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명품 소비의 중심에는 ‘보여주는 소비’가 있었습니다. 구찌의 큼지막한 로고, 루이비통의 모노그램은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었죠. 그러나 이제 그 화려함은 오히려 ‘구식’으로 여겨집니다. 최근 럭셔리 시장의 중심에 선 건 브랜드를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세대입니다. 이른바 ‘조용한 명품(Quiet Luxury)’의 시대, 그리고 그 중심에는 Z세대가 있습니다.


Z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과 함께 자란 세대입니다. 명품 브랜드가 더 이상 ‘희소한 정보’가 아니며, 검색 한 번이면 가격, 품질, 평판까지 비교가 가능합니다. 브랜드가 주는 ‘사회적 신분’보다, 브랜드가 보여주는 ‘태도와 세계관’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글로벌 컨설팅사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소비자의 64%가 “브랜드의 철학, 가치, 사회적 입장이 구매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습니다. 로고가 아닌 가치, 가격이 아닌 감정을 소비하는 세대인 것입니다.


이 변화는 럭셔리 시장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 놓고 있습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2024년 글로벌 럭셔리 시장 규모는 4,600억 달러를 넘어섰고, 그중 27%를 Z세대와 알파세대가 차지합니다. 2030년에는 절반에 가까운 45%까지 확대될 전망입니다. 특히 ‘조용한 명품’으로 분류되는 브랜드들의 성장세가 돋보입니다. 루이비통이나 구찌 같은 로고 중심 브랜드의 매출 성장률이 3%대에 그친 반면, 로에베, 셀린느, 보테가베네타, 메종 마르지엘라 등은 2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브랜드 인지도보다 ‘정체성’이 소비를 이끄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브랜드는 로에베입니다. 1846년 창립된 스페인 브랜드 로에베는 한때 전통 가죽 브랜드로 분류됐지만, 2013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이 취임하면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로고를 전면에서 지우고, 공예적 디테일과 실루엣으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감각적 디자인을 선보였죠. 이 전략은 SNS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제품이 아니라 ‘무드’를 파는 브랜드로 자리 잡으면서, 인스타그램에서 #Loewe 해시태그 게시물 수가 3년 만에 세 배로 늘었습니다. 2024년 로에베의 매출은 전년 대비 30% 이상 증가했고, 아시아 시장 매출 비중이 45%를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조용한 명품’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브랜드가 바로 셀린느입니다. 에디 슬리먼이 2018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셀린느는 로고 중심의 브랜드에서 감성 중심의 브랜드로 완전히 탈바꿈했습니다. 과거 피비 파일로 시절의 여성스러운 이미지 대신, 젊고 미니멀하며 남녀를 아우르는 젠더리스 감각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셀린느의 매출은 2024년 42억 유로(약 6조 원)에 달하며 전년 대비 15% 성장했습니다. 특히 20~30대 Z세대 소비자의 매출 비중이 전체의 60%를 넘었고, SNS에서의 착용 인증 게시물이 브랜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셀린느가 ‘조용한 명품’의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한국 앰배서더를 통해 글로벌 감도와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점입니다. 2022년 셀린느는 BTS의 뷔, 배우 박보검, 가수 겸 배우 수지를 브랜드 앰배서더로 선정했습니다. 셀린느는 이들을 단순한 모델이 아닌, 브랜드 세계관을 표현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활용했습니다.


뷔는 파리 패션위크 셀린느 쇼에 참석하며 전 세계 SNS를 점령했습니다. 그의 착용 컷이 공개된 직후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CelineV 관련 게시물이 24시간 만에 100만 건 이상 올라왔고, 글로벌 검색량이 140% 급증했습니다. 그는 셀린느가 추구하는 ‘조용하지만 강한 존재감’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브랜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박보검은 셀린느의 남성복 라인과 미묘한 클래식 감성을 잇는 ‘젠틀 뷰티’ 콘셉트의 대표 모델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공식 화보는 셀린느 공식 인스타그램 게시물 중 조회수 상위 10개 안에 들며, 남성 소비자층의 관심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일본과 동남아 시장에서 박보검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셀린느 일본 공식 계정의 팔로워 수는 그가 모델로 등장한 이후 3개월 만에 20% 증가했습니다.


수지는 셀린느의 여성 앰배서더로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감성적으로 풀어낸 대표 인물입니다. 셀린느는 그녀를 통해 로고 없이도 우아함을 표현할 수 있다는 브랜드 메시지를 강화했습니다. 실제로 수지가 셀린느 제품을 착용한 콘텐츠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 SNS 웨이보에서도 수억 건의 노출을 기록하며 아시아 시장 매출 확대에 기여했습니다. 그녀의 이미지가 브랜드의 ‘무드’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셀린느는 한국과 아시아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강력한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이렇듯 셀린느의 성공은 단순한 셀럽 마케팅이 아니라, 브랜드의 철학과 감성에 맞는 인물들을 정교하게 선택한 결과입니다. Z세대는 유명인이라도 브랜드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으면 금세 외면합니다. 셀린느는 화려한 광고 대신, 자연스러운 일상 속 모습과 감정의 순간을 포착한 캠페인을 내세워 소비자에게 ‘진정성’을 전달했습니다. 그 결과, 셀린느의 글로벌 검색량과 매출이 모두 상승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한국 시장에도 분명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의 2024년 럭셔리 매출 자료를 보면, 로고리스 브랜드(로에베, 셀린느, 메종 마르지엘라 등)의 성장률이 전년 대비 25%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전통적인 로고 중심 브랜드는 성장률이 한 자릿수에 그쳤습니다. 20~30대 소비자층의 재구매율이 꾸준히 상승하며, ‘한 번 사면 오래 쓰는 가치소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브랜드들의 마케팅 방식도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과거 럭셔리 하우스들은 모델과 로고를 중심으로 대중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려 했다면, 이제는 감정적 서사와 여백을 강조합니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최근 캠페인에서 ‘제품’보다 ‘감정의 온도’를 중심에 두었고, 로에베는 공예와 시간의 흐름을 주제로 한 ‘슬로우 무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셀린느 역시 제품보다 앰배서더의 ‘태도’를 보여주는 콘텐츠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뷔가 걸어 들어오는 장면 하나, 수지가 바라보는 눈빛 하나가 제품의 이미지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셈입니다.


이 ‘조용한 명품’ 흐름은 결국 소비자 심리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합니다. Z세대는 과시보다 진정성을, 소유보다 경험을 중시합니다. 명품을 통해 ‘누구보다 위에 서기’보다, ‘나답게 존재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SNS에는 “로고가 없을수록 진짜 명품”이라는 문장이 퍼지고 있고, 많은 젊은 소비자들은 “명품을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면 된다”고 말합니다. 소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방식은 훨씬 조용하고 내면적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가치 변화가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삼성물산, LF, 신세계인터내셔날 등은 ‘로고리스 감성’을 반영한 자체 브랜드를 내세우고 있으며, 무신사에서는 아더에러·RECTO·이세 같은 ‘로컬 조용한 명품’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브랜드의 크기보다 ‘브랜드의 감정 온도’가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결국 조용한 명품의 흐름은 단순한 디자인 트렌드가 아니라, 소비의 본질이 달라진 결과입니다. Z세대는 럭셔리를 부의 언어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럭셔리는 감정의 언어이자 자기 확신의 표현입니다. 브랜드가 외치지 않아도, 태도 하나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세상. 진짜 명품은 화려함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조용한 힘에서 비롯된다는 걸 Z세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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