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도 위기를 벗어난 여천엔씨씨(NCC)는 국내 최초의 민간 주도 ‘자율 빅딜’(대규모 사업 교환)로 만들어진 석유화학 합작사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한화케미칼(현 한화솔루션)과 대림산업(현 DL케미칼)이 정부 개입 없이 각자 보유한 나프타분해공장(NCC)을 하나로 합쳐서 세웠음
1990년 정부의 투자 자유화 조처로 대기업 중심으로 석유화학 공장이 우후죽순 들어서자, 정부는 뒤늦게 현대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을 통합하는 정부 주도의 빅딜을 추진. 이에 대응해 재계가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서 시너지 효과를 낸 대표 사례. 잘나갈 땐 연간 영업이익이 1조원을 넘어서며 그룹에 두둑한 현금을 안겼음
석유화학 회사는 외국에서 수입한 원유를 증류해 얻은 나프타(중질 가솔린)를 800도의 열로 분해해 각종 산업의 기초 소재가 되는 원료인 에틸렌·프로필렌 등을 생산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여천엔씨씨 공장의 총면적은 48만평(약 160만㎡) 규모로, 대규모 시설 투자가 필요한 대표적인 장치산업.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고 매출이 줄면 거액의 설비 투자로 인한 고정비 부담이 불어나 지금 같은 ‘눈덩이 적자’를 맞이함
석유화학 업계가 벼랑 끝에 내몰린 건,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의 대규모 자체 공장 증설과 자립 영향
그러나 돈 잘 벌 때 미래 대비에 소홀했던 기업의 책임도 작지 않음. 여천엔씨씨가 영업적자에 빠지기 직전인 2018~2021년 4년간 대림과 한화그룹이 받아간 현금배당액은 1조6700억원에 이르렀음. 그러나 2021년 말 기준 여천엔씨씨가 보유한 현금은 8771만원으로, 직원 1명 평균 연봉에도 못 미쳤다. 회사의 현금을 탈탈 털어갔다는 의미
미국과 일본도 앞서 1970~1980년대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을 겪었음. 미국 기업들은 1970년대 오일쇼크 여파로 원가 부담이 껑충 뛰며 수익성 악화의 직격탄을 맞았음
일본의 경우 석유파동과 제조업 경기 침체로 공장 가동률이 70% 밑으로 굴러떨어졌음
두 나라의 구조 개편 방식은 달랐음. 미국은 원유 공급처인 대형 석유회사 주도의 인수·합병으로 사업 통합
반면 일본은 정부 주도로 과잉 설비 감축, 업체 간 통폐합 등을 추진. 한국의 구조조정은 일본 쪽에 가까울 가능성이 큼. 긴 시간과 막대한 자금이 드는 고통의 시간을 미룰 수 없게 됐음
경쟁력 없는 설비 퇴출, 자구책 모색
효성화학·한화솔루션·SK지오센트릭·애경케미칼·태광산업 등 울산 석유화학단지 내 주요 석화기업들은 전날인 19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위기의 석유화학산업, 그 돌파구를 찾다' 간담회에 참석해 범용제품 생산라인 축소와 다운스트림·스페셜티 강화로 요약되는 '자율 재편 로드맵'을 공유
정부의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하루 앞두고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한 건 정책 기조에 발맞추는 것과 동시에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절박함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
에틸렌 370만t 감축
정부와 석유화학업계가 만성적인 공급 과잉에 처한 에틸렌 생산량을 최대 370만t 줄이기로 했음
석유화학업계 핵심 원료인 에틸렌은 나프타분해설비(NCC)에서 나오는데, 국내 NCC의 4분의 1가량을 감축하는 목표를 세운 것임
정부는 ‘대주주의 자구 노력’을 포함한 충분한 사업 재편 계획을 제시한 기업에만 금융·세제·연구개발 지원과 규제 완화를 포함한 ‘맞춤형 패키지’를 제공하겠다는 원칙을 제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0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국내 10대 NCC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사업 재편 자율협약식’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자율 구조조정 방안을 제시
석화 회사채 16조는 자체 해결하라
정부가 경영난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 업계에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외화증권은 자체적으로 상환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음. 특히 일본은 석유화학 구조조정에 10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3~4년 내 끝내야 한다며 속도전을 예고
21일 금융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전날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진행된 석유화학 기업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이 같은 방침을 전달
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시장성 차입 14조 원과 외화증권 2조 원은 기업들이 알아서 막아야 한다”며 “이 부분은 정부도 대책이 없다”는 취지로 말했음
김 장관은 유동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최소한 다음 달까지는 스스로 버텨야 한다고 강조. 단기간 내 대출 지원이 없을 것임을 명확히 한 셈
김 장관은 또 “일본은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에 10년이 걸렸지만 우리는 3~4년 안에 해야 한다”며 데드라인을 2029년으로 제시. 그는 이어 “지난 십수 년간 각 기업들이 13조 원을 배당으로 챙겨갔고 이 중 대주주 몫이 7조 원가량 된다”며 “금융권에서 일부 업체에 굉장히 안 좋은 시각을 갖고 있으며 이는 망하는 길로 가는 신호”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음. 대주주가 받아간 배당 금액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석유화학 업계를 강하게 압박한 것
