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한국 뷰티 산업의 절대강자였던 아모레퍼시픽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까지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 라네즈, 이니스프리 등 브랜드로 중국 시장을 휩쓸며 ‘K-뷰티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2020년대 초반, 중국 시장의 급격한 침체와 로컬 브랜드의 부상, 그리고 코로나 이후의 소비 구조 변화로 인해 성장세는 급격히 꺾였습니다. 한때 6조 원을 넘던 매출은 주춤했고, 수익성은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2024년을 기점으로 아모레퍼시픽은 다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브랜드 철학과 디지털 감각’을 모두 새로 정의하는 리셋의 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과거 성공 방식을 떠올려야 합니다. 과거 아모레퍼시픽은 제품보다 ‘브랜드 스토리’를 먼저 팔았습니다. 설화수는 단순한 화장품이 아니라 ‘한국적 아름다움의 상징’이었고, 라네즈는 젊은 여성의 ‘워너비 라이프스타일’을 대표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서사가 10년 동안 너무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비자 세대가 Z세대로 바뀌는 동안, 브랜드의 언어는 여전히 2010년대의 감성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이니스프리의 광고 모델이 아무리 젊어도, 그 말투와 콘셉트가 더 이상 ‘Z세대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한계를 깨기 위해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2년 동안 ‘리브랜딩의 대수술’을 진행했습니다. 설화수는 전통 한방 이미지에서 벗어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의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미국에서는 ‘Sulwhasoo, Inspired by Asian Wisdom’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oMA)에서 팝업 행사를 열었고, 현지 뷰티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한방 화장품의 전통을 현대적인 언어로 해석했습니다. 단순히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동양의 철학이 담긴 현대적 미학”으로 리포지셔닝한 것입니다.
한편, 라네즈는 ‘기능 중심의 스킨케어 브랜드’로 전환했습니다. 과거엔 ‘워터뱅크’ 시리즈처럼 감성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수분 사이언스’와 ‘피부 장벽’이라는 과학적 키워드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립 슬리핑 마스크’는 글로벌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미국 세포라(Sephora)에서 꾸준히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아모레퍼시픽은 ‘한국형 감성’에 머무르지 않고, 과학적 신뢰성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니스프리의 리브랜딩은 아모레퍼시픽 전체 전략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과거 ‘자연주의’라는 콘셉트는 시대에 뒤처졌습니다. 이제 소비자들은 단순한 친환경보다 ‘지속가능한 가치’와 ‘투명한 브랜드’를 원합니다. 이니스프리는 2023년부터 과감하게 매장 수를 줄이고, 온라인 중심의 경량 브랜드로 변모했습니다. 동시에 ‘리사이클 용기’, ‘클린 라벨’ 등 MZ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과거엔 “자연에서 온 브랜드”였다면, 지금은 “가치를 선택하는 브랜드”로 진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브랜드 리뉴얼이 아니라 **‘기업 문화의 리셋’**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최근 2년 동안 조직 구조를 대폭 개편했습니다. 기존의 제품 중심 사업본부 체계에서 벗어나, ‘브랜드 비즈니스 유닛(BBU)’을 도입했습니다. 브랜드 단위로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해졌고, 각 브랜드가 자체적으로 마케팅과 제품 개발, 글로벌 전략을 주도합니다. 쉽게 말해, 아모레퍼시픽은 하나의 거대한 화장품 기업이 아니라, ‘여러 스타트업 브랜드의 연합체’로 변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디지털 전환 속도도 놀랍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AWS, 구글 클라우드 등과 협력해 AI 기반 피부 진단 시스템과 AR 메이크업 시뮬레이션을 개발했습니다. 고객이 모바일 카메라로 얼굴을 비추면 피부 톤과 상태를 자동 분석하고, 개인 맞춤형 제품을 추천해주는 서비스입니다. 이런 기술은 단순히 ‘디지털 전환’의 영역을 넘어, 브랜드와 고객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고 있습니다. “당신의 피부를 가장 잘 아는 브랜드”라는 메시지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죠.
글로벌 시장 재도전도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는 설화수와 라네즈가, 일본에서는 에뛰드와 마몽드가, 동남아에서는 이니스프리와 헤라가 각각 다른 포지셔닝으로 재정비되고 있습니다. 특히 설화수는 세포라, 노드스트롬 등 글로벌 럭셔리 리테일러와의 제휴를 통해 ‘K-뷰티의 프리미엄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니스프리는 태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에서 현지 파트너십 모델을 통해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수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화와 콘텐츠 협업을 통해 **‘로컬 감성의 K-뷰티’**를 실험 중입니다.
주목할 점은, 아모레퍼시픽이 이제 **‘제품을 파는 기업’에서 ‘아름다움을 설계하는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제품 라인업이 기업의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브랜드 경험이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광고, 제품, 콘텐츠, 디지털 경험이 모두 연결된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 BX)을 중심으로 기업이 재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의 가장 큰 강점은 여전히 ‘한국성(Korean Identity)’을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많은 글로벌 뷰티 기업이 ‘보편적 미’를 강조하는 반면, 아모레퍼시픽은 ‘한국의 미학’을 기반으로 차별화합니다. 설화수의 디자인에는 한지 질감과 매화 문양이, 라네즈의 패키지에는 한글에서 착안한 타이포그래피가 숨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세계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결국 아모레퍼시픽의 여정은 한국 뷰티 산업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 속에서 ‘오래된 강자’가 어떻게 다시 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죠. 브랜드를 새로 만들기보다, 이미 가진 브랜드를 다르게 말하는 것. 기술을 도입하되, 인간적인 감성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아모레퍼시픽이 선택한 전략입니다.
한때 ‘잃어버린 5년’이라 불렸던 침체기를 지나, 아모레퍼시픽은 이제 다시 빛을 되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뿌리를 지키면서도, 디지털 시대에 맞는 언어로 재해석한 브랜드. 그것이 바로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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