟁의 일환입니다.


둘째, 파운드리 시장은 향후 ‘3강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 내 인텔 IFS·TSMC 애리조나·삼성 텍사스가 자리 잡고 있고, 유럽은 인텔 독일 공장·TSMC 드레스덴 공장을 추진 중이며, 일본은 TSMC 구마모토와 라피더스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한국이 점유율을 유지하려면 첨단 공정뿐 아니라 패키징·HBM·AI 반도체·전력 인프라 등 부가가치가 높은 곳으로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셋째, AI·HPC용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첨단 공정의 ‘필요 용량’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즉, 라피더스가 파이를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시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기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AI 모델의 크기 증가, 데이터센터 GPU 대량 증설, 전력 인프라 확장 등은 결국 2나노 이하 공정의 생산능력 확대와 직결됩니다.


한국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반도체 부활은 분명히 경계해야 할 요소이지만 동시에 기회도 공존합니다. 일본이 아무리 공격적으로 투자해도, HBM·AI 패키징·전력 인프라·기판·광통신 등은 한국 기업들이 훨씬 강력한 우위를 가진 영역입니다. 실제로 앞으로 생산되는 2나노·1.4나노 칩 대부분은 HBM과 결합될 가능성이 높고, 초고대역 패키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시장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당분간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즉, 일본의 투자가 커질수록 한국의 패키징·HBM 공급능력 역시 가치가 높아지는 구조입니다.


또한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오히려 선제적으로 대응할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냉각·클라우드 인프라, 소버린 AI 전략, 그리고 국내에서 추진 중인 새로운 데이터센터·AI 하드웨어 협력 등이 일본의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경쟁 우위를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대규모 개발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투자자로서는 라피더스를 직접 매수할 수는 없지만, 이 프로젝트로 인해 수혜가 예상되는 기업과 산업을 충분히 분석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장비, 소재, 케미컬, 건설, 전력, 부품 업체들이 구조적으로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글로벌에서는 EUV 장비·측정 장비 업체, 기판 업체, HBM·고대역폭 메모리 공급사, 전력 인프라 업체 등이 연결됩니다. 한국 시장에서는 반도체 후공정, 전력망 투자, 초고압 변압기, 초전도 케이블, 냉각 모듈 업체들이 중장기적으로 재평가될 수 있습니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 일본의 공격적 투자가 다시 ‘보조금 경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조금 경쟁이 과열될 경우 단기적으로는 설비 투자 붐이 발생하지만, 수요 증가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공급 과잉과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과거 일본의 메모리 산업이 그러했고, 지금의 첨단 파운드리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모두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결국 최후에 살아남는 것은 기술력, 고객 신뢰, 수율, 그리고 글로벌 운영 능력입니다.


총괄적으로 보면 라피더스의 1.4나노 공장 착공 계획은 일본의 ‘반도체 부활’이 다시 시작됐다는 메시지입니다. 성공하면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한국 중심 구조에서 미국·일본까지 포함한 다극 체제로 바뀌게 되고, 실패하면 일본은 다시 막대한 재정 부담을 떠안은 채 산업 경쟁력 회복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과 정책 경쟁에는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 투자자 관점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단순히 “삼성의 경쟁자 등장”이라고 좁게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본의 투자가 커질수록 HBM·패키징·전력 인프라·AI 데이터센터 등 한국 기업들이 강한 분야의 시장 규모도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흐름을 긴 시계열로 보면, AI·첨단 반도체·전력 인프라라는 세 축이 동시에 커지는 장기 사이클이 이미 시작됐습니다. 일본의 1.4나노 베팅은 이 흐름을 더 가속하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의 시장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투자자라면, 이 변화를 단순한 경쟁 구도가 아니라 ‘더 커지는 파이 속에서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