금융 당국도 동참. 금융위는 이날 5대 시중은행 및 국책은행과 함께 ‘석유화학 사업 재편을 위한 간담회’를 열고 구조조정 방안을 논의
채권은행단은 이날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을 통해 사업 재편 승인을 받은 석유화학 기업을 대상으로 자율협약을 우선 체결하기로 했음. 채권자의 75% 이상(채권액 기준)이 찬성한 경우에만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음. 석유화학 업계가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해야 지원이 가능하다는 게 금융권의 입장임
업계 독자생존 불가 호소
“중국이 러시아와 이란산 저가 원유를 도입하면서 한국과 본질적인 경쟁력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HD현대케미칼)”
“정부 정책이 뒤바뀌면서 올해만 1300억 원의 세제 혜택이 날아갔습니다. 전기요금도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었습니다.(S-OIL)”
정부가 국내 석유화학 생산 능력을 최대 25% 감축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20일 내놓은 뒤 업계와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업계 관계자들은 지금의 위기가 개별 기업이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주장
중국의 저가 제품 공세에 정부 지원 없는 생산량 감축만으로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연구개발(R&D) 지원과 관세정책, 조건부 금융 지원 등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기업과 대주주 스스로 자구 방안을 강구하지 않고서는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음
기업들이 가져오는 구조조정 방안을 확인한 뒤 그 수준에 맞춰 대출 만기 연장 같은 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것
21일 금융위원회와 산업부에 따르면 전날 있었던 간담회에서는 저리 대출과 만기 연장을 통한 자금 수혈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음
지난해 불거진 유동성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은행 대출을 대거 늘린 롯데케미칼의 목소리가 특히 컸음. 롯데케미칼이 은행권에 빌린 대출 중 만기를 불과 3개월 이내로 남겨둔 몫만 13일 기준 6686억 원에 달함. 최근 부도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여천NCC와 관련해서는 크레디트 라인(여신 한도)이 줄어드는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청도 나왔음
한화를 비롯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들은 관세 공백을 틈타 중국 외 국가들도 한국에 저가 제품 수출을 늘리고 있다고 지적. 실제로 독일·프랑스·노르웨이는 석유화학 제품의 일종인 폴리염화비닐(PVC) 생산 능력을 늘린 뒤 잉여 물량을 한국 시장으로 보내고 있음. 업계에서는 해외 PVC 제품의 덤핑률을 30~40% 수준으로 추산. 이에 김정관 장관은 “관세 공백 문제는 직접 챙기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음
<시사점>
산업화를 진행하는 가운데 경쟁력이 상실한 산업을 신속히 구조조정하여 활로를 찾아주는 것은 중요한 국가정책 중 하나입니다. 과거 1960년대와 70년대는 경공업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경공업(섬유, 의류, 신발 등)에 대한 구조조정을 추진했습니다. 1980년대는 중화학공업 과정에서 과잉, 중복 투자가 발생한 자동차, 전자, 조선, 금융기관 등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1990년대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해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그리고 금융산업에 대한 대대적 조정을 단행해 부실금융기관을 퇴출시켰습니다.
2000년대는 금융기관에 대한 2차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닷컴버블에 따른 벤처기업을 대거 정리했으며, 통신산업을 KT, LG, SK의 3강 체제로 정리했습니다.
2010년대에는 조선업과 해운업, 철강업, 석유화학업, STX그룹, 두산 인프라코어 매각, 한화의 삼성 방산부문 인수 등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2020년대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의 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아마도 이번 석유화학업계의 구조조정이 가장 큰 이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석유화학업계의 부실화는 중국발 공급과잉, 세계적 수요 정체, ESG 규제와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입 등으로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석유화학산업이 직격탄을 맞은데 따른 것입니다.
구조조정의 주요 방향은 신정부의 금융세제지원을 바탕으로 경쟁력 없는 범용제품을 축소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것과 동시에 플라스틱 리사이클링 등 친환경 기술의 확대와 수소, 재생에너지와의 결합을 통한 에너지기업으로의 변신을 도모해 나가는 방향이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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