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으로 또 한 번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습니다.

일본, 영국 등 주요 무역 파트너 국가들에게 수입세를 대폭 인상했는데, 놀랍게도 글로벌 시장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일련의 무역 합의를 ‘성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 소비자들 입장에서 보면 40년 만에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에서 겨우 회복 중인 시기인데요. 관세는 기본적으로 수입품에 붙는 ‘세금’이기 때문에,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런 방식의 무역 정책이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단순히 관세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관세를 먼저 위협적으로 던진 뒤,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안도감’을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한 겁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바로 그 점이 이번 정책의 핵심이라고 분석합니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항상 계획이 있습니다. 단지 그게 당장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입니다.

이달 초, 미국과 일본 간 무역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산 제품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양국은 15% 관세 수준에서 합의에 도달했고, 미국 증시는 상승세를 탔습니다. 일본 증시는 그야말로 폭등했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15%라는 수치가 과거에 비해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는 일본산 제품에 대한 평균 관세가 1.5% 수준에 불과했거든요. 올해 4월 이후엔 10%였는데, 그보다도 높아진 겁니다. 그럼에도 시장이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핵심은 ‘확실성’입니다.

시장에서는 숫자의 크기보다, 그 숫자가 예측 가능한지 여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높은 수치라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다면 기업 입장에선 훨씬 대응하기 쉽기 때문이죠. 이제라도 최종 관세율이 어느 수준에 정착될지를 기업들이 예측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긍정적이라는 건데, 조금은 낯선 논리이긴 합니다. 처음 트럼프가 위협한 수치에 비하면 양보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기존보다 훨씬 높은 관세인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데도 시장 입장에서 불확실성이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안정 요인이라는 겁니다.

TD 증권의 크리스 크루거라는 전문가는 트럼프가 ‘오버턴 윈도우’(Overton Window)를 이동시켰다고 표현했습니다. 오버턴 윈도우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책 선택지의 범위를 뜻하는 개념인데요. 원래는 용납되지 않았을 수준의 관세가 이제는 ‘괜찮은 수준’으로 느껴지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번 전략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4월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무역 협상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3월 말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를 전격 발표하면서 주식 시장이 급락하고 약세장에 진입할 뻔하자, 트럼프는 4월 9일 관세 적용을 90일간 유예했습니다. 이후 시장은 반등했고, 소비자 심리도 최악의 수준에서 점차 회복세를 보였습니다.

이어진 발표들이 시장을 더욱 안정시켰습니다. 중국에 부과됐던 초고율 관세에서 스마트폰과 전자제품이 제외됐고요. 5월 중순에는 중국과의 협상에서도 극적인 진전이 있었습니다. 양국은 상호 일부 시장을 개방하고,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145%에서 35%로 대폭 인하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상 물류를 봉쇄했던 수준에서 상당한 완화였죠.

영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과의 무역 합의도 이어졌죠. 트럼프는 관세를 ‘협상 카드’로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기술기업에 부담을 주는 디지털세와 같은 ‘비관세 장벽’에도 강하게 반발하며, 무역의 공정성을 주장해왔습니다.

예컨대 캐나다가 온라인 기업들에 새로운 디지털세를 추진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했고, 이후 캐나다는 해당 세금 도입을 철회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와 동시에 미국산 제품의 수출 확대도 병행해왔습니다. 영국에는 소고기, 일본에는 쌀과 자동차, 동남아 국가들에는 다양한 품목의 수출을 포함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이끌어낸 것이죠.

그렇다고 트럼프가 무역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고 보기는 이릅니다. 특히 유럽연합(EU)과의 협상은 여전히 교착 상태이고, 추가적인 관세 인상이 예고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일 도입한 10%의 ‘보편적 관세’를 15% 또는 20%까지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미국과 글로벌 경제가 고율의 관세를 어느 정도 견뎌낸 모습이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특히 미국 내 수입업체들이 관세 시행 전에 들여온 재고 물량을 소진하고 나면, 실질적인 부담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트럼프 행정부도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과의 협상에서 예상을 웃도는 결과를 내놓은 것도, 무리한 관세 인상으로 인한 경제적 반발을 의식한 결과로 보입니다. 너무 과도한 관세는 미국 기업과 투자자, 그리고 국민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죠.

이미 여러 가지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가는 다시 오르고 있고, 기업 심리는 조금 나아졌지만 실적과 성장 전망은 여전히 정체 상태입니다. 고용 시장 역시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 달러화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종합해보면, 현재의 ‘안정’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단기적으로는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위협과 협상, 그리고 강한 존재감을 통해 원하는 조건들을 하나씩 받아내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런 방식의 무역 정책이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아무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시장은 잠시 안정을 되찾은 듯 보이지만, 다음 협상의 강도에 따라 언제든 다시 요동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