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지금 ‘반도체 중심의 구조’라는 거대한 축 위에 서 있습니다. 수출의 약 20% 이상이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기업의 실적이 곧 한국의 수출 지표와 환율, 주가를 흔드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계적인 기술 경쟁 속에서 반도체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수출 효자 품목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 구조가 한편으로는 한국 경제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한 산업이 국가 성장률과 고용, 주가를 모두 지배하는 구조는 단기적으로 효율적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위험합니다. 특히 글로벌 경기 침체나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때, 이 구조는 전체 경제를 함께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산업은 본질적으로 경기 변동성이 큰 산업입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특히 공급 과잉과 수요 둔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한 번 사이클이 꺾이면 기업 이익이 급감하고 수출이 곤두박질치는 특징이 있습니다. 실제로 2023년 초, 글로벌 메모리 가격 하락과 재고 누적으로 인해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30% 이상 감소했고, 그 결과 한국의 무역수지는 1년 넘게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AI 열풍과 HBM(고대역폭 메모리) 수요 증가로 시장이 급반등하면서, 다시 수출 회복세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위기와 기회의 순환’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단일 산업 의존형 경제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 구조가 앞으로 지속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고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순수한 시장 논리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국은 CHIPS Act를 통해 자국 내 생산을 강화하고 있고, 일본과 유럽도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정학적 리스크나 공급망 재편에 따라 언제든 불리한 위치로 밀릴 수 있습니다. 즉, 기술 경쟁에서 앞서가더라도 산업 구조의 ‘한쪽 쏠림’은 국가 경제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반도체 의존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도체를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도체 산업이 지닌 기술적 기반을 중심으로 인접 산업군을 확장하고, 새로운 가치 사슬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I, 바이오, 친환경 에너지, 모빌리티 등 미래 산업으로의 확장은 단순한 다변화가 아니라 반도체가 가진 기술 인프라의 ‘활용 범위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는 단순히 칩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모든 첨단 산업의 기반이 되는 ‘두뇌’이기 때문입니다.


AI 산업만 보더라도, 한국의 반도체 기술이 엔비디아나 AMD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과 결합한다면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AI 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 즉 NPU(Neural Processing Unit)나 HBM 기술은 이미 한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여기에 AI 알고리즘과 클라우드 인프라를 결합한다면 단순 제조업에서 벗어나 ‘AI 반도체 플랫폼 기업’으로의 진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중심에서 파운드리(위탁 생산)와 AI 칩으로 확장하고, SK하이닉스가 HBM 기술을 통해 엔비디아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산업 다각화는 대기업 몇 곳의 노력만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중장기적인 산업 생태계 전략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산업 정책은 여전히 제조 중심이며, 신산업에 대한 지원은 규제 완화보다 느리고 투자 유인은 부족한 편입니다. 스타트업이나 중견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고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환경은 산업 전환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단적인 예로, 바이오나 에너지, 로봇 산업 등은 여전히 대기업 주도의 ‘R&D 중심형 산업’에 머물러 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에는 생태계의 폭이 좁습니다. 산업 다변화는 기술뿐 아니라 인력, 자본, 제도의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또한 정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산업 기반 구축입니다. 예컨대 미국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나 CHIPS Act를 통해 자국 내 산업을 재편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에너지·AI·바이오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규정했습니다. 유럽연합 역시 반도체법(EU Chips Act)을 제정하며 기술 자립도를 높이는 동시에,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산업 구조 개혁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 흐름에 맞춰 산업 정책을 ‘반도체 중심 수출국’에서 ‘기술 융합형 혁신국’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에너지 전환은 한국의 산업 구조 개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도체 생산에는 막대한 전력과 물이 필요합니다. 탄소 배출 감축이 전 세계적 과제가 되는 상황에서, 친환경 에너지 전환 없이는 반도체 경쟁력조차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태양광, 수소, 소형 모듈 원전(SMR) 같은 에너지 산업은 단순히 친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제조업 경쟁력을 지키기 위한 필수 인프라로 봐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산업 다각화는 ‘기술 분야의 확장’뿐 아니라 ‘산업 에너지 구조의 혁신’을 포함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산업 간 연결’입니다. 반도체, AI, 바이오, 에너지, 모빌리티 등은 각각 독립된 산업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야 시너지를 냅니다. 예를 들어, 반도체 기반의 AI 기술이 바이오 산업의 신약 개발 효율을 높이고, AI가 전력 사용량을 예측하여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산업 간 융합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면, 한국은 더 이상 단일 산업 의존 국가가 아니라 복합 기술 기반의 첨단 산업국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업 다각화에는 인재 구조의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반도체 분야의 인력은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하지만, 다른 첨단 산업 분야는 여전히 인력 수급이 불안정합니다.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이 협력해 실질적인 융합형 인재 양성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예컨대 AI와 반도체를 동시에 이해하는 ‘AI 하드웨어 엔지니어’, 바이오와 데이터 분석을 겸비한 ‘바이오데이터 사이언티스트’ 같은 복합 전공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사람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고 연결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산업의 다양성이 생깁니다.


한국의 반도체 중심 경제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을 성장시킨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구조가 앞으로의 10년을 지탱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산업 다각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반도체라는 단일 엔진이 언제까지 한국 경제를 끌어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 번째, 세 번째 엔진’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한국이 가진 기술력, 인재, 자본을 기반으로 산업 간 융합을 촉진하고 새로운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낸다면, 한국은 단순한 제조 강국을 넘어 진정한 기술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