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업계가 스프와 소스 제조사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외부 업체에 의존해 오던 라면 스프와 액상·분말 소스 조달 체계를 내부로 끌어들여 제품의 품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원가 절감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조미소재 사업 자체를 수익원으로 키우겠다는 전략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움직임이 단순한 공급망 강화 목적을 넘어서 규제 회피라는 숨은 의도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먼저 삼양식품은 최근 국내 소스 및 스프 전문기업인 지앤에프(GNF)를 600억 원에 인수하기로 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앤에프는 농심, 오뚜기 등 다수의 라면회사에 제품을 납품해온 OEM 기반의 탄탄한 제조사로, 2023년 기준 매출 417억 원, 영업이익 32억 원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삼양식품이 외부에서 납품받던 라면 소스와 스프를 자체 생산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신호로, 이번 M\&A는 2015년 냉동식품 업체 새아침(현 삼양스퀘어밀) 인수 이후 10년 만에 이뤄진 대형 인수건입니다.
삼양식품은 그동안 급격히 늘어난 매출과 해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밀양 2공장을 증설하고 일일 가동시간도 23시간으로 늘렸습니다. 이에 따라 라면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액상·분말 스프 공급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결과적으로 소스 제조사를 내재화하는 방식이 채택된 것입니다. 기존에는 불닭 소스가 S\&D라는 특정 업체에 독점적으로 의존돼 있었으나, 지앤에프 인수를 통해 공급망을 분산하고, 가격 협상력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실제로 독점 공급 구조 붕괴 우려로 인해 S\&D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인수는 삼양식품이 단순히 제품 원가를 낮추려는 목적을 넘어서, 자체 소스 브랜드를 기반으로 ‘소스 중심 마케팅’을 강화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삼양식품은 최근 뉴욕, 상하이,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 등지에서 불닭 소스를 앞세운 글로벌 마케팅 캠페인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스를 하나의 브랜드 제품으로 포지셔닝하고 이를 통해 반복 구매를 유도하는 전략이며, 이는 결국 라면을 넘어 소스 카테고리에서 스테디셀러를 창출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2027년 중국 신공장 준공을 앞둔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수요를 만들어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편, 농심 역시 조미식품 제조사 ‘세우’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세우는 간장, 된장, 고추장, 쌈장 등 전통 장류뿐 아니라, 라면에 들어가는 양념 분말가루를 제조하는 회사로, 신라면 스프의 핵심 원재료를 납품해온 곳입니다. 2023년 매출은 1,368억 원, 영업이익은 106억 원에 달하며, 인수가액은 1,000억 원 안팎으로 알려졌습니다.
농심의 경우 세우와의 인수가 단순한 사업 전략이라기보다는, 계열 구조와 지배구조와 얽힌 이해관계가 깊습니다. 세우는 농심 창업주 신춘호 회장의 외가 측 일가가 소유한 기업으로, 2021년까지는 농심그룹의 계열사였습니다. 당시 세우의 전체 매출 가운데 60% 이상이 농심과의 거래에서 나왔으며,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202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세우를 독립친족기업으로 인정하면서 계열에서 분리됐으나, 이번 인수로 다시 농심 품에 들어오게 되는 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공급 안정성 확보가 주된 이유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정거래법상 사익편취 규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도 깔려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외가 일가의 기업을 아예 정식 계열로 편입시켜 투명성을 높이고,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잠재우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농심이 세우 외에도 다수의 외가 기업과 지속적으로 거래하고 있다는 점은 향후 공정위 규제 이슈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라면업체들의 스프·소스 제조사 인수는 표면적으로는 공급망의 안정성, 품질 경쟁력 강화, 원가 절감 등의 경영 합리화를 위한 의사결정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계열사 지배구조 재편과 규제 회피 전략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런 움직임이 경쟁사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기존에 동일한 소스 공급처를 이용하던 다른 라면 기업들은 대체 공급망 확보에 나서야 하며, 중장기적으로는 이 역시 소스 제조사에 대한 인수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라면 제조사들이 단순히 라면을 만드는 데서 벗어나 핵심 원재료까지 지배하려는 이 흐름은, 식품 산업 전반의 밸류체인 재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번 삼양식품과 농심의 사례는 ‘조미소재 내재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유통·제조 전략의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라면 제조사는 단순한 완제품 생산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핵심 부품인 스프와 소스를 직접 통제하고, 장기적으로는 해당 부품 자체를 수익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ESG 경영, 소비자 신뢰 확보, 브랜드 강화라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시장 경쟁을 촉진하고 규제 대응을 둘러싼 이슈도 더욱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흐름이 일시적인 트렌드에 그칠지, 아니면 식품 산업 전반의 구조적 변화로 이어질지는